[들어가면서]
영국의 스피커 회사, 셀레스천(Celstion)은 1982년 부터 획기적인 모델을 내놓으며 오디오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습니다. '작은 크기의 스피커로 듣는 거대한 스케일의 울림'이 비전이었던 셀레스천은, SL6라는 스피커를 내놓음으로써 그 실현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오디오 기술의 혁신뿐 아니라, 시장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면서 셀레스천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는데, 이런 모든 놀라운 결과 뒤에는 바로 그래험 뱅크(Graham Bank) 박사가 있었습니다. 물리학 박사인 그는, 1974년 부터 셀레스천의 기술부장과 연구부장을 맡으면서 많은 성과를 내놓았습니다. 음파 파동의 움직임과 소리에 의한 스피커 콘의 진동을 분석하기 위해 레이저 간섭측정법(Laser Inferometry)을 세계 최초로 사용하는 등 그의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연구방식은 실로 획기적이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피커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와 스피커 설계뿐 아니라, 그 제반 기술들에 대하여서도 엄청난 공헌을 하였으며, 1970년대 부터 현재까지 30년 넘는 세월동안,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스피커 기술 개발에 관여해오고 있습니다. 실로 스피커의 역사는 뱅크 박사의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셀레스천이 비전 역시 그래험 뱅크 박사의 연구에 따라 실현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때, 와피데일(Wharfedale) 사로 이적하여 근무하기도 하였던 뱅크 박사는, 곧 셀레스천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의 재복귀와 함께 1987년, 그 유명한 SL700모델이 완성됩니다. 이전에 SL6계열의 스피커와 SL600이 셀레스천의 비전을 사람들에게 알렸던 것이라면, SL700은 바로 그 비전을 실현시켜 사람들 앞에 직접 보여준 스피커였습니다. 조그만 박스 안에서 울려오는 거대한 스케일의 압도적인 울림은, 그 당시 모든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이전 셀레스천의 모델을 듣고, 작은 크기에서 듣는 큰 울림에 '어느 정도' 좋은 인상을 가졌던 사람들도, SL700이 보여준, 차원이 다른 스케일에 그만 경악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글에서, 바로 그 셀레스천 SL700 스피커에 대하여 사용기를 작성하고자 합니다.
먼저, 셀레스천 SL700과 함께 사용한 저의 오디오 시스템입니다.
프리엠프 : CYRUS aCA 7.5 pre amplifier
파워엠프 : CYRUS Smartpower amplifier (모노모노)
CD player : CYRUS CD 6SE
그리고 사용기 작성동안 감상하였던 음반입니다.
(곡 이름/연주자/음반 레이블)
1. 비발디, 올림피아데(L'Olimpiade)/토마스 헨겔브록(Thomas Hengelbrock)/deutsche harmonia mundi
2. 베버, 유리안테(Euryanthe) 서곡/칼 슈리히트(Carl Schuricht)/hanssler classic
3. 하이든, 첼로 협주곡 C장조/로스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EMI calssics
4. 모차르트, 플룻 협주곡 G장조/오렐 니콜레(Aurele Nicole)/Philips
5.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폴 루이스(Paul Lewis)/harmonia mundi
[SL600에 이은 SL700]
셀레스천 개발팀은 SL700 개발에 앞서, 이전에 발표하였던 SL600의 한계를 절감하였을 것입니다. SL600은 중저음이 도드라지는 셀레스천 특유의 음색을 바탕으로, 금속재질의 인클로져를 사용함으로써 소리의 투명성과 개방감을 살린 훌륭한 스피커입니다. 하지만, 낮은 음역대의 뭉뚱그림, 그리고 세련되지 못한 저음 처리로 인한 공간감의 절대 부족은 SL600의 치명적인 단점이었습니다. 셀레스천 개발팀은 이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여,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SL700을 개발하였습니다. 'SL600의 장점인 음악성을 최대한 살리고, 세련되지 못한 저음처리와 부족한 공간감을 보완하자!' 가 바로 개발팀의 기본철학이었고, 개발팀은 그래험 뱅크 박사의 지휘 아래, 그 철학을 멋지게 실현시켰습니다.
[회색 망토의 절대 군주가 호령하는 제국, 셀레스천 SL700]
누구나 SL700을 듣게 된다면, 그 압도적인 스케일에 깜짝 놀랄겁니다. 내 주위의 공간을 강력하게 휘어잡는, 그 거대한 스케일은 도무지 조그만한 상자 안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만약, SL700옆에 커다란 톨보이형 스피커가 놓여있다면, 십중팔구 그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로 착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SL700의 이런 엄청난 스케일의 비밀은 바로 강력하면서도 탄탄한 저음에 있습니다. 음악이 시작될 때부터 바닥으로 좌악 깔리는 저음은, 어느 순간 내 주위의 모든 공간을 꽈악 메워버립니다. 그 청음공간이 크던 작던 간에, SL700은 탄탄하고 강력한 저음으로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 안에서 압도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통 스피커에서 저음이 강조되면 벙벙거리거나 또는 어색한 음역대의 배열로 위화감이 느껴지곤 하는데, SL700의 저음은 강력하면서도, 탄력성과 섬세함이 살아있어서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풍부하면서도 섬세하고, 강력하면서도 탄력있는 저음에 안정감이 있고, 청취공간을 꽈악 메우는 숨막히는 스케일이 있을 뿐 입니다.
