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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싸다 문학관] 단편 자작 소설 - 거울 속 저편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9-11-26 20:20:33
추천수 0
조회수   773

제목

[와싸다 문학관] 단편 자작 소설 - 거울 속 저편

글쓴이

김일영 [가입일자 : 2003-09-26]
내용
 요즘 연말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괴로워하며 좀 먹는 시간에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마음은 두둥실 띄우며~

 커피 물을 데웠습니다. 

 그래도 괴롭기는 매 한가지지만 1% 산뜻해 지는 마음이 있네요. 

 학창시절에 썼던 소설을 올립니다.

 자작소설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법하고

 새로 장편 소설에 도전해보려구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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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저편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눈을 뜬다. 빛바랜 천장이 낮아 보인다. 지어진 지 십여 년 정도 지난 아파트인 만큼 두 세 가구 정도 거쳐 갔을 것이고 그중 한 명은 지독한 골초였을 것이다. 언제 락스를 풀어 화장실 타일에 배겨있는 누런 니코틴을 말끔히 닦아야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언제하면 좋을까? 오늘은 창석이 봐야하고, 내일? 내일은 교회에, 모레? 그래. 그는 어서 끝내고 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다. 어쩔 수 없지.

 살림꾼이 다 되었구나, 혜선이 살며시 흘린 말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늦은 시간에 퇴근한 혜선은 부은 종아리 위에서 스타킹을 둘둘 말아 내리고 있고 그 말의 의미는 집에 와 편히 쉴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는, 배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는 알면서도 자존심이 상처받아 얼굴을 붉힌다. 그의 얼굴을 보고 혜선 역시 무언가 말실수를 했다고 느끼지만 하루를 풀어낸 긴 말 중 어느 부분이 신경을 건드렸는지 알지 못하는 눈치다. 그는 버벅 거리다가 마치 조루증이 있는 남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어서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빈방을 빙 둘러본다. 일상에 녹아 찰싹 버터처럼 붙은 공간인데도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늦봄의 여운을 가득담은 햇살과 무거운 정적이 방 안에 감돌고 있을 뿐인데 귀 떨어진 거울을 보는듯한 그 낯선 느낌. 혜선과 갓 돌 지난 아들, 다인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공허하게 벽에 부딪혀 사라진다. 그는 거실로 나가 치우지 않은 식탁을 보고 비로소 안도한다. 

 급하게 나간 모양이네, 아홉 시인데. 혜선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으니 다시 걸어 주십시오, 누군가 친절히 말한다. 혹시 다인이가 아픈 것은 아닐까 순간 불안해하다가도 불덩이 같은 아이를 껴안고 홀로 달려갈 혜선이 아니기에 마음이 놓는다. 친정에 갔으려나? 

 그는 쪽지하나 남겨 놓지 않은 혜선을 원망하면서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그는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며 자신의 삶이 어느 부분부터 어긋나 버렸는지를 생각한다. 아이엠에프 때보다 극심한 경제 한파 때문에? 하긴 그전에는 혜선과 역할이 바뀌어 있었지. 편집장이 돋보기안경을 내리며 자넨 생각이 너무 독특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찾아가는 일마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한계가 정해져 있었기에. 그래도 혜선이 강남 부근에서 컴퓨터 학원 강사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든 했으리라. 생각이 이렇게 번지자 말 한 마디 없이 사리진 혜선이 원망스럽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이렇게 책임감이 없나.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여느 때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비쳐진다. 여성 진행자의 외모가 남성 진행자보다 못생겼다. 남성들은 하나같이 준수한 외모에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있고 여성들에게는 외모의 아름다움보다 자애로운 넉넉함이 배어 나온다. 그리고 여성들이 화제를 이끌어 가고 남성들은 간간 말을 잇고 있다. 광고 역시 남성의 어깨와 가슴, 팔뚝, 복근을 강조하는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작은 동산 같은 아랫배를 쓰다듬는다. 

 그는 시계를 보며 노곤한 몸을 일으킨다. 고등학교 동창인 창석이 결혼할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며 점심을 사기로 했기 때문이다. 시내로 나가기 위해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    

 욕실 거울 속에서 면도크림을 솜사탕처럼 말아 올려 턱에 바른다. 차고 부드러운 감촉이 뺨을 자극한다. 유선형의 면도기가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레몬 향을 밀어내고 수염을 깎아낸다. 면도가 잘 되었는지 턱을 들이밀다 그는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얼굴을 꼼꼼히 살피며 세월이 피해가지 않음을 본다. 

 이렇게 자신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철없던 청년 시절, 술에 만취한 이후 처음이다. 그는 술집 화장실에서 얼핏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다가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일기장에 적어본다. 

 ‘아늑한 가로등 불빛 가득한 도시 속에 그의 윤곽이 선명하다.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겠느냐? 비죽 튀어나오는 나를 향한 웃음. 한 숨을 내쉰다. 모든 이에게 사연이 있듯 내 사연 쫒아 이 악물고 달려들 수밖에. 온 몸이 비 맞은 듯 땀에 젖어 헐떡이며 달려들 수밖에. 다시 창을 본다. 잿빛 눈매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담배를 비벼 끈다.’ 

