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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IFI게시판 > 상세보기 | 2009-02-04 12:09:41
추천수 0
조회수   1,928

제목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글쓴이

성정훈 [가입일자 : ]
내용

골드문트, 골드문트, 골드문트...
Goldmund...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명동교자 아시죠? 거기 칼국수하고 김치 참 끝내주게 맛있습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서 먹어주는데 요즘은 한동안 못 갔네요. 아무튼 거기서 무한 공짜로 제공되는 사리에 공기밥까지 추가 시켜서 더 이상 안 들어갈 때까지 퍼 먹고, 자이리톨 껌까지 줘서 그것도 씹고, 출렁거리는 배를 안고 나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뭅니다. 그러면 늘 지나가는 길에 골드문트 오디오샾이 있어요. 맨날 그냥 지나치다가 오늘은 한 번 들어가 보자 마음 먹고 유리문을 열었습니다. 묵직해 보이는 놈을 지적하며 이거 얼마 합니까? 물어보고는, 대답을 듣는 즉시로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ㅋ~ 말로만 듣던, 그림으로만 보던 골드문트... 과연 금덩어리로 만들어진 앰프인가 봐요.

명동에 오면 늘 불법주차를 하는 장소까지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생각을 했지요. 골드문트, 골드문트, Goldmund... 뭐더라? 황금의 입,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크리소스톰...... 아! 맞다. 전미 비평가 협회에서 20세기 들어 가장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로 꼽았었던 헤르만 헤세의 바로 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66, 500쪽, 만 원. ㅋㅋ

사마천이 동양적 우정의 사표로써 관중과 포숙아를 내세운다면 헤세는 자신의 소설 속 두 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으로 멍군을 칠 정도로 절친했던 두 인간. 소년시절 이 두 천애고아가 수도원에서 만난 이후 백발이 성성한 할배가 될 때까지 그들의 질긴 우정은 이어지지요. 뭐 골드문트는 이름 값을 합니다. 세상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나머지 신을 저버리고 수도원을 탈출, 온 나라를 싸돌아 다니면서 오만 여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데... 나르치스는 그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어디까지나 신의 부름을 받은 사제로서 학문과 경건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지요. 이렇게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인간 사이에 어떻게 우정이란 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궁금하시면 한 번 읽어보시죠^^

플라톤 이후 철학에서는 어떻게 저 이데아의 피안과 이 땅의 현상계라는 차안을 통합해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 왔지요. 이데아와 현상, 신과 세상, 무한과 유한, 존재 그 자체와 존재자, 본질과 실존, 이성과 감정... 백두Whitehead 선생께서 지금까지의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했다, 내가 새로운 걸 한 번 보여주마, 호언장담을 치면서 과정철학이란 걸 내놓았지만 글쎄요,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정답일까요?

말하자면 나르치스는 이데아와 신, 이성, 본질을, 골드문트는 여기 이 세상, 인간의 실존, 예술, 감정을 나타내고 추구하는 구도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나중에 골드문트는 어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리아 조각상을 보고 예술과 조우한 결과 유명한 장인 밑에서 조각을 배웁니다. 주체할 수 없는 내적 에너지를 예술에 쏟아부은 결과 그는 아주 뛰어난 예술가가 되지요. 허나, 개 버릇 남 못준다고 자기 스승의 딸까지 범하고는 또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마침내 나르치스가 있는 수도원까지 오게 됩니다. 골드문트가 세상에서 방랑하는 동안 줄곧 학문과 경건의 내공을 착실히 쌓아 온 나르치스는 어느덧 수도원장이 되었지요. 꽃답고 빼어난 미소년은 온데간데 없이 중년의 남루한 나그네가 되어 온 친구를 위해 나르치스는 수도원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무료숙식을 제공하고 수도원 예배당에 걸작 하나를 남겨달라며 작업실까지 마련해 주지요. 그 때부터 골드문트는 과묵한 사람으로 변해서 오로지 작업에 열중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불후의 마스터피스를 완성하고는 또 훌훌 떠나버려요. 그러다가 죽을 때가 가까와서 골드문트는 다시 나르치스를 찾아옵니다. 노환에다가 여독까지 겹쳐 병상에 누워있는 골드문트를 곁에서 간호하며 함께 주거니 받거니 이러쿵 저러쿵 지나간 삶의 여로를 되돌아보는 백발의 수도원장 나르치스. 마침내 그는 깨닫습니다. 비록 방향과 방법은 달랐지만 골드문트도 자신도 결국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왔다는 사실을.

"...그런데 하늘나라의 관점,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어떨까? 모범적인 삶의 질서와 규율, 세속적 욕망과 감각적 쾌락의 단념, 더러운 일과 피 묻히는 일을 멀리하고 철학과 기도에만 몰입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시간과 운명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하고, 그리스어를 할 줄 알고, 자신의 감각을 죽이고 세속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과연 인간의 소임일까?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은 애초부터 감각과 충동, 피끓는 욕망, 죄짓기 쉬운 성향, 쾌락을 즐기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는 성향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 그래, 어쩌면 골드문트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그저 유치하다거나 인간의 한계라고는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등을 돌리고 손을 씻은 채 정결한 삶을 살면서 조화가 넘치는 아름다운 사상의 정원을 꾸며놓고 잘 가꾸어진 화단 사이로 죄를 모르고 거니는 것보다는 어쩌면 세상의 끔찍스런 흐름과 혼돈에 자신을 내맡긴 채, 그러다가 죄를 짓기도 하고 죄의 쓰라린 결과를 감수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더 당당하고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456~57쪽).

역시 그의 학문과 기도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정 반대의 삶을 살아 온 친구, 자신이 틀렸다고 믿었던 길로만 가고, 죄라고 여겨 온 행위들을 밥 먹듯이 해 온 골드문트의 삶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반성하기까지 하는 나르치스. 정말 위대한 인격 아닙니까? 정말 이런 군자의 풍모를 지닌 고매한 인격 앞에서 저는 늘 속 좁고 편협한 소인배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물론 골드문트 또한 나르치스를 수도원에서 뽕이나 뭉게고 앉아서 미주알 고주알 경전이나 들이대는 꼰대로 여기지 않아요. 단지 자신이 그런 삶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뿐이고, 그래서 세상의 쾌락을 여과없이 즐길 뿐이고, 마음 내키면 다시 돌아와서 신세 질 뿐이고, 뭐 다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나르치스는 한 번 구한 오디오 평생 쓸 거 같으니까 실용, 골드문트는 맨날 바꿀 거 같으니까 비실용, 그러나 그들은 사이좋게 지냈다라는 잡생각을 해 보면서 오늘의 삼천포는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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