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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싸다 장터에서 만난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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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3 16:5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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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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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싸다 장터에서 만난 스님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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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진 [가입일자 : 2000-11-07]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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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십년은 넘었지 싶은데요.
그맘때쯤에 제가 혼 스피커에 꽂혀가지고 죽어도 클립쉬를 들어보고 싶었더랬습니다. 집이 좁은데다가 돈도 별로 없어서 언감생심 클립쉬혼은 생각도 못하고 한참을 장터를 기웃거린 끝에 겨우 라스칼라를 들였었지요.
그때만 해도 전국 어디든 먼가 들어보고 싶은게 있거나 찾던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달려가던 시절이어서 이 라스칼라도 지인에게 스타렉스 까지 빌려가며 양평 어딘가에서 업어왔었드랬습니다.
경험해보신 분들을 아시겠지만, 빈티지 궤짝 스피커들이 덩치도 한덩치 하지만 무겁기도 오지게 무겁습니다. 잡을데도 마땅치 않은 커다란 사각 뒤주 상자를 낑낑대며 후배랑 둘이서 겨우 옮겨서 좁은 거실에 집어넣었는데, 머 다들 이해하시다 시피 원하던 물건을 찾아서 집어다 놓는 기쁨이라는게... ^^
이 앰프 저앰프 연결해보고 나름 튜닝아닌 튜닝해가며 뽑아낸 김광석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근데 사람맘이 참 간사한게 그리 간절하게 구해서 앰프바꾸고 선바꾸고 온갖공을 들여서 한 몇달 감탄해가며 들어놓고선 어느 멀쩡한 일요일 오후에 문득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저역이 좀 부족하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던데 역시 허전한가...?"
한번 "허전한가" 하고 나면 이게 무슨 질병처럼 온몸에 퍼져서 그 다음 부턴 공명정대하게 들리지 않는 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
이제 병이 나버린 마음이 "이걸 어떡하나 팔아야 하나..." 하고 갈등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마침 하게인지 장터인지에서 라스칼라를 구한다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나 해보자 싶어서 쪽지를 보냈는데 몇차례 쪽지가 오가다 보니 어느새 제가
"한번 들으러 오시죠, 혹시 알겠습니까 임자이시면 가져가게 되실지도요..." 하는 쪽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주소를 주고받다 보니 오시겠다고 하시는 분이 무려 전북 정읍에 계시더라고요. 저는 용인에 살고 있으니 꽤나 거리가 있는 편이죠. 그런데도 오시겠다고 하셔서 주말에 약속을 잡았습니다.
토요일 저녁때가 되어서야 도착을 하셨다고 해서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가보니 회색 스타렉스에서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 한분이 내리셨습니다. 설마 하고 다시 보는데 스타렉스 옆구리에 내장산 00사라고 떡하니 적혀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뜻밖의 일이라서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스님이시라고 해서 음악을 못들으실 것은 아니니 또 목소리가 기가막히게 나는 라스칼라니까 혹시 불경을 들으신다고 해도 생생하게 잘 들리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집으로 모셨습니다.
김광석도 틀어보고 다른 보컬곡들도 틀어보고 한 십여분 아무말 없이 음악을 들었습니다.
긴 침묵끝에 스님께서
"이 가격에 이런 소리 듣기 힘들겠지요? 허허"
그래서 제가 "더 좋은것이 없기야 하겠습니까만, 꽤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하고 답하면서 맘에 드시는가보다 그러면 오늘 업어가시겠구나 싶었습니다. 근데 또 한참을 더 들으시더니 굵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런데... 제가 이렇게 먼길을 와가지고.. 혹시 차비정도는 생각을 해주실수 있으실지요..."
아마도 제가 여태 거래하면서 들어본 가장 점잖은 네고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아직도 생각합니다. ^^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실줄 생각도 못해서 살짝 당황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이상한 인플레이션으로 라스칼라가 200만원도 훌쩍 넘어거래가 되지만 당시는 150~160 정도 였었는데 제가 150에 내놨으니 사실 그리 나쁜가격이 아니었지만 먼길 오신 스님 생각해서 흔쾌히 10만원 깎아 드렸습니다.
둘이 또 낑낑대며 어렵사리 스타렉스에 스피커를 싣고 너무 기쁜 표정으로 합장하고 떠나시던 스님 표정이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불경을 들으시던 재즈를 들으시던 취미의 영역은 종교도 초월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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