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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에서 찾은 먼 추억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21-01-28 01:57:13
추천수 4
조회수   1,135

제목

흑백사진에서 찾은 먼 추억

글쓴이

이정석 [가입일자 : 2013-01-27]
내용
 집안을 정리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 수십 년 된 흑백 사진들


사실 언제 봤는지 기억도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들이


마치 어둠 속에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듯이 재소환되어 나타납니다.


멀쩡한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구겨지고 접혀지고 꺾어진 것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보니 새삼스럽기 그지없고


그야말로 레트로 중의 레트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진즉 돌아가신 어르신들도 사진 속에서 웃고 계시고


지금은 영감, 할매가 되어버린 선배들도 있습니다.


 


쪽진 머리에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 어깨 뒤에 기대고 선 큰누나


앙증맞은 손으로 엄마 저고리를 잡고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사진사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가 참 귀엽습니다^^


그리고 사진 밑에 쓰인 현상 날짜는


저의 첫 돌을 기념한 사진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동네 이름은 띄엄바우였습니다.


그 이름의 유래는 어르신들이 전해주시던 전설이기도 하지만


과학적으로 판단하면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나 다름없는 허풍이기도 합니다.


어르신들이 전해주셨던 말씀에 의하면


~~기에서 쩌그까지 훌쩍 뛰어 넘어서 띄엄바우라고 한단다라고 하셨는데


~~쩌그사이의 간격은 어림잡아도 2km가 넘습니다.


그런데 코딱지 떼어먹고 다니던 어린 시절에는


그 말이 참말 + 정말 + 진실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더랬습니다.


허긴 쩌~~기에서 쩌그까지 한걸음에 후~~쩍 뛰어넘었던 냥반은


워낙 신출귀몰했었다고 하시니 혹시, 아마도, 어쩌면? 하고


억지로 믿어줄 수밖에 달리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마무시한 전설이 배어있는 제 고향 띄엄바우는


특급열차가 기착하는 농촌의 도시였습니다.


 


