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자고나면 수많은 뉴스가 쏟아지고
특히 인터넷이 발달하여 지구촌이 되어버린 요즘에는
전 세계의 모든 사건사고가 소화할 수도 없을만큰 쏟아집니다.
이놈의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그에 따른 경제 문제도 대단히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근래에는 제가 존경하는 박원순 시장의 황망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참....뭐라 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심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필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젠더 문제가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性" 문제는 참 어렵고 민감한 문제입니다.
특히 사회적 명망가들은 그 민감도가 대단히 높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젠더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회적 압력이 강해서
조심해야할 문제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페미니즘의 발달 때문인지,
아니면 남존여비 사상에 대한 평탄 과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녀 평등을 넘어 여성 상위시대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요즘에는 "여성"이라고 하는 벽이 너무나 민감해서
아주 어린 여자아이나 70~80대 할머니까지도 조심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유달리 아이를 좋아하는 저 역시
귀여운 이웃집 여자아이 조차도 조심스러워
이쁘다고 말하기도 두려울 정도입니다.
밤늦은 시간에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당연히 박원순 시장에 대한 설왕설래 때문입니다.
그를 지지했던 시민의 한명으로서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아쉽다"라는 생각의 저변에는,
박원순 정도의 인품, 인격, 이력 등을 가진 사람이
뭐가 아쉬워 비서를 성추행 했을까? 라는 의문과
지난 수십년간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를 이끌었던 도덕적 리더가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또 다른 세상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의구심 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면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과 같이
"모두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말 외에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 한마디도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추행 피해자의 주장만 남고
박원순의 반론은 영원히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의구심도 버릴 수 없습니다.
근래 미투 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사회 각계 여러 곳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밝혀졌고
그중 일생을 쌓아온 명성이 하루 아침에 개똥이 되어 버리는 일도 수없이 있었습니다.
반면 특정한 목적을 위한 일부 여성들의 목적성 미투 때문에
성폭력 및 성추행으로 매도당한 유명인도 한 둘이 아닙니다.
그 중 한사람이 탤런트 조민기 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영화계열 학생들에게 지도교수는
곧 연예계로 진출하는 열쇠나 다름 없습니다.
특별한 지명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지도 교수가 PD나 감독에게 제자를 소개해야
비로소 단역이라도 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과 관련이 있는 직업이 있기 때문에
조민기씨에 대한 얘기도 걸러걸러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성추행 교수"라고 고발을 당했겠지만
스타급 탤런트이자 지도교수인 조민기에게 매달린 학생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경우는 몸까지 내던지며 교수를 유혹하고
그걸 미끼로 연예계로 진출하려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소외된 학생들은 교수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남녀관계라는 것으로 설정되어지면
온갖 상상과 추리가 더해져 "성추행" 정도는 매우 쉽게 성립될 수 있습니다.
결국 조민기는 목숨을 내어 던졌고
가슴 메어지는 가족들만 이 세상에 남았습니다.
과연 이 사건에서 100% 조민기의 잘못만 있었을까요?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원순,
저는 그를 참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자기 것을 챙기기 보다는 남에게 퍼주기를 좋아했고
군부독재의 서슬퍼런 세상에서
시민사회를 일깨워 민주주의를 달성하려는 목표를 향해
참으로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장으로 재직하는 9년여 동안
서울시의 평가가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높아졌음은 물론입니다.
그런 그가 "성추행"이라는 분홍글씨가 새겨질 것을 두려웠는지
정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목숨을 건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승부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은 자존심과 도덕, 윤리에 목숨을 걸 수도 있습니다.
박원순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이고,
노무현과 노회찬도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 입니다.
노무현은 받지도 않은 "논두렁 시계"로 목숨을 내던졌고
노회찬은 전두환의 2,500억원도 아닌 단돈 4,000만원 때문에 세상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
모두가 윤리와 도덕을 지상의 가치로 알고 살아 온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가 되었건
그 가치가 훼손되거나 무너졌을 때
더 이상 세상에 자신을 내놓을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미련없이 목숨을 내던진 것입니다.
자신이 세워놓은 가치가 무너졌을 때
자신을 버텨줄 방벽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박원순의 죽음이 믿기지 않고
아쉬움의 그늘이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가 참여연대를 할 때부터 지지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토록 정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과연 그랬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 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먼 곳으로 가버렸고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의 주장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양쪽 말을 들어봐야 한다"라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본위, 또는 방어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형법에서도 "자기방어"는 당연히 인정되고 또한 보호받습니다.
물론 박원순을 고소한 여성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쪽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왜? 박원순의 주장이건 변명이건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원순은 그냥 깨끗히 인정하고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해 버렸습니다.
설사 시장직을 내던지고 재판을 진행한다고 할 지라도
서울시장이자 대권주자인 박원순의 주장을 인정할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회피이자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과 지지하지 않는 사람으로 갈립니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일생의 功은 제쳐두고 도덕적인 면만 비난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드러난 "과"에 안타까워 하지만
쌓아진 "공"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그는 갔습니다.
그것도 졸지에, 황망하게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세상 사람들이 매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많이 아쉽고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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