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4년 9월12일.
실록(연산군일기) 세초식에 참여했던 실록 편찬자들이 모인 잔치행사에서 세초식을 기념하는 그림에 자신들의 명단을 써넣고,각자 한장씩 나누어 가졌다.
-그중에 승정원 주서와,춘추관 기사관이었던 권발이 지녔던 그증명서가 500여년의 세월을 흘러와-경북 봉화군에 권씨종가에서 발견된것이다.
-중종반정의주역중 한명이었던, 성희안이 최고 책임자였고,반정관련자들과 연산에의해 억압,핍박등 고초를 겪은, 연산이라면 이를갈았던이들이 기재되어있다.
-(인원이 워낙많아 일일히 여기에서는 생략하지만,따로 요청이 있게되면 댓글에 올리겠습니다).
-당연히 연산에 대한 증오와경멸,편협한 시각으로 편찬작업에 임했을것은 불을보듯 뻔한일인것이다.(8)편 참조.
-중종의 첫정책 스타트는 연산의 사냥터에 세워져있던-'금표철폐'였다-연산의 흔적 지우기가 시작된것이다.
-폐위된 연산이 유배 떠날때 도성거리에서 연산에 손가락삿대질에,비아냥거리고 몰락을환호하며 새정부에 기대가 컸던 백성들은그러나 곧바로 좌절을 겪게되었다.
-세금,공물등 더 가혹한 착취를 당하게되었고,부패는 심화되고 관리들의 나태함은 눈뜨고 볼수없는 행태를 보인것이다.
-쿠데타세력들이 중종을 매의눈을 치켜뜨고 감시하며,너도 수틀리면 다시 갈아치워버리겠다는 압력으로 조정을 장악하는터라--놀고먹자판으로,말그대로 난장판,개판의 꼬락서니였으니,,,
-백성들은 차라리-관료들을 때려잡았던 연산때가 오히려 더 나았다며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피의숙청에,공포의 정치자를 제거한후,강력하고 비대해진 관료군들의 체제로 전환된 조선사회의 왕권은 제약적으로 축소됨을 초래하게되어버렸다.
...오죽했을까 싶은 측은지심일까...일부에서는 연산의 (상상)초상을 걸고,제사를 지내준다는데,영혼이라도 있다면--그모습을 보게된다면, 연산은 어떤심정일까,,,
-과연,그에게 면죄부를 줄수가 있을까,,,
-역사는 그토록 냉엄한것을,,,
-승자의기록으로 씌여진 역사를 되돌릴수가 없음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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