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딸이 둘에 막둥이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뭐 애초부터 3명을 계획한건 아닌데
어찌 하다보니 3명을 낳아버렸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
마누라는 애가 또 생겼다고 안절부절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생긴걸 어떻할거야? 그냥 낳아"라고 했더니
"또 딸 낳으면 어떻게 해? 글고 요즘 애 셋이나 낳는 집도 없잖아!"라고 하면서
굳이 애를 지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사실 저도 애를 셋이나 키우는 것이 내심 부담도 되었기 때문에
"잘 생각해서 판단해. 그래도 생명인데 그리 쉽게 결정하면 안돼"라고
걱정 만 아쉬움 반이 섞인 당부를 하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퇴근해 보니 "후다닥 여사"라는 별명답게
모든 일을 후딱후딱 해치우는 마누라는
기어코 "낙태"를 위한 결심을 하고 동네 산부인과에 예약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당시에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애매모호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을뿐이었기 때문에
다음 날도 "뭐 우짤 수 없지....."라는 생각만 남긴 채 출근을 하고 말았습니다.
저녁에 퇴근을 해서 "병원에 갔다 왔어?"라고 물어보니
마누라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밥상만 차려주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사실 여자가 아이를 지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일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자기 뱃속에 생긴 자식을 지워야 한다는 상실감과
신체적 데미지는 물론 그 아이가 아들일지 딸일지도 모르고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저런 온갖 생각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루~룩 처먹고 있는 와중에 장모님한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장모님은 다짜고짜 "자네 겨우 자식 둘 낳고 말 것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아니...어머니 저는 낳으라고 했는데....요"라는 말이 끝나자 마자
"시꺼~! 남자가 얼마나 션찮으면 우리 OO이가 애를 떼려고 했겠나?"
"우리 같이 어려운 시절에도 대여섯명은 기본으로 낳고 키웠는디
요시(요새)같이 좋은 시상에 세명도 못낳는다는 것은 순전히 자네가 부실한 것 때문 아녀?"
"아니....어머니 저는 그냥 낳으라....고..."
"시끄러~! 내가 OO(처제)에게 전부 다 들었는디 자네가 돈벌이가 션찮으니 그런 것 아녀!"
"글고 사람은 시상에 나오면 다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나온다고 했는디
뭐가 겁나서 애를 지울라고 했능가? 자네 그렇게 능력이 없는가?"
"아니...그게 아니라...."
"시끄러~! 내가 올해부터 셋째 먹을 것은 전부 책임질 것잉게 다시는 그딴짓 하지 말어"
"아...네....알겠습니다. 어머니 걱정 마셔요. 제가 알아서 잘 키울게요"
이후 약 30분이 넘도록 온갖 압력과 타이름과 운명론을 섞은 장모님의 잔소리를 더 들어야 했는데
국 그릇에 반쯤 남은 국밥은 이미 팅팅 불고 식어버려 더 이상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쓴 마누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산부인과에 갈 동안 5살, 2살 딸내미를 봐주러 처제가 들렀는데
마누라가 씻는 사이
"옴마 은니가 오늘 애 떼러 간대요"라고 꼬질러 바친 것이었습니다.
장모님은 처제의 얘기를 듣자마자
"이런 오살년, 호랭이가 물어갈년....아이고 내가 못살아~!"라고 하시면서
"네 언니 바꿔~~어!"라고 전화통이 깨지도록 고함을 지르셨다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던 마누라는
전화를 받자마자,
"너 이년! 너 앞으로 내 집구석에 다시는 오지도 말고 내 제삿날에도 얼씬도 하지 말거라!"
라는 기차 화통 삶아드신 호통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껕보리 서말밖에 없었어도 새끼를 5명이나 낳고 키웠는디
겨우 2명 낳고 애를 지워? 너 같은 년은 딸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니
네 아버지랑 내가 죽어도 집에 얼씬도 하지마라~!"라고 무려 2시간이나
공대지, 지대공, 곡사포, 따발총 등으로 폭격을 퍼부어대신 것입니다.
결국 마누라는 "낙태"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막둥이 아들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허구헌날 노심초사에 조바심으로 점철된 나날을 살았습니다.
당시는 워낙 남아 선호사항이 강하여
산부인과에서 성별을 절대 알려주지도 않았고
만일 성별을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면 의사가 처벌을 받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까지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마누라는 허구헌날 "또 딸이면 으떻게 해?"라는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자기 어젯밤에 잘 익은 복숭아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또 딸 같애...어떻허지?"
"내가 요즘 뭐가 자꾸 뭘 먹고 싶은데 딸을 임신하면 그렇다네?...아무래도 또 딸인가봐.....!
"아들이면 뱃속에서 축구를 한다는데 얘는 너무 얌전해....딸이라 그렇겠지?"
"하이고~오! 자기 닮은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딸 셋을 어떻게 키워야 하지?"
"어떤 여자가 딸 셋을 데리고 다니는데 영 보기가 싫더라고....나도 그렇게 되겠지?"
......!
좌우지단간 그렇게 온갖 노심초사에 범벅이 된 채
1992년 3월 새벽 4시에 우리 막둥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2시간 후인 6시경
"축하디려요. 아드님이에요"라는 간호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마누라가 간호사를 재촉하여 연락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 간호사에게 들어보니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2시간이 넘도록 마누라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그냥 담담했습니다.