바로크 음악, 그리고 베네치아 음악의 화려함이 한껏 묻어나는 비발디의 오페라 올림피아데. 곡 자체의 화려함에 더하여, 토마스 헨겔브록(Thomas Hengelbrock)의 지휘는, 마치 올림픽 선수들의 근육진 몸매를 보듯이, 그렇게 강력하고 눈부시면서도 절도있는 저음을 만들어내고, 그 저음을 바탕으로 템포를 한껏 빠르게 하여 곡의 박진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헨겔브록의 지휘로 듣는 올림피아데 서곡은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흥분을 선사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SL700으로 올림피아데의 서곡을 들었을 때, 묵직한 저음을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대단한 스케일에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곡이 시작할 때 부터 튀어나오는 바이올린 질주에 이은, 베이스의 화음은, 마치 시커먼 미노타우루스(그리스 신화에 등장, 인간의 몸에 거대한 수소의 머리를 하고 있음)들이 만들어내는 땅의 울림과도 같이, 그렇게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지진과도 같은 울림에 나는 시커먼 미노타우루스들의 근육진 몸매를 보았고, 그 몸매의 끈적이는 회색 살갗은 셀레스천 SL700 특유의 음색이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의 진동은 탄력있고 절제되어 있어서, 마치 그 괴물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듯, 그렇게 셀레스천 SL700은 회색의 절대군주 휘하에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과도 같았습니다.
SL700은 그 대단한 스케일과 함께 특유의 음색이 있는데, 그 특유의 음색은 명확하지만 눈부시지 않고, 섬세하지만 밝지 않습니다. 저음이건, 중역이건, 그리고 고음이건 간에, 모든 음역대에서 셀레스천 특유의 음색이 살아있어, 다소 그늘이 드리워진 듯 어두우면서도, 현의 결이 살아있는 감칠맛이 있습니다. 독일의 위대한 지휘자 칼 슈리히트(Carl Schuricht)의 연주를 듣고, 나는 그가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규모에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의 연주는 마치 노먼 포스터의 건축물을 보는 듯, 그렇게 커다란 '규모'로 다가왔습니다. 여느 오케스트라와 다를 바 없이, 바이올린 주자 여러명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확실한데, 그 소리는 마치 높고 넓은 빌딩의 회색벽과도 같이 그렇게 크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악기파트들이 다 이런 규모를 부여주고 있어서, 곡이 진행되는 동안 마치 거대한 빌딜을 건설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정확하고 절도있는 템포와 계산적일 정도로 치밀한 강약대비는 그 '거대한 빌딩'의 위용을 더 해주고 있었습니다. 도이치 민족 특유의 정확함, 치밀함, 그리고 우울함이 슈리히트의 사운드에 베어있는데, 이런 특성은 SL700과도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SL700의 회색빛깔 사운드는 슈리히트의 음색과 비슷하며, SL700의 스케일은 슈리히트가 만들어내는 '건출물'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강력하면서도 섬새한 저음뿐 아니라, 중역대의 도드라짐도 여느 셀레스천의 모델과 비슷하지만, SL700은 음의 밀도가 높아서, 그 결과 강력한 저음이 중역대를 받춰주게 되고, 이는 중음의 감동을 더 하는 성과를 얻습니다. 내가 자주 듣는, 로스트로포비치의 하이든 첼로 협주곡을 울려보았을 때, 로스트로포비치의 풍부한 울림에 나는 그만 감동에 복받쳐 가슴이 울컥하였습니다. 사람이 듣는 음역대 중에서, 중역대가 가장 큰 감동을 선사한다고는 하지만, SL700은 그 중저역대의 울림이 매우 강하여,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SL700특유의 저음의 탄탄함은, 청취환경을 뒤 흔드는 착시현상까지 유발하여, 한 번 더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가슴 아찔한 감동은, 이제껀 들어온 다른 셀레스천 모델에서는 느껴보지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00% 통제의 절대 군주는 없는 법, 장점이 곧 단점]
앞에서 설명하였든, 셀레스천 SL700은 풍부하고 강력한 저음을 앞세워, 엄청난 공간감을 구축하고, 그 특유의 음색은 감상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강력한 저음은 마치 양날의 칼처럼 작용하여, 고음의 묘사력을 까먹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저음이 워낙 강조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셀레스천 음색 자체 때문인지는 몰라도, SL700은 전반적으로 음역이 '침체'되어있습니다. 모차르트 플룻 협주곡 G장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담백하고 깔끔한 연주가 장기인 니콜레의 연주로 들었던 모차르트 플룻 협주곡에서, 플룻의 고음이 다소 낮게 들리기도 하였고, 플룻 특유의 금속성이 사라지면서 긴장감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전반적으로, 플룻의 눈부신 날카로움이 다소 무뎌진, 뭉툭한 소리가 났습니다.