당시에는 증기기관차와 대젤 기관차가 공존하던 시절이었는데


칙칙폭폭 달리고 ~~!”하면 증기기관차이고


~~~드 달리고 ~!”소리가 나면 디젤기관차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엄청 귀하던 시절이어서


그 열차들이 오가는 시간과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위치를 어림잡으면


거의 10분 이내의 오차밖에 나지 않는


경험의 과학시대를 살았습니다.


 


또한 특급열차가 기착한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급행 버스 정거장도 우리 동네에는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완행버스는 아무 곳에서나 손들면 태워주던 시절이었는데


급행 버스는 구간과 구간을 규칙적으로 주행했기 때문에


여유가 있거나 시간이 급한 사람들은


마치 VIP나 된 듯한 기분으로 급행버스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당시 농촌의 도로는 100% 비포장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신작로라고 불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운송수단이 대부분 우마차였던 고로


자동차가 달리도록 뚫어진 새로운 길은


그야말로 신개념인 新作路가 당연했던 것입니다.


 


新作路를 오가던 자동차들은


구름 같은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들판과 산모퉁이를 돌아 내달아 가고


사람은 물론 닭과 도야지도 같이 버스에 태워졌습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보는


동남아시아 빈국들의 모습이 생경스러울 수 있지만


불과 수십년 전의 대한민국도 전혀 다를 게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버스 차장들은 남자 70%, 여자 30% 정도였는데


거의가 하나같이 목소리는 허숙희(허스키)로 변해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오라이~!


~~!


소리를 내 지르기도 했겠지만


버스가 터져 나갈 정도로 사람들을 쌓아야 하고


비포장 도로에서 비산되는 먼지로 인해


매우 자연스럽게 성대가 두꺼워졌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미세먼지때문에 정부까지 야단법석을 떨 정도지만


당시의 먼지는 미세먼지가 아니라 그냥 흙덩이수준이었음을 생각하면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라는 말이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구겨지고 접혀지고 꺾여진 사진 속의 우리 큰 엄니


소띠라고 일복이 많다고 맨날 불평이셨지만


한결같은 성정과 인정이 많았던 큰며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복 많은 삶 속에서도 열넷이나 생산하셨습니다.


바로 옆집 내 친구 아부지이신 김성룡 어르신도


경쟁하듯 아홉 남매를 제조하셨습니다.


 


두 집안의 공통점은,


얼기설기 엮은 수수깡 울타리 사이의 이웃이었고


신작로와 철로 사이의 공간을 공유하던 이웃사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나온다"라는 속설을 믿었는지 어쨌는지


경쟁하듯 아이들을 밤낮없이 생산하셨다는 것입니다.


 


승자는 무려 14명을 밤낮없이 제조해 내신


우리 큰 아부지, 큰 엄마이고요.


그중 막내는 큰 엄니가 쉰네살에 ~!” 하고 낳으셨습니다.


그 막내와 맏이와의 나이 차이는 무려 36....!


 


그러고 보면 우리 큰 엄니는


18세부터 54세까지 허구한 날 아이만 낳았다는 것인데


결론적으로 우리 큰 아부지가 음청 대~단하셨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맏며느리로서 일복 많다고 맨날 신세 한탄하시던


큰 엄니는 훨씬 말할 것도 없지만서두요.....!


성비 또한 아들 8, 딸이 6명이니 적중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컨트롤 역시 대단하신 프로펫셔널 플레이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양가 모두 3대가 같이 살았는데


내친구 점섭이네가 9, 큰집 14명의 아들딸이 무려 23명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부지, 옴마까지 모두 합치면


무려 31명의 어마무시한 대가족이


헐렁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쯤되면 우리 큰 아부지는 "가장"이 아닌


"족장"이라고 해야 마땅할 듯 싶습니다.


 


요즘 같으면 대통령 표창이 아니라 공로훈장이라도


받아야 하는 국가 유공자급(?)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근데 사실 옛날에는 "자식이 많아야 多福하다"라는 인식이 강하기도 했지만


영아 사망율 또한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에


종족보존 본능으로 인한 다산이 곧 "多福"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피임의 개념을 전혀 몰랐던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출산율은 국가나 사회, 또는 환경과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통계적으로도 밤이 길어지는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임신한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해방 후부터 6.25 전쟁 직후까지 가임여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러한 환경적 요인은 외국이라고 별다르지 않습니다.


중동의 6일 전쟁 때 등화관제가 실시된 시기에 엄청난 베이비붐이 일어났다는


통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대입해 보면


우리 큰집이나 내 친구 점섭이네도


거의 동일한 요인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큰집 맏누나가 1945년생 해방둥이이고


막내가 1981년에 出世했으니


흔히 말하는 베이비붐 시기가 거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인에 더하여


우리 큰집과 점섭이네 집은 또 다른 환경적 요인이 플러스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철로와 신작로 사이에 두 집안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요인입니다.


철로와 도로 사이가 불과 150m 남짓인데


시시때때로 뽀~~ 칙칙폭폭! 기적소리가 올리고


시외버스도 간단없이 빠~~빵 거리며 오고 갔으니


그 사이사이마다 아이를 만들 수 있는 외부적 요인이 수시로 발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철로와 신작로는 엄청난(?) 다산을 유발한 결정적 촉매제라는


사실을 절대 부정할 수 없을뿐더러 사실적 증거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근래 우리나라는 극심한 출산율 감소를 해소하기 위해


2백 몇십조원을 퍼부었다고 하는데 결과는 신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잠을 깨울 수 있는 환경에 신혼부부들을 집단 이주시키면


혹시나 마시나출산율이 쬐끔이라도 올라가지 않을랑가요? 라는


헛된 망상과 공상을 동시에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ㅎㅎ.....!


 


으쨌거나......!!!


구름 먼지를 피워올리며 신작로를 내달리던 버스와


~~~” “~!”하고 기적소리를 내뿜던 기차들은


내 고향 띄엄바우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환경적 요인을


엄청나게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절대로 부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맹모삼천의 본질적 의미는 환경일 것입니다.


