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 년 전 아버님을 보내드리고 이번엔 2 주 전에 형님을 보내드렸습니다.
내가 아버지앞에 자랑스런 아들이며,
형앞에서 형 반만큼이라도 잘난놈이라며 으시대고싶었는데,
그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말이죠.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님께선 자식을 앞세웠다고 몸져누우셨는데,
세월은 야속하게도 어김없이 흘러 명절이 다가옵니다.
방송에선 코로나확산으로 고향찾아가기를 자제하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저의 두 아이는,
회사에서 만류했다며 오지않고 집에서 조용히 보내겠답니다.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이니 이해못할바도 아니라 그저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나 구순을 바라보는 모친이나 존재감없이 사는 저는 무엇을 더 바라겠나싶어,
갈비탕 한그릇을 포장하여 모친을 찾아뵈러 갔습니다.
기운없는 손으로 갈비탕 반그릇을 다 비우시고,
그래도 자식이 왔다고 감이며 사과를 주섬주섬 담고,
게다가 경로당에서 갇고왔다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말랑말랑한 가래떡까지 챙겨주시는데,
가래떡하면 제겐 참 잊혀지지않는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1979년 돈없고 춥고 배고프고 꿈만 잔뜩 하던 시절..
당시 가난한 젊은 학도에게 배부르고 술안주까지 해결되었던 음식이,
바로 세운상가와 청계천 사이에 있는 고가도로아래 포장마차에서 팔던,
가래떡으로 만든 왕떡볶이 한접시와 쿨렁쿨렁한 비닐병에 담겨있던 막걸리 한 병이었죠.
이 왕떡볶이 한접시와 막걸리 한사발이 얼마나 맛있었는가하면,
서울을 떠나 살면서도 서울갈일이 생기면 꼭 그 곳을 다시 찾아가 맛 볼 정도로,
제게는 잊지 못할 중독성과 추억이 깃든 맛입니다.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받아들고 집에 도착하니,
문득 그 아스라한 옛기억이 떠올라 추억을 한번 소환해보기로 합니다.
냉장고 한구석에 외로이 방치되어있던 당근이며 양파 청양고추 느타리버섯 등 등
그리고 모친이 주신 홍시를 이렇게 숟가락으로 파내어 떡볶이 양념으로 사용하여,
이렇게저렇게 만들어낸 음식이 바로 이렇습니다.
떡볶이양념으로 홍시를 넣는것은 원래 제 생각이 아니라,
언젠가 TV프로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자연인이 떡볶이에 홍시를 넣었는데,
'맛이 신의 한 수다' 하여 처음 시도해본건데,
흠.. 비쥬얼에 비해 맛이, '신의 한 수다' 까지는 아니래도
그래도 아마추어가 만든 솜씨치고는 상당히 괜찮습니다.
굵고 짧게 살다가신 나의 형님..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으나, 이제 다시는 손한번 잡아볼수없는 먼곳에 계시니..
하늘나라 그곳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도,
가보지않은 나로서는 여기가 좋은지 거기가 좋은지 알수 없지만,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고 하니,
하늘나라 그곳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도,
이렇게 이승에 남아 먹고싶어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이렇게 마주앉은 사람과 담소를 나누는 기쁨이 있으니,
어쩌면 옛사람들 말이 맞는것도 같습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 하나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을 등지곤 하는데,
내 형님이 가신 그 길이 어찌 본인 뜻으로 가셨겠냐만,
그래도 이왕 가신 길이라면,
부디 그 길이 꽃길이기를 마음속 깊히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