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실용 논쟁이 뜨거울 때 감명깊게 읽은 글인데 허락없이 옮겨 봅니다.
한번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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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심미주의와 실용주의, 실용오디오의 오디오관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203.228. http://www.enjoyaudio.com/zbxe/?document_srl=839634
jethrotull님이 실용오디오의 오디오관을 잘못 이해하시는 것은 사실 놀라거나 이상해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이트를 드나드는 분들의 대부분, 심지어 스스로 실용오디오에 공감한다는 분들의 대부분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그럴듯한 추론을 하고 있고, 몇 년전엔가는 운영자님께 드리는 글을 게시판에 한두번 남기기도 하였는데, 운영자님은 별 관심이 없으신 듯 하여 마음을 비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jethrotull님의 오해는 이렇습니다. 님이 드신 비유를 그대로 들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기, 청자로 만든 술잔과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막잔이 있습니다.
심미주의적 관점에서 이 두 잔은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집니다. 늘어진 수양버들을 감상하며 냇가의 정자에서 서늘한 바람을 만끽하며 비취빛 청자 잔에 술 한 잔 하는 정취를 수치로 계량하거나 어떤 과학적 방법론으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계량화하거나 해석할 필요도 없이, 청자로 마시는 술과 막잔에 담아 마시는 술맛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이 느낌을 즐기기 위해 값비싼 청자술잔을 구입하느냐, 그냥 돈들이지 않고 막잔으로 벌컥벌컥 마시냐는 전적으로 각 개인이 결정할 일입니다. 누가 뭐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청자에 술을 마시면 청자 유약의 XX성분과 술의 XX성분이 XX현상을 일으켜 오래 숙성시킨 듯한 깊은 맛이 난다"고 한다면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이 경우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그 주장이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검증된다면, 그 검증자는 자신이 사용한 과학적 방법을 근거로 "청자잔과 막잔에 동일한 술을 담아 마시면 술의 성분이나 향미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나지만, 눈을 감고 두 잔의 술을 마셔보니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만큼 인간은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더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이는 역시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 정말로 청자잔과 막잔이 술의 맛과 향을 바꾸며, 그 바뀌어진 차이가 인간이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논의에 이르면 이는 심미주의와 실용주의의 대립구도가 아닙니다. 어느쪽이 사실이냐, 사실이 아니냐- 그것을 가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과학적 사실'은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독자성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만약 어떤 이가 "실제 맛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내가 청자잔으로 술을 마시는 건 내게 아주 우아하고 고급스런 느낌을 준다" 한다면 그건 심미주의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일이고, 누가 뭐라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청자잔이 실제로 화학적으로 작용하여 맛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값비싼 청자잔을 무리해서라도 구입한다"고 한다면 이때는 누군가 "청자잔이 실제 당신이 마시는 술을 화학적으로(차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상대의 심미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위의 비유를 계속 예로 들자면, 지금의 상태는 실용오디오가 "이러이러하게 실험을 해보니 청자 잔에 담은 술과, 막잔에 담은 술은 화학적으로 차이가 없다. 있다고 해도 인간의 미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정도다. 그것에 대해선 이러이러한 테스트로 이러이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의 주장은 "내가 마셔보니 분명히 맛이 다른데 무슨 소리냐! 그럼 분명 다른 맛을 느끼는 이 수많은 사람이 다 정신병자란 말이냐!"고 발끈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용오디오는 그분들이 분명 "다르게 느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분들은 그것을 '심미주의에 대한 도전'쯤으로 여기니 이 양자가 제대로 논쟁하고 있다고 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서로 주장하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빈티지 오디오가 주는 낭만, 그 낭만이 일으키는 청각상의 달라진 느낌, 진공관 불빛이 주는 따뜻함, 그 따뜻함에 연결되는 어떤 특정한 느낌, 하이엔드 앰프가 주는 신뢰감, 그 신뢰감이 초래하는 단단한 소리-라는 착각 등을 부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용오디오는 우리 모두가 계측기가 아닌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물리적 소리 외의 요인에 영향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다르지 않더라도 우리 귀에 다르게 들리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다르게 들리는 주관적인 청취가 값어치 있는 소중한 취미생활이고, 각자의 심미주의가 인정되는 즐거운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두 앰프가 정말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거짓된 주장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크레빈슨 앰프가 주는 여러가지 즐거움 때문에 값비싼 이 앰프로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앰프와, 그 위에 올려져 있는 중고가 이십만원 짜리 AURA 인티 앰프가 물리적으로는 제가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 압니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과 느낌으로 듣는 마크레빈슨의 가치에 저는 기꺼이 댓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 친구가 "마크레빈슨은 정말 단정한 저음을 내면서도 스피커를 넉넉하게 구동해 주기 때문에" 마크 레빈슨 앰프를 구입한다고 하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지적해 줄 것입니다.
실용오디오에 대한 오해는 그 대부분 '실용'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 어의에 대한 선지식에서 비롯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따로 말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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