묘지 근처로 이사가니 맹자는 맨날 곡소리만 따라 하고


저자거리로 옮기니 장똘배기 같이 변해가더랍니다.


그래서 서당 근처로 이사를 하니


그제서야 맹자는 글 읽는 것을 따라하며


공부를 하는 것에 즐거워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내용은 우리 국민핵교 때 이미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얘기입니다.


 


이러한 맹모삼천의 환경적 요인은 저희한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특급열차도 기착하고 급행 버스 정거장도 있고


읍사무소도 있었기 때문에


물 건너 산 넘어 살던 아이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영악하고 재빠르고 약아 빠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나고 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생산된 수많은 정보를 취득하기가 용이해서


비교적 세상 물정에도 밝은(그래봤자 井中之蛙일 뿐이지만)


뺀돌이들이 유독 많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군청 소재지가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각급 면 단위 5일 장에 공급하는 각종 물자가


역전 창고에 수시로 입하되고 출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자 중에는


미국 원조(주로 밀가루, 탈지분유, 옥수수 가루 등) 물품도


수시로 공급되었습니다.


열차와 버스가 통과하는 물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역전 창고는 1365일 좀도둑들의 사냥터가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 원조품인 탈지분유, 옥수수 가루도 있었지만


각종 과자와 빵, 그리고 과일 등은 물론


고구마, 감자, 대추, 오징어, 미역 등의 식품이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하루 3끼 다 먹으면 부자고 2끼 먹으면 보통이고


1끼 먹으면 가난한 집이라고 분류할 때라서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뱃가죽이 등판에 붙어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전 창고에는 그 배고픔을 해결해 줄 과자와 빵 등의 물품이


무진장 쌓여 있었으니 한마디로 방앗간의 참새나 곳간의 생쥐처럼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유혹 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그 창고에 쌓인 각종 물품을 시시때때로 훔쳐 먹은 덕분에


그나마 우리들 몸뗑이가 이만치라도 성장되지 않았나? 하는


기막히고도 가슴 아린 추억이기도 합니다.


 


불량끼가 솔찮았던 박O희 형,


개구쟁이 서O, 삔득새 김O,


그리고 나를 포함한 띄엄바우 아이들.


이들 모두 "역전의 용사"(歷戰勇士)가 아닌


"驛前勇士"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던 대표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설 영감님!


그 어르신은 근 20년 넘도록 그 창고를 지키던 분이었고


나이는 같지만 1년 후배였던 설O환의 부친이셨습니다.


 


이분에 대한 기억은 1365일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이고


얼굴은 불콰하니 항상 대추색이었습니다.


직업이 역전 창고를 지키는 경비원이었던 탓에


날이면 날마다 배고픈 좀도둑들과의 숨바꼭질이 주된 업무였습니다.


눈만 깜빡하면 어느샌가 물건을 빼먹으려는 좀도둑들이 설쳤기 때문입니다.


 


흡사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케 하는 험악한 인상과


기차 화통을 삶아드신 듯한 걸걸한 목소리는


동네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없는 죄스러움에 가슴 저리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그 어르신을 동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창 성장하는 청소년기의 배고픈 아이들이


먹을 것이 수북한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이해나 하셨을지 새삼 궁금합니다.


물론 순전히 아전인수 같은 이기주의의 발로이긴 합니다 만......


 


어쨌건,


우리 동네 띄엄바우 녀석들은


비가 많이 와도 눈이 많이 쌓여도


결석할 수밖에 없는 두메산골 아이들보다


비교적 도회스러웠고 영악스러웠으며


성적도 상위권을 휩쓸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속설로 따지자면


온갖 정보(그래봤자 신문, 새농민 잡지, 도서관 정도지만)의 혜택을 입었을 것이고


역전과 버스 정거장을 통해 전달되는 다른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5일마다 서는 장터에서 신문물(?)도 수시로 경험할 수 있었다는


나름 거창한 환경의 혜택을 받은 덕분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또 다른 사진을 봅니다
.


