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우가 역적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7월 9일 양력 1번째기사 1896년 대한 건양(建陽) 1년
정성우가 역적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다
국역원문.원본 보기
진사(進士) 정성우(鄭惺愚)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강 오륜(三綱五倫)은 우주(宇宙)의 동량(棟樑)이고 생민(生民)의 주석(柱石)으로 사람에게 이것이 없으면 몸에 옷을 걸치고 있어도 짐승과 같고 국가에 이것이 없으면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도 도깨비나 물여우와 다름없습니다. 대체로 천하 국가의 신하된 사람치고 정말 나라를 위하는 사람의 정성이 있다면 어찌 짐승이나 도깨비로 되겠습니까?
아! 이른바 개화(開化)하였다는 무리들은 외국으로 나다니다가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환형(幻形)을 기이하게 여기고 다른 나라 말을 능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말에 의탁하고 속으로는 불량한 마음을 품고는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럼 얽혀 외국 사람들과 결탁하도록 선동하고 만고에 없던 변고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고금(古今)의 역사에 어찌 이런 역적이 있으며 천하만국에 어찌 이런 변고가 있겠습니까?
지금 역적 무리들이 더러는 도망쳐버려 잡지 못하고 더러는 죽어서 형벌을 집행하지 못했으며 더러는 살아있는데도 처단하지 않고 더러는 관리로 있으면서 정사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수백 년간의 법이 어찌 하루아침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난신 역당(亂臣逆黨)들에게 이르러 아예 없어진단 말입니까? 이 역적들은 단지 폐하의 역적일 뿐 아니라 선왕들의 큰 역적인데 폐하는 어찌 호생지덕(好生之德)때문에 지금 다스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둡니까?
아! 애통합니다. 갑신년(1884) 10월에 그물에서 새어나간 역당(逆黨)이 바다 건너 외국에 종적을 감추었다가 갑오년(1894) 6월의 변란을 만들어 냈으며 갑오년 6월의 역적들은 을미년(1895) 8월의 큰 반역 음모를 빚어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후한 반역 음모를 다 소탕하지 못하면 반드시 국가의 화근(禍根)이 되는 것이니 어찌 피를 뿌리며 통분해하고 안타까워하지 않겠습니까?
흉악한 무리
●서재필(徐載弼)은 만고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는데 제멋대로 본국으로 돌아와서 어찌 감히 밝은 해를 이고 살면서 국병(國柄)을 희롱한단 말입니까? 또 더구나 폐하의 앞에서 스스로 외국의 신하라고 하였는데 그가 만일 외국의 신하라면 어째서 조선의 국사(國事)에 관계합니까? 그의 이른바
●‘독립신문(獨立新聞)’이라는 것은 비방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의리를 전혀 무시하고 있으니 이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고 백성들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선왕의 법제를 고치고 순전히 본국을 경복(傾覆)하려는 것이니 이와 같은 흉역(凶逆)을 어떻게 하늘땅 사이에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갑오년 6월의 간사한 무리인 김가진(金嘉鎭) 안경수(安?壽) 등은 앞장서서 나라를 병들게 하여 나라를 고칠 수 없게 만들었고 박정양(朴定陽), 조병직(趙秉稷)은 벼슬을 탐내어 의리를 무시했는데 의리가 없어지자 난이 일어났으며 이윤용(李允用)은 공로와 죄가 겸전(兼全)하니 일문(一門)이 벼슬을 탐하였습니다. 이런 간사한 무리들이 권한이 있는 벼슬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외부의 동태와 대궐 안의 실정을 응당 모두 살폈을 것이며 결국 그날의 흉화(凶禍)가 있었습니다. 그 행동거지를 따져보면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려운 자들입니다.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등은 반역 음모의 와주(窩主)라는 것이 이미 외국 공보(外國公報)에 나왔으니 본국(本國)으로서 의리상 어찌 성토하지 않겠습니까?
●을미년 8월의 큰 역적인
김홍집(金弘集),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권영진(權濚鎭), 이두황(李斗璜), 우범선(禹範善), 이범래(李範來), 이진호(李軫鎬), 장박(張博) 등은 먼저 간당(奸黨)이 되었다가 후에 역당(逆黨)이 되었는데 그 음흉한 모의와 간사한 계(計)는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보다 심하고 이괄(李适)과 신치운(申致雲)보다 심합니다.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으로 말하면 성토하지 않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강경한 결단을 내리소서.
흉도(凶徒) ●서재필은 더욱 그대로 둘 수 없는 자입니다. 이제 만약 인순(因循)하여 내버려두면 다른 날 갑신년과 같은 짓을 다시 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사전(赦典)을 환수하고 빨리 방형(邦刑)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갑오년의 간당에 대해서도 방형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을미년의 큰 역적들 가운데서 죽은 자는 부관 정형(剖棺正刑)하고 도망친 자는 잡아다 정형을 처하며 살아있는 자에게는 빨리 방형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자신만 처단해서는 안 되고 연좌(連坐)의 율(律)을 모두 적용함으로써 국가 양호(國家養虎)의 우환을 막고 신민(臣民)의 뼈에 사무치는 원통함을 풀어줄 것입니다. 이렇게 다 다스린 후에야 화란(禍亂)의 싹이 감히 다시 움트지 못하리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폐하는 누구를 꺼려서 오랜 동안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제 난을 그치게 하고 태평한 정사를 하려면 김홍집과 유길준이 추천한 여러 관리들, 즉 대역(大逆)이 천인(薦引)한 자들을 내외의 관질(官秩)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대관 이하로 일제히 소제하여야 국강(國綱)을 숙청(肅淸)할 것입니다. 흉도들이 정한 신식 관제와 품계(品階) 등 제반 규정으로서 갑오년 6월 21일 이후 것은 모두 시행하지 말고 빨리 선조(先朝)의 구제(舊制)를 회복하며 여러 고을과 지방에 군사를 빨리 두어 8역(域)의 소동을 안정시키며 내외의 병권(兵權)을 폐하가 총찰(總察)하소서.
대체로 제왕(帝王)의 어좌(御座)는 비유컨대 북극성과 같아서 거처를 함부로 옮길 수 없습니다. 즉시 대궐로 돌아옴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신하와 백성들이 애타게 바라는 소원을 풀어주며 인봉(因封)을 빨리 지냄으로써 왕태자 전하의 애통해하는 효성을 위로하소서.
그리고 성균관(成均館)은 양현(養賢)과 수선(首善)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500년 동안 제사지내던 곳이 일조(一朝)에 기예(技藝)의 장이 되었으니 성인(聖人)을 존중히 하는 도리가 이로부터 없어지고 유교를 내세우는 기풍이 이로부터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 폐단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는다면 옛 성인들과 선왕의 유훈(遺訓)이 지금 와서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체로 치국(治國)의 방도는 오직 인재를 얻는 데 있습니다. 이제 조정을 바로잡고 만민을 다스리려면 어찌 그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하로부터 문관과 무관,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각별히 택하여 등용하여 온 조정에 벌여 세움으로써 좌우를 보필하게 하고 3군(軍) 안에 각각 임명함으로써 안팎을 지킬 수 있게 하며 날마다 함께 나랏일을 강구하여 밝힘으로써 위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보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논박하는 글에 어째서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많은가?"
하였다.
【원본】 38책 34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2책 591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정론(政論) / 사법-재판(裁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