다만 "구색은 대충 맞췄군"이라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의연함(?)에 더해
이기적인 남아 선호사상에 매몰된 사람은 아니라는
자기 변명에 자기 합리화가 모두 뒤섞여진 이기심(?)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저렇게 딸 둘에 아들 하나를 키웠는데
큰 딸은 치열하고 지독하면서도 약간 이기적이고
작은 딸은 한없이 귀여우면서도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마누라의 온갖 노심초사와 조바심에 범벅된 태교를 받고 태어난 아들녀석은
드센 누나들 때문인지 임신 때의 영향 때문인지
말수도 적고 욕심도 없고 최소한의 이기심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無心先生"이라는 별호를 달아줬을까요!
그것도 초등학교 때 붙여준 별호입니다.
그런데 연기도 내지 않고 불을 때듯이
나름대로 뭔가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을 해서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28살 때 25평 아파트를 분양받더니
작년 2월에 벌써 입주를 해서 서른살에 유주택자가 되었습니다.
저와 마누라는 "너 무슨 돈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았냐?"라고 물으니
"그냥 했어요"라는 것이 대답의 전부입니다.
사실 대학 졸업하고 군대 다녀온 시간이 있기 때문에
거의 6억원에 가까운 돈을 어떻게 마련했을 것인가?라는
우려반 걱정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지고 똑똑한 큰딸이 진두지휘하고
군대 월급마저 알뜰하게 저축한 돈과
직장 월급을 저축한 것에 더하여 대출까지
꼼꼼하게 플랜을 짰더군요.
물론 저 역시 최종적으로 얼마간의 자금을 지원하긴 했지만
"무심선생도 다 생각이 있었구나"생각에 참 대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 설에도 자식 세명이 모두 왔습니다.
큰 딸과 작은 딸은 시댁은 먼저 들러 인사하고
설 전날 오후 늦게 바리바리 선물들을 싸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쐬주에 맥주에 밤을 거진 세우다 시피하고
설날 5시경 모두 자기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제나 처럼 손주들 세배 받고 세배돈도 주고
자식들 세배 받고 용돈 받고.......
저 역시 그렇게 수백, 수천년 흘러온 전통을 이어나갔습니다.
자식들 모두 돌아간 후
받은 봉투를 열어봤습니다.
마누라와 제가 받은 봉투에 각기 100만원씩 들어있더군요.
그 돈을 확인한 순간 머리빡이 재빨이 회전되었습니다.
"저기에 20만원만 더 보태서 장홍락 개조버전 인켈 1311, 1312 1세트 주문....."
그러나 그 잔머리는 한낱 "한 겨울 밤의 꿈"이었습니다.
마누라가 잽싸게 봉투를 뺏어가더니
50만원은 강탈하고 50만원만 제게 하사하셨습니다.
"됐제?"
"뭐를?"
"50이믄 신발하구 봄 코트 살 수 있잖아?"
"근데 나한테 준 용돈을 왜 당신이 뺏아가는겨?"
"글고 나는 50이구 당신은 150이믄 너무 불공평한 것 아녀?"
마누라 옆눈으로 째려 보더니,
"됐시요. 그 돈이면 충분하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마 응?"
근데 문제는 이같은 용돈 강탈이 이번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추석과 설날도 그랬고
김장 때 "자네 기름값이나 하게"라고 장모님이 주신 30만원도
마누라 지갑에 들어간 뒤로 지금까지 나올 기색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내참 서러워서....ㅠㅠㅠ"
사실 우리 마누라는 손이 큽니다.
게다가 "후다닥 여사"라는 별호답게 한번 결정하면 0.1초만에 실행을 해버립니다.
제가 "어~~!" 하는 시간에 이미 모든 결정이 끝나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명절 때나 친인척 생일 등에 모든 선물도 전부 도맡아 강제 배송합니다.
제가 하려고 해도 "남자는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니까"라는 자의적 판단에 더하여
"남자가 그런 것 신경쓰면 불알 떨어진다"라는
조선시대 남존여비적 이념(?)에서 여전히 정차중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튼 간에.....
올 설명절도 무적의 애교로 무장한 손주들과
자식들의 효도를 만끽하고 그냥저냥 무사무난하게 지나갔습니다.
마누라는 여느집 친정엄마 같이 이것저것 반찬과 선물들 꾸러미를 안겨주고
손주들 껴안고 얼굴 부비고 수십군에 뽀뽀 자국을 찍어주고서 말입니다.
또한 "어이구 내새끼, 내 보물들" 등등의 애정폭탄을 쏟아 붓는 것 역시
옛날 우리가 겪었던 할머니의 애정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을만큼 똑같았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모습이라는 생각과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네들 가족들의 끈끈한 애정과 핏줄의식.
누가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애정표현들.
제 자식들과 손주들이
똑같이 자기 자식과 손주들한테 그러한 애정 전통을 이어나갈지 알 수 없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DNA적 사랑과 애정은 그대로 이어져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설날 오후,
먹고 남은 음식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93.1을 들으면서 소소한 설날의 풍경을 주절거려 봤습니다.
회원 여러분들도 올 한해 건강하시고
하루하루 복된 시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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