흰색은 노리꼬리하게 변색되었고


검정색마저 흑회색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기억 역시 노이즈가 잔뜩 깔린 흑백 영상처럼 껌뻑껌뻑합니다.


그래도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기억들은


안개 속의 물체처럼 희미함 속에서도


엷게 칠해진 수채화 물감처럼 잔잔하게 다가옵니다.


 


사진은 삶의 흔적이기도 하고 시간의 기록이기도 해서


망막을 통해 전해진 이미지가


잠들어 있던 기억 세포를 깨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빛바랜 사진 속의


그 망나니 같고 북한의 꽃제비 같았던 아해들은


이제 모두 손주를 볼 나이에 접어든 늙은이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별명이 암행어사였던 역전 식당 장남 박O,


모든 동네 사람들이 두손, 두발 흔들었던


싹수 노란 삔득새 김O,


온갖 인상과 허세로 개폼 잡던 서O


190cm가 넘어 우리들 허리쯤에서 소변을 내갈기던 홍OO


BTS 제이홉과 흡사할 정도로 춤과 노래가 특출났던


O용이도 빼놓을 수 없는 驛前勇士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소리없고 흔적이 없어


대부분의 어른들이 모범생이라고 공인해 주셨지만


사실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당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또 한 장의 사진을 봅니다.


사진에 박힌 장소는 숲정이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밤마다 엄마 젖을 보채는 애기 귀신과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죽은


처녀귀신이 밤길을 가는 사람들을 홀린다는 전설아닌 전설이 서린 곳입니다.


 


이러한 얘기들은 실제로 각색되고 부풀려져서


대낮에 그곳을 지나갈 때면 괜히 오금이 저리고


피부에 닭살이 돋기도 했었습니다.


 


이 사진은 바로 그 음침하고 무시무시한 숲정이를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이 사진을 누가 찍어줬는지 기억은 없으나


사진에 박힌 사람들은 저를 포함하여 박O, O, O, O호라는 친구입니다.


 


그중 육사 교복을 입고 있는 이O진은 지금 정부단체 일을 하고 있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한글을 읽지 못했던 石頭O근은


어디선가 숙박업을 하고 있고 돈도 많이 벌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순박하고 말수가 적었던 최O두는 고향에서 농사와 양봉업에 종사하고


기운이 세고 한주먹 했던 한O호는 저세상에 간지가 20 몇 년이 넘었습니다.


 


참 먼 옛날이지만 기억 속에 살아나는 장면은 마치 엊그제 같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듯하고,


세월이 유수 같다라는 말을 새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 고향 띄엄바우는 철도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철도와 역전에 얽힌 사연이 많습니다.


냇가를 갈 때도 철뚝을 넘어가야 했고


논을 가거나 소를 방목하거나


멱을 감거나 고기를 잡을 때도


항상 철뚝을 넘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갯버들 늘어진 냇가는 우리들 추억이


모래알처럼 널려있던 곳이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소한 얘기들은


여전히 물길을 따라 흐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夏節마다 어른들은 천렵을 하셨고


아해들은 멱감고 물괴기들 잡고


여인들은 여름밤에 몸을 씻었습니다.


짓궂은 어른들이 자건거 불빛으로 여인들 몸을 비추면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깔깔거리던


여자들의 속내가 지금도 아리송하긴 합니다 만......


 


그 당시의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은 그냥 "어림짐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침 해가 어디까지 오면 몇 시쯤이라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또 하나의 기준은 OO열차가 어디쯤 오고 있다거나


역전에 도착하거나 출발하는 시간과 크로스 체크하면


대강대강 대충대충 시간은 맞아떨어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그 측정 기준이 달랐습니다.


