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로 행동에 제약이 많은 세상입니다.
답답하기도 하여 지방의 의과대학 교수에게 전화를 해봤습니다.
"O교수? 우찌 지내슈?"
- 네, 그냥 처박혀 지내고 있습니다-
"그람 강의는 으떻게 허구?"
- 뭐, 대면도 하고 비대면도 허구... 그냥저냥 합니다-
"나도 답답해 죽겠네요. 함 봅시다?"
-내려 오셔유 ㅎㅎ. 코로나만 댓구오지 마시구....ㅎㅎ-
"알겠수다, 거시기 쌍다리 백반집에 가서 오랜만에 배터지게 먹어 봅시당 ㅎㅎ"
차를 몰고 그냥 떠났습니다.
뭐, 급할 것도 읎어서 그냥 80km~110km 정도만 밟고 세월아 네월아....
차창을 스쳐가는 오월의 초목들이 너무나 싱그럽고
진초록과 연초록 빛깔들이 마치 수채화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창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자루가 주렁이주렁이 달리고
거의 끝물이 되어가는 쌀밥나무(이팝나무) 꽃자루도 아직은 봐줄만 합니다.
목적지 근처의 논과 밭에는 누릇한 보리들이 한창 익어들 가고
어떤 보리밭은 벌써 수확이 끝난 곳도 더러 있었습니다.
옛날 배고픈 시절 "보리망중"에 한다발씩 베어서
볏집에 구어먹던 풋보리가 까마득하게 생각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보릿고개"가 또 하나의 계절같이 겪던 시절이어서
아무 보리밭이나 몇다발 베어 구어먹어도 별로 탓도 하지 않았었고
심지어 그 보리 주인도 같이 앉아서 구워먹기도 하였는데
배고픈 겨울을 지나고 쌀독에 거미줄 치던 곤궁함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던 문제였기 때문에
보리망중 때의 "보리서리"는 하나의 관습이자 문화로 받아들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불에 구운 풋보리는 별미 중의 별미이긴 합니다.
불에 구워진 풋보리를 손바닥에 넣고 싹~싹 비비면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푸르고 윤기나는 오동통한 알보리가 나오는데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씹히는 맛은 절대로 망각할 수 없는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물론 불에 탄 꺼멍이 입 주위에도 시꺼멓게 묻어 우스꽝스럽긴 했지만서두 말입니다.
수십여년 전 옛 추억이 자동으로 생성되는 보리밭을 지나서
학교에 들어가니 입구마다 건물마다 열 체크와 방문기록을 여러차례 적어야 했습니다.
뭐 우짤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참 거시기하기는 했습니다.
이놈의 코로나를 언제나 작살낼 수 있을 것인지....!
옛날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는 흑사병과
페니실린과 항생제가 다량 개발된 상태에서의 스페인 독감 때는
지금의 상황과 얼마나 달랐을지,
또 어떻게 그 문제들을 극복했을지,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앞으로 우리 삶에 어떤 문제를 유발할 지 등 등.
"안녕하슈 ㅎㅎ"
- 아이고~오! 혹시 코로나 그놈은 안댓구 오셨쥬? ㅎㅎ-
"글씨 잘 모르겠수다.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긴 했는데..ㅋㅋ"
- 그나저나 건강하시쥬? 얼굴은 좋아 보이긴 합니다?-
" 아, 예 요즘 코로나 땜시 시간이 남아 돌아서 헬스클럽에 다니고 있구만요 ㅎㅎ"
"근데 저 TV는 뭐요?"
- 아, 저거 학교 비품인데 그냥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람 이제 학교 비품목록에서 삭제된거요?"
- 네, 그런 것 같습니다 -
" 으~음, 그러면 내가 가져가도 되나요?"
-뭐 하시게요?-
" 뭐 그냥 고물상 하나 차릴려구 ㅎㅎ"
" 그래도 고물값은 쳐드려야 하니 오늘 즘심값은 내가 내리다"
- 아니 그래두 여기 시골까지 오셨는데...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공짜가 있나요? 그런 말씀 마시구 즘심은 내가 살께요"
그래서 득템한 것이 1988년 7월산 GOLD STAR CR-9086L X
19인치 브라운관 컬러 텔레비젼 입니다.
