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ok.history.go.kr/id/kwa_12108017_001
황후(皇后)의 시호를 책봉한 조서(詔書)를 인정전(仁政殿)에서 받은 다음, 로써 교문을 반포하고 대사면령을 반포하였는데, 고부사(告訃使)가 돌아오는 편에 보냈었다. 그 조서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調)하노라. 짐이 생각건대 천도(天道)가 교화를 편 것은 땅의 두터운 공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지도(地道)는 아름다운 덕을 간직하여 유순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지난날 그 모습을 회상하니 시호를 내릴 만하고, 후손에게 복을 내리니 포상이 훌륭하였다. 황후 유호록씨(?祜祿氏)는 훈족(勳族)으로 태어나 명사(名師)에게 교육을 받았다.
훌륭한 가문(家門)에서 빈궁(嬪宮)으로 들어와 중궁(中宮)의 영망(令望)을 열었고, 내외간의 정리가 합하여 왕실의 후사(後嗣)를 이었다. 그리고 황고(皇考)인 인종 예황제(仁宗睿皇帝)와 황비(皇?)인 효숙 예황후(孝淑睿皇后)를 섬길 때는 정성과 공경을 밤낮으로 다하였고, 공순하고 부지런한 예절은 궁정에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로 성모(聖母) 공자 황태후(恭慈皇太后)를 받들 때도 옥체를 잘 봉양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으며, 공손히 뜻을 받들어 얼굴빛을 화순하게 하였다. 초방(椒房)에 경사가 넘쳐 문안과 시선(視膳)의 예절을 돕고, 자손이 빛나 여름철과 겨울철에 시원하고 따뜻하게 하는 직분을 다하였다. 성품은 본래 너그럽고 인자하였으며, 공손하고 검소한 것에 힘을 써 몸을 복되게 하였다. 를 항상 놓아두고 친히 의복을 빨았으며, 제수(祭需)도 신중히 마련하여 제사를 엄숙히 받들었다. 그 부도는 가정에 나타나고, 그 은덕은 아랫사람을 후하게 하였다. 깊은 궁중(宮中)에서 정사에 협찬(協贊)함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고, 후사(後嗣)가 태어나 장성하도록 존호를 받지 않았다.
그후 황후가 승하하여, 벌써 1년이 되었다. 이렇게 국운이 새로운 때에, 곤전(坤殿)의 모습을 생각하니 생존해 있는 듯하다. 화기로운 정사를 하기 위해 궁중의 정위(正位)를 높이 추숭하고, 아름다운 그 덕이 부합하여 비전(?殿)의 높은 칭호를 준 것이다. 그 이름을 높여 시호를 정하는 것은 본래 짐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며, 덕을 높이고 그윽함을 천명한 것은 참으로 그 여정(輿情)을 함께 따른 것이다. 하물며 자성(慈聖)의 도움에 감사하였고, 삼가 의훈(懿訓)을 받들어 어린이를 구함이겠는가? 거듭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헌전(憲典)을 자세히 상고하여 태묘(太廟)에 고하고 도광(道光) 원년 6월 13일 시호를 책봉하여 효목 황후(孝穆皇后)로 삼는다. 아! 만국(萬國)에 국모의 의절로 받든 것은 모두 전일의 미행(美行)이 천양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 곤범(?範)이 천추에 전하여 많은 복을 누리리로다. 이 사실을 천하에 반포하여 모두 들어 알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