해 뜨는 방향이 다르고


그림자가 드리우는 위치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기차가 오가는 시간을 기준할 때는


통학열차, 101열차, 특급열차, 화물열차 시간을 기준하는데


소리에 따라 그 기차가 어디쯤 오는지도 거의(?) 대충 짐작했습니다.


깔막고개를 돌아 나오는 기차소리가 다르고


삽치재를 헐떡이며 올라오는 기차의 숨소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철로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레일과 레일사이를 지나가는 기차 바퀴소리가 다릅니다.


트득! 트득! 하면 평지나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이고


~~! ~~! 거리면 오르막을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멀게 들리거나 가깝게 들리는 것으로


거리가 어디쯤인가를 기똥차게 계산하기도 했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측정법은 나름 꽤 정확했었는데


그 기차바퀴 소리로 거리 짐작을 하고


겁도 없이 철교를 건너는 내기를 하는 만용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마치 러시안 룰렛 게임과 다름없었고


철부지들의 호기로 목숨까지 걸었던


위험천만하고도 한없이 겁대가리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제 고향 띄엄바우뒷산은 수천 그루의 밤나무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그 산주가 옛날 진사벼슬을 하던 대지주 후손이었는데


그 후손은 일본까지 유학한 나름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산에 유실수를 심어 소득을 올린다는 목적으로


수천 그루의 나무를 수만평 땅에 심은 것입니다.



그 뒷산 꼭대기에는


커다란 묏똥이 둥구런 모자처럼 앉아 있었는데


우리들은 그 산을 "모여라 동산"이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하절기에는


먼동이 트자마자 기상하시는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도 대부분 늦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하품하품하며 일어나자마자 꼴을 한 망태 베어야 하고


소 몰고 나가서 방목도 해야 하고


일생동안 배고픈 되야지 밥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들은 보통 아침 7시 전에 모두 끝났습니다.


맨날 하던 짓들이라 숙달되고 또 익숙했으니까요.


그 일이 끝나면 곧바로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꼴 베고 소 방목할 때 이미 아침이슬 그득 차서


미끄덩거리고 철떡거리는 고무신을 신고 말입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자마자


모여라!


모여라!


하고 외치다 보면


하나, 둘씩 모여든 친구와 형아들이 합세하게 되고


독창이 합창으로 바뀌어


동네 건너 철뚝 건너 냇가도 건너고


넓디넓은 들판도 지나


건너편 산으로 가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2CH를 넘어 3CH, 4CH


온 동네는 물론 골짜기 구석구석까지 목소리가 번져갔습니다.


아마도 그 재미로 맨날 모여라!’를 외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멸종되어버린 늑대가


그 당시에는 매우 흔하디 흔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되야지를 업어가기도 하고


어쩔 때는 영악한 늑대가 되야지를 몰고 산으로 올라갔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간혹 산꼭대기 묏똥 근처에서


되야지 모가지만 달랑 남은 것도 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매우 의아스러운 점은


솔찮이 무거운 되야지를 늑대가 어떻게 산까지 업고 갔는지


혹시 살살 몰고 갔다면 겁에 질려 꽥꽥거리는 되야지를


어떻게 어르고 달래서 몰고 갔는지 말입니다.


 


그 산에 가을이 찾아오면


아해들과 어른들 모두


그 산언저리에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올밤은 9월 초순이면 아람이 벌어지고


그 올밤을 따먹는 동안


쪽밤도 익어가고


길쭉밤, 왕밤, 산밤도 익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느지감치 아람이 벌어지는


늦 밤은 작지만 야물딱지고 맛이 좋아


특히 어른들이 좋아하셨습니다.