물론 33살이나 처먹은 녀석이라
여기저기 묵은 때가 잔뜩 껴있고
나사들도 뻘겋게 녹이 슬어있었습니다.
보나마나
- 또 고물 줏어왔어? 어이구 내가 못살어 -
라고 따발총을 갈겨댈 마나님을 피해 당일은 차에 그냥 남겨두고 왔습니다.
다음날 마누라가 외출하자마자
집으로 데리고 와서 내부의 먼지를 최대한 닦아내고
33년이나 묵은 외부의 때를 말끔히 벗겨냈습니다.
공장도 가격을 보니 219,000원
당시 이눔을 들이려면 큰 맘 먹어야 했을거라는 생각과
"가전은 역시 LG"라는 말처럼 참 잘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정비를 끝낸 후 책상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니
참 뽀대도 나고 그 브라운관에 등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누구일까? 라는 회상에 젖어들기도 하였습니다.
RETRO는
추억이라는 뜻의 영어 "Retrospect"의 준말로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 등을 그리워해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성향을 말하며 최근 들어 더욱 확장되면서
뉴트로, 힙트로, 빈트로 등의 새로운 개념도 등장했다고 합니다.
무튼,
몇년 전에 구한 RCA 진공관 라디오는 물론
다양한 형태의 "풍무" "곰방대" "다리미" 등등의 RETRO 제품이
수십여점이나 제방에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나님은
- 늙으면 하나, 둘씩 버려야 하는데 자꾸 줏어 들어오니 이제 고물상 차릴거야? -
라고 힐난을 퍼붓습니다.
"아니, 이게 어때서? 이쁘고 뽀대 나잖아?"
"글구 이제 우리도 고물이 다 되어가는 RETRO 신세야!
" 누가 우리들을 영감, 할매라고 천대하면 당신 기분 좋겠어?"
라고 변명겸 반격으로 따발총 총구를 막아 버립니다.
근데.....
통전을 해보니 아예 먹통입니다.
그래서 역시 수십년 묵은 전파사 주인장에게
"옛날 테레비 먹통인데 고칠 수 있나유?"라고 물어보니
- 그놈이나 우리나 모두 늙어서 우짤지는 모르지겠지만 일단 갖고 와 보셔요 -
- 껌벅껌벅 하는 놈보다 차라리 즌기가 아예 안먹는 놈이 고치기 쉬워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저놈을 고치면 아직도 버리지 않는 VICTOR 1000 비디오를 연결하고
역시 수십년 묵은 비디오 테입을 재생하면
또 어떤 RETRO 세계를 느낄 수 있을까?
물론 GOLD STAR TV가 수리되어 재생 가능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1953년생(저 보다 형님임) RCA 진공관 라디오도 갖다놓아
찌글찌글 소리를 내고 울어대면 한층 더 맛이 나겠지만 말입니다.
뭐, 설사 그놈이 아예 소생 불가능한 상태라고 해도
그냥 놓고 보는 재미도 그리 나쁠 것 같지도 않기는 합니다.
RETRO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그 제품의 성능을 확인하려는 것이 절대치가 아니며
그 RETRO에 쌓인 역사와 얽힌 사연들을 더듬고 음미하려는
의미가 오히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그 RETRO에 꽂혀버렸습니다.
비록 고장나기는 했지만
희귀템 중의 희귀템인 INKEL RK-745를 덜컥 또 구매했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즐거움을 찾았다는 기쁨에 이 밤도 설렐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생산되다 단종되었다는데
이놈 역시 고쳐도 그만 못고쳐도 그만입니다.
그냥 그 자체의 역사와 내재된 사연들을
추정하고 읽어가며 즐기면 그뿐인 것입니다.
물론 고치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디오와 음악을 즐긴 세월이 어언 35년이 넘어갑니다.
이제는 엄청 고가의 제품들이 그리 부럽지 않고
소박하고 따뜻한 소리가 흘러나오면 그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혹시 늙어서 일까요?
아니면 달관이라는 변명일까요?
..........!!!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RETRO를 즐기고 좋아하는 마음은
당분간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을 것고.....
홀리듯 무슨 마력이 숨겨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생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