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실용론”과 관련한 논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가만히 살펴보면 끝없는 실용론 논쟁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력기관으로서의 “귀”가 계측기와 대응될 수 있다면, 청력은 계측기의 능력과 대응될 수 있겠습니다. 오디오는 전원, 소스, 소스기기, 앰프, 스피커 및 각종 케이블이 상호작용을 하여 완성된 “시스템”으로서 음향을 조성하는 장비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나열한 시스템 구성의 여러 요소들이 시스템의 음향 조성 시 독립적으로는 얼마만큼 음향에 영향을 미치는 지도 하나하나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앰프와 관련한 실용론의 입장은 앰프라는 시스템의 한 요소가 전체 시스템이 조성하는 음향의 차이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여러 논쟁을 살펴보면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음악은 귀로 듣는다”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이 표현을 잘 살펴보면 실용론 논쟁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스템으로서의 오디오 장비가 “음향”을 조성하면 청각기관은 이 음향을 수용하여 신경을 통해 뇌로 음향정보를 보낼 것입니다. 이러한 음향정보에 개개인의 미감 혹은 미적 가치 판단이 작용하면 수많은 정보 중에서 옥석을 가려낼 것입니다. 어떠한 음향이 소음인지 음악인지 구별하는 것은 이러한 주관적인 미감에 의한 것이지 청력기관으로서의 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음향정보의 수용이라는 영역에서는 귀(청각기관)와 계측기(계측기의 능력)의 비교 및 대조는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음향정보를 음악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나아가 어떠한 종류의 음향정보가 더 음악“적”이냐는 문제에서는 미감(an esthetic sense,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이라는 주관의 영역에서 개개인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앰프와 관련한 실용론의 주장은 앰프가 전체 시스템이 조성하는 음향에 미치는 영향이 인간에게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원, 소스, 소스기기, 앰프, 스피커, 각종 케이블, 진동과 흡음 및 난반사 대책 등이 하나의 오디오 시스템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며 한편으로는 전체 시스템의 음향정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라고 봤을 때 상기의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표현과 관련한 두 가지 문제제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앰프의 차이로 인한 전체 시스템의 음향정보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전제했을 때, 이 차이를 인간의 청력(단순 인지와 그 이후의 미적 가치 판단 과정의 바로 직전에 존재할 수 있는 순수한 정보 전달 체계)으로 잡아낼 수 있는지의 문제에서, 실용론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가 첫 번째 문제제기입니다. 실용론 주장의 진위여부는 과학이 발달하면 밝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밝혀졌을 수도 있겠네요. 저는 그 방면에 문외한이므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실용론 논쟁의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기의 “청력”이라는 프로세스 이후, 앰프의 차이로 인한 음향정보의 차이를 두고 인지 및 미적 가치 판단의 프로세스가 그 차이를 유의미한 것으로 수용하는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프로세스 상에서 그 음향정보의 차이가 유의미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된다는 것이 바로 실용론의 주장인지가 바로 두 번째 문제제기입니다. 인지 및 미적 가치 판단 중, 인지의 영역에 한정한다면 실용론의 주장은 인지과학을 통해서 진위여부가 가려질 것입니다. 이 분야 역시 문외한인 저로서는 그 정답을 모르겠으며 또한 인지과학이라는 분야가 얼마만큼의 신뢰성을 가지고 있는 지도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실용론의 주장이 인지영역까지에 국한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정된 실용론에 대한 반론은 인지과학의 전문적 입장에서의 과학적 반증이거나 인지과학이라는 분야 자체에 대한 불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실용론 논쟁은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영역으로까지 번지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미적 가치 판단의 영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미적 가치 판단 혹은 미감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실용론이라면 주관의 영역에 대한 일반론이 됩니다. 앰프의 차이에 의한 음향정보의 차이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인지되지만 미감의 영역에서는 정보의 차이에 기인한 인지의 차이가 무시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형이상학적 주장이 되므로 과학적 진위 판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실용론이라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논쟁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실용론 논쟁에서 “음악은 귀로 듣는다”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처음에 말했습니다.
감성, 가슴, 마음 등의 용어는 미감과 더불어, 그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그 실재는 믿어마지않는 “정신성”이라는 것의 서로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화가는 붓에, 작가는 펜에, 무용가는 온몸에 그러한 정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듯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귀에 그것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음악은 귀로 듣는다”는 표현을 하겠지요. 실용론의 앰프 관련 주장에 대한 상기의 분석을 통해, 논쟁의 단초는 용어 및 개념의 혼란으로 인해 빚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음향정보는 귀(청각기관)로 받아들이지만 음향에 음악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어떤 음향이 더 음악적인지를 가리는 것은 귀가 아닌 미감(주관)이라는 정신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음향 정보의 전달문제인지 음향 정보의 인지문제인지 그 인지에 대한 미감의 문제인지를 따져보고 논의가 진행된다면 소모적이거나 감정적인 논쟁으로 인하여 음악을 사랑하는 회원님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상의 장문을 올렸습니다. 베토벤은 청력이 손상되었어도 대작을 남겼고 선천적이거나 후천적 요인에 의한 인지 능력의 감퇴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게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예는 여러분 주위나 여러분 자신에게서 볼 수 있듯 흔한 것입니다. 누가 더 우월한 신경계나 인지능력을 소유했는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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