껍질을 까서 햅쌀밥에 놓아먹으면


별미 중의 별미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 동네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던 밤나무 산은


우리 집안과 먼 친척이자 아부지 친구인 어르신이 산지기로 임명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사가 주업이기도 하고,


사방팔방 십육방 삼십이방이 뻐벙 뚫린 그 넓디넓은 산을


배고픈 다람쥐같이 밤나무들을 헤집는 아새끼들로부터 지켜낼 수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수천 그루 밤나무에서 생산되는 대다수의 알밤은


거의 8, 9할이 동네 사람들의 위장으로 사라져 버리고


정작 밤나무 주인은 1~2할의 소출(小出)만 얻었을 뿐입니다.


 


그 산은 우리 집 뒤에 있었는데


산 밑자락에는 우리 감자밭 옥수수밭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추억도 그 산에 떨어진 알밤만큼이나 많이 박혀 있습니다.


 


봄철에 그 산을 넘어가면 진달래가 온통 천지사방에 피어났는데


어른들은 "문둥이가 간 빼먹는다"라고 겁을 주어서


맨날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했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주변 천지가 모두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산과 연관된 추억도 많고


제 가슴에 가장 선연한 모습으로 저장된


꿈같고 환타지 같은 풍경도 그 산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자울자울 졸면서도 어른들에게 들었던


귀신 얘기,


도채비 얘기,


멧도야지 사냥은 물론


퇴깽이도 잡고


자작한 활로 꿩도 수십마리씩 잡았다는 얘기들.....


또한 호랑이도 목을 졸라 잡았다고 하고


되야지를 업어가는 늑대를 절구공이로 때려잡았다는 무용담 등등이


모두 그 산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선연한 봄날의 기억 중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풍경이 지금도 총천연색으로 남아있습니다.


간 빼먹는 문둥이가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밤나무 산 뒤편으로는 진달래가


온 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그 어린 나이임에도 몇 시간씩 산 위에 머물곤 했었습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봄날의 들판에는


종다리 울음소리가 먼 하늘까지 퍼져나가고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물결치던 홍자색 들판이


너무나도 부드럽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들판에 물결치던 홍자색 꽃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심었던 자운영꽃이었습니다.


당시 유행처럼 대부분의 논들에 자운영 씨앗을 논에 뿌렸었는데


어린 나물은 무쳐 먹기도 하고


소여물로 제공하기도 했었으며


베어진 다음에는 퇴비로 사용했으니


일석이조가 넘는 다용도 식물이었던 셈입니다.


 


그때 그 산 위에서 보았던 홍자색 자운영꽃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가슴에 선연하게 착색되어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십만 평이 넘을 법한 너른 들판에


봄바람에 일렁이는 홍자색 꽃의 파도......


 


당시 고작 10여 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무신 감성이 그렇게 세세하고 예리했을 것일까 만은


여전히 내 감성의 한복판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고향이라는 정서적 연대감과


순수한 백지와도 같은 감성에 착색된 추억들이


내 원천적 감성의 일단을


꽉 틀어쥐고 놔주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시기쯤 시골에 가면


뭐가 결핍된 놈처럼 자운영 꽃밭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옛날 그때의 감성은 거의, 전혀 살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선 늙어빠진 감성이 쭈글쭈글해서


직선적으로 감정이 전달되지 못한 점도 있었을 테고


열 두서너살 때의 순수함도 진작에 상실되어 버렸으며


그 밤나무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억은 어디까지나 추억일 뿐이고


흰 무명옷에 처음으로 채색된 선연한 색깔의 감성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집안을 정리하다 찾은 몇 장의 흑백 사진들


기억의 끈들을 이어 나가다 보니


참 여러 갈래의 추억이 연결되고 기억세포가 깨어났습니다.


우리 나이쯤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간직했었을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감성들


 


누군가는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영원히 버리지 못할 추억이자


아름다운 기억의 편린 들입니다.


 


쓰다보니 한참 길어지고 말았네요.