제언하자면, SL700은 전반적으로 저음이 강조된 스피커입니다. 어느 곡을 듣더라도 저음이 크게 들리지만, 저음의 묘사력과 탄탄함으로, 위화감을 극복하고 자연스러운 음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식은 모든 곡에는 성립하지 않았는데, 특히 피아노 곡에서는 저음의 '왜곡'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피아노 가온 C음을 기준으로, 아래 위 한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곡은 비굑적 무난한 소리를 들려주었지만, 그 이상 음이 내려가게 되면, 소리가 명확하지 못하고 피아노 음 하나하나가 다 뭉쳐버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특히 빠른 아르페지오의 저음에서 이런 모습이 두드러졌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3악장에서, 곡 도입부분 부터 시작되는 피아노의 강렬한 주제는 매우 웅대하고 장대하지만, SL700에서는, 빠른 왼손의 화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고, 다 뭉개져버려 곡의 인상을 망쳐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곡에서도 가온 C음에서 두 옥타브 이상 아래에서의 빠른 패시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르페지오는 듣기 민망할 정도로 왜곡되게 들렸습니다. 더욱이, 이는 피아니스트의 개성을 없애버리는 무참한 일인데, 명확한 음 처리, 유려한 템포 루바토가 장기인 폴 루이스와 같은 피아니스트가 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
'어떻게 하면 조그마한 스피커에서 커다란 공간감을 묘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그래험 뱅크 개발팀의 대답은 바로 '저음을 통한 공간감 확보'였습니다. 이 시도는 어찌보면 모험이었고, 또 다르게 보면 뱅크의 엄청난 자신감의 발로였을 것입니다. 스피커 설계자들에게 저음의 음역을 내리고, 그 양감을 크게 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저음이 크게 울리면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음악성이 떨어지게 되고, 위화감이 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셀레스천의 뱅크 개발팀은 이것을, 저음의 섬세함과 탄력성있는 음색으로 극복하려 하였고, 결과는 멋지게 성공하였습니다.
실제로 연주회장에 가보면, 셀레스천 SL700의 저음처럼, 깊고 큰 저음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SL700은 왜곡이 많은 스피커이지만, 대신에, 저음의 묘사력을 살리고, 공간감을 구축하면서, 또 다른 측면에서 음악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클래식 이외의 다른 음악 장르에서도 저음은 매우 중요한데... 당장 재즈 트리오만 보더라도, 베이스와 피아노의 왼손이 반주를 하고, 피아노의 오른손이 화음을 넣고, 그 위에 다른 솔로 악기나, 보컬이 노래를 부르는 식입니다... 이 때 저음은 바로크 음악의 통주저음처럼, 음악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서, 실제로 저음은 재즈음악이 주는 감동의 커다란 요소 중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SL700은 그 특징이 어느 특정 장르가 아니라, 모든 음악장르에 두루두루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명기로 쉽게 알려진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연상될 정도의, 그 압도적인 스케일은 SL700을 전설과도 같은 명기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SL700역시 셀레스천 개발팀에 중요한 숙제를 남겼습니다. 적절하지 못한 피아노의 저음 처리나, 고음의 긴장감 부족도 물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SL700의 음색 그 자체 였습니다. (어찌보면 위의 두 문제도 결국 음색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SL시리즈의 첫 번째 모델인 SL6와 SL600을 필두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도 '거의' 일관되게 유지되던 셀레스천 특유의 음색이, 결국 셀레스천이 최고급(hi-end) 스피커를 만드는 회사로 발돋움하는데 발목을 잡았던 것입니다. 현악기의 현이 느껴지는 섬유질, 다소 그늘이 지는 듯한 어둠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셀레스천 음색이었지만, 거기에는 우아함, 눈부신 투명함이 부족하였고, 셀레스천이 그토록 꿈꿔왔던 공간감을 설령 달성하였다 하더라도, 그 공간감이 세련되지는 않았습니다. 셀레스천은 매우 잘 만들어진 스피커임에는 분명하였으나, 음악을 우아하게 울려주는 '최고급' 스피커라고 하기에는, 그 음색에서 부족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SL700의 개발로, 셀레스천은 그들의 비전을 완벽하게 실현시켰고, 동시에,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이 추구해야할 비전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SL700의 폭발적인 인기를 엎고, 더 높은 비전을 스스로 제시하며, 셀레스천은 다시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래킬만한 새로운 모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