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동호회의 회원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38년을 애지중지하던 외아들을 잃었다.
늦게나마 소식을 접했지만, 외진 가슴이 무겁다.
어느 날 밤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반쪽이 된 핼쑥한 모습을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위로의 안부가 오히려 무색하다.
"힘들더라도 몸 잘 추스르세요." 그게 전부다.
느지막에 자식을 가슴에 묻고 말았다.
그 시간이 남은 날보다 더 길어질지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유비무환처럼 쓸 수는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운명이란 단어를 자주 쓴다.
부디 잘 추슬러서 다시 만나기를 빈다.
불알친구, 소꿉친구, 학교 친구, 직장 친구, 술친구 등,
살면서 우리는 많은 친구를 만나고 거친다.
늘그막에는 모두 친구 타령만 한다.
이 "친구 타령"에는 남·여의 구분이 없다.
그들의 말인즉, 남편(아내)도, 자식도 다 남이라고 한다.
오직 친구만이 인생의 동반자라고 혀가 닮도록 설파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수백 통의 소셜 미디어를 소화하고 있다.
나도 하루에 적어도 수십 통은 받는다.
소외된 늙은 분노를 아직 놓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동화하지 못하는 내가 더 이상하다.
가족의 해체가 가져온 폐해이다.
몇 해 전만 해도 가장은 자식의 거울이라고
윤리 강령처럼 SNS에 떠들던 사람들도 많았다.
해체된 가족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터진 봇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전철을 타 보면 내가 소외된 늙은이란 걸 실감한다.
모두 휴대전화를 열고 무슨 보물찾기라도 하듯 들여다본다.
필사적으로 자신에 집중하는 그 표정들이 바로 나의 소셜 미디어이다.
그 많은 정보 속에서 취사선택은 매우 어렵다.
갑자기 휴대전화가 없어지면 저들은 아마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사는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재난과 더위 그리고 추위 등, 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이기는 영화가 아닌 이상 거꾸로 가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