여기까지 지루함을 무릅쓰고 읽어주신 분들께


미리 감사한 마음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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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8 2021-01-28 09:39:58
답글

아 ㅡ¿ㅡ

최창식 2021-01-28 11:49:27
답글

54세에 출산이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 할 정도네요.
우리 할머니가 숙부를 46세에 낳으셨는데, 그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더만...
갑자기 궁금해져서 국내 최고령 출산 검색해봤더니 55세, 57세 나오는데
그건 시험관 시술이라 자연임신으로는 이정석님 큰어머니가 1위 같아요.
맏이와 막내의 36년 차이는 아마 전세계에서도 1위 아닐까 싶습니다.

이정석 2021-01-28 13:03:35

    글쎄요...
하지만 54세에 막내를 출산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요.
그것 때문에 마을에서도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맏누나와 막내가 여전히 생존해 있으니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도 맞습니다.
근데 중국에서는 67세에 출산한 기록도 있다고 하니
54세 출산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순영 2021-01-28 14:31:57
답글

버스차장이 있던 시절이 있었죠....ㅋㅋㅋ 그런데 저는 왜 남자버스차장은 기억에 없을까요?

모자를 쓴 유니폼 입은 언냐들 생각만....조금 나네요...;;;;

이정석 2021-01-28 13:12:40

    아, 그건요.
시내버스는 거의 100% 여자가 차장을 했던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험악한 시외버스는 여자들이 감당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제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반까지 무전여행을 많이 했었는데
80년대부터는 여자 차장이 많았습니다.
충청남도 여행할 때 빵집을 들어갔더니
한무리의 여자 차장들이 있었는데
전부 버스 차장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 하나와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 인연 때문에 그 버스 노선이 다니는 곳은
전부 공짜로 타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버스 차장이 직접 현금을 받았기 때문에
OO씨 남자친구라고 하면
버스비 공짜는 물론 용돈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참 낭만스런 시대였죠^^

강석준 2021-01-28 10:54:15
답글

미루나무 사이로 뽀얀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빠스.
저의 아련한 추억이며
먼 옛날 보았던 낡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정석 2021-01-28 13:14:58

    옛날 시골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갖고 있던 추억의 장면이었죠.
그때 그렇게도 흔하던 포풀라(미루나무)가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속성수이긴 하지만
목재로서 별로 가치가 없어서인가 봅니다.

남상규 2021-01-28 11:27:51
답글

글솜씨가 대단하시네요. 마치 한편의 수필을 읽은 것 같습니다. 글을 보면서 저도 예전 추억들이 아련하게 생각나네요. 저도 이젠 정말 나이가 들었나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이정석 2021-01-28 13:16:17

    그냥 취미로 끄적끄적 합니다.
글은 쓰면 쓸수록 어렵기도 하지만
자꾸 쓰다보면 좋아지기도 합니다.

암튼 과찬 감사드립니다.

조용범 2021-01-28 11:39:58
답글

하 혹시 글작가이신가요? 책내셔도 되겠습니다. (벌써내셨나?)

이정석 2021-01-28 13:18:08

    네, 작가는 아니고요.
그냥 취미로 이것저것 끄적거리긴 합니다.

근데 주위에서 자꾸 책을 내라고 해서
몇년째 고민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써놓은 글들을 손봐서
개인 기념으로라도 책을 내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종호 2021-01-28 13:19:13
답글

고향이 시골이신 분들은 어려서의 추억들이 있지만 태생이 서울 토박이인 저는 어릴적 추억과 기억보다는 외갓집인 도봉산너머 장수원(지금 망월사역 인근)에서 기억이 아련합니다. 지금 그 인근에서 노년을 보내는 아이러니...ㅡ,.ㅜ^

이정석 2021-01-28 15:09:50

    네 그렇군요.
사실 수도권 인구의 상당수가
시골에서 태어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 또래에는
저같은 고향에 대한 추억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정정훈 2021-01-28 20:14:48
답글

어릴적 추억이 잔잔하게 떠오르게 하는글이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는 철길의 추억은 없었지만 다른 풍경들은 제가 태어난 시골과 크게 다르지 않아 추억 속에 쉽게 젖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워낙에 세세하게 추억을 끄집어내서 보여 주셔서 몰입하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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