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만 해도 관객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공연에 야유를 보내고
무대로 뭘 던지는 일은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어딜 가도 그런 광경은 찾기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게 단순히 자기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거나,
뭘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지 못하는 낮은 수준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족한 공연이든지, 불만스러운 공연이든지 마지막에 박수 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예술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술에 대해서 정답을 추구했던 과거와는 달리
예술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적 사고나
예술이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습니다.
옛날에는 예술작품은 신의 은총을 나타내는 것이거나, 음악은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현대의 예술은 그 다양성을 전제로 전개되고 있고
단일한 목적이나 개념으로 환원되거나 통합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본다면 어떤 작품이나 공연이 감상자 본인이 가진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폄하하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단언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느 공연에 갔는데 객관적으로 그리 훌륭한 연주가 아니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끝나고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호구라서 엉터리 연주에 박수를 쳐주었을까요?
아닐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만스러운 연주였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측면에서 만족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후진 연주고 노래지만, 그 노래 연주에도 감동받아서 진심으로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은 연주의 수준을 문제 삼기에 앞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일 겁니다.
눈치보지 말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라고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을 호구라고 말한다면...
좀 그렇죠.
물론 남 눈치 보다가 남이 치니까 따라서 치는 사람도 있겠죠.
해당 장르나 음악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입문자이거나 아니면 친구나 연인 손에 따라온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공연장에 시험봐서 일정 점수 취득해야 입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열려진 공연장인데
입문자나 경험이 없거나 소양이 전혀 없는 사람을 차단한다면 되겠습니까?
대한민국이 무슨 공산주의 국가 입니까? 누구나 입문자였던 시절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호구라고 취급해버리면 앞으로 누가 공연장 오려고 하겠습니까?
돈주고 입장하는 프로페셔널한 공연에서 사람들의 99%가 아무 생각 없이 박수치는 것으로 보인다면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서 찾는 것이 순서일 겁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모든 프로페셔널한 공연은 곡에 대한 정보, 연주자와 연주 단체에 대한 정보,
최근 연주에 대한 평반, 공연장 분위기까지 인터넷을 통해서 어지간히 알 수 있습니다.
일부러 낮은 수준의 공연만 골라서 찾아다니지 않는 이상,
사람들의 99%가 아무 생각 없이 박수치는 것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혹시 공연장 이름만 보고 무턱대고 공연을 찾는 다면 모를까, 이런 경우가 진짜 호구죠.
아시다시피 유명한 공연장이라고 해도 자체 상설 연주 단체나 연주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은
기획 공연보다는 대관의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대관 공연으로 따지면 예술의 전당에서도 학예회 수준의 공연이 없지 않습니다.
공연장을 많이 다녀보신 분이라면 공연이 단순히 연주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공연은 연주자의 당일 컨디션은 물론이고 당일의 날씨, 분위기, 관객의 교감까지도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섬세한 연주자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학교 졸업생처럼 연주하거나,
일류 오케스트라가 무명의 오케스트라처럼 연주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부분 오차범위 내에서의 연주력을 유지합니다.
간혹 세계 일류 연주자나 오케스트라가 아시아 순방할 때는 대충 연주할 거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신데,
그건 일면 타당하지만 사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건 연주해보시는 분이라면 압니다. 대중 가수들의 공연은 그럴 수 있겠지만
예를 들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치던지,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하든지,
관객의 수준이 낮으니까, 이 부분은 대충 쉽게 가자, 이런 경우는 불가능합니다.
베토벤 곡 자체가 그렇게 어느 한 부분에서 쉽게 가자고 갈 수 있는 곡이 아닙니다.
그랬다간 전체의 밸런스가 무너져서 부분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엉터리 연주가 될 것입니다.
혼자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파트와 소리를 맞춰야 하는 오케스트라의 경우는 더욱 더 그렇겠죠.
물론 유럽의 중요한 무대에서와 같은 높은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겠지요.
또 멤버들의 교체가 있던지.
그러나 그런 긴장감과 멤버 교체는 여러 요소와 환경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지,
단순히 연주가의 마음가짐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상 투어가 어렵다거나 실력 있는 백업 멤버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경우에는
최상의 멤버와는 다른 구성으로 연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충 연주해도 좋으니 실력도 안되는 멤버들로 자리를 채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오케스트라의 도덕성 문제입니다.
건설적인 비판이 되려면 한도를 지켜야 합니다.
신용카드에 한도가 있는 것처럼 비판이든지, 비난이든지 한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피아니스트가 후진 공연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비판이든지, 비난이든지 ‘그 공연’에 한해서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날 공연을 넘어서 피아니스트를 3류 연주가로 매도해버리면
한도를 벗어난 비난이 되는 겁니다.
공연장에서 연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평가를 솔직하게 표현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위해서 공연장 사람의 99%를 호구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디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품에 대해서, 혹은 브랜드의 마케팅 정책에 대해서 얼마든지 비난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제품을 만든 사람을 사기꾼으로 매도하거나
그 제품 사용자를 호구라고 놀려 먹는다면 그건 한도를 넘어서는 겁니다.
더불어 예의와 상식에서도 함께 벗어나게 되죠.
한 두번 한도를 벗어난다면 실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한도를 벗어난다면 그건 의도일 것이고, 결국 파산에 이르는 길입니다.
아무리 냉정하고 사심 없고 객관적인 비판도 비판 받는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도는 꼭 지켜줘야 합니다.
서구의 비평가, 평론가라고 다 이런 한도를 지키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비평가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지키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비평가라고 다 같은 수준이 아닌 것이죠.
우리가 뭘 꼭 모범 삼아서 따라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높은 수준의 비평을 지향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하다는 것도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 내가 느끼는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는 것도 솔직한 것입니다만,
이것이 전제하는 더 큰 솔직함이 있습니다.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종과 자유를 구별하기 위해서 책임이 전제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표현의 솔직함의 전제는 내 표현과 감정과 직면하는 다른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
저 사람이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사람이 절대로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말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과 사고를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투영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감정과 사고를 내가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예절, 예의는 이런 솔직한 인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생각이나 원리, 감정에 나래비로 줄세울 수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전제를 솔직하게 인정하면
내가 표현하는 솔직함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수 있습니다.
오디오 평론이나 사용기에만 뽐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사고, 윤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분야든지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심사숙고해서 이면을 파악하고,
뒤집어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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