 물론 그 생각 후 쓰러져 줄기차게 구토를 한 사실은 그의 기억 속에 없다. 등 두들겨준 혜선만이 그 모습을 기억할 뿐이다. 젊은 날 썼던 일기장의 한 구절이 뭉클, 떠오르며 비애가 된다. 김이 잔뜩 거울에 서려 그의 그윽한 눈동자를 흐릿하게 지운다. 그는 물기 묻은 손으로 쉴 새 없이 닦지만 수증기는 계속 거울을 뿌옇게 뒤덮는다. 문을 열면 되지.

 그는 화장실 문을 연다. 열기 뒤섞인 수증기는 거실로 빨려 나가고 담담해진 자신을 느끼며 칫솔을 손에 쥔다. 거울 속에는 그가 바보처럼 웃으며 서 있다. 거울에 비친 거실 안 냉장고 윗 칸에는 혜선의 쪽지가 자석에 꼽혀있다.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 피우는 그를 노년기에 들어선 아주머니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노골적인 시선에 담담히 응시하자 멋쩍어진 아주머니는 먼 산 바라보듯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거리에 나와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도 그는 계속 머리에 무엇인가 낀 듯한 이물감을 지울 수 없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세상이 어색해 보이고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내가 왜 이러지. 

 혜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불편했던 지난 밤 자리나 고기압 날씨를 탓해 보기도 한다. 버스가 도착해 올라타려는 그에게 순간 대형 광고판이 눈에 띈다. 카우보이 복장에 총을 든 여성 위로 ‘여성의 로망-말보로’라는 카피가 적혀있는 담배 광고판이다. 여성의 로망이라니, 필립 모리스사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건가? 그래도. 그는 세상에서 홀로 낙오되어 간다고 생각하며 광고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는 뒷좌석에 앉아 앞으로 창석과 그의 아내가 될 여자에게 펼쳐질 삶을 상상한다. 자신의 경우를 빗대어 풋과일처럼 설레던 신혼의 느낌을 언제까지 지속시킬 것인지, 그들이 열정을 얼마나 잘 불 태워 올리고 지속시킬 것인지를. 창석의 성격으로 보아 아내가 될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할 것이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창석의 거침없는 성격은 외모와 잘 맞아 떨어지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좋아한다. 항상 연인이 있었고 은근히 상대가 바뀔 뿐이다. 그런 창석을 유부남이라도 가만히 놓아 둘 것인지, 아니 창석이 호색한 기질을 바꿀 수 있는지를. 이 자식 이번에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겠어. 그래도 결혼을 하긴 하는구나. 그는 배시시 웃는다. 

 한 순간 만원 버스로 만들어 버린 고등학생들 때문에 그의 상상은 깨져 버린다. 밤색 교복을 맞춰 입고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모습이 참새 떼 같다. 한 여학생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무료하던 차에 그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너 어떻게 했어? 아니, 그냥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지 뭐. 어머머, 얘가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머 재 좀 봐 재. 그 여학생이 가리키는 곳을 그도 힐끔 쳐다보니 보도블록을 지나 옷 가게 안의 매장 직원들을 가리키고 있다. 재 어때? 재? 누구? 맨 끝에 애? 아니. 가운데 애, 훤칠하게 생겨서 어떻게 저딴 옷을 입을 수 있니? 저건 죄악이야. 죄악. 그는 쓴 웃음을 짓는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욕을 먹고 있는 보도블록을 지나 옷 가게 안, 세 번째 서 있는 매장 청년을 동정하며 괜히 옷깃을 여민다.

 레스토랑에 십오 분 일찍 들어와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서 그는 의외로 아이를 데리고 온 남자들이 많다는 것에 놀란다. 동료의식마저 생기려는 것에 씁쓸해하며 다시 혜선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여전히 그대로다. 예약 석에 앉아 부풀어지는 불안을 가다듬으며 창석을 기다린다. 담뱃불을 끄자 약속이라도 한 듯 창석과 그의 애인이 들어온다. 창석은 대뜸 왜 흡연석으로 잡았느냐며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 올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지. 

 그는 창석의 말을 듣고 보니 실수를 한 것 같기도 해 대꾸도 못하는데 창석의 애인인 여인이 담배를 물며 입을 연다. 이렇게 배려해 주시네요. 이럴 때 담배 피지 언제 피겠어? 그녀는 창석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창석은 한 숨을 내쉬며 굵은 목소리로 그럼 한 대만, 이라고 말하고 다시 그에게 눈을 흘긴다. 그는 십년지기인 창석에게 이런 면이 있는지 의아해한다. 그녀는 ‘경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손을 내민다. 너무도 당당한 경희의 태도에 그는 주눅이 들어 소극적으로 악수를 한다. 

 창석이 그동안 사귀어 온 여성들에 비한다면 경희는 추녀에 가깝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화제를 유도하고 분위기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며 선홍색 퐁보드 소스를 버무린 안심 스테이크와 겨자가 그물같이 쳐진 감자 그라탕, 토마토 곁들인 스파게티가 차려진 식사 시간을 즐겁게 만든다. 흥겹게 웃으며 프로포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그는 요즘 들어 빙퉁그러진 혜선을 떠올리고는 창석을 부러워한다. 

 이 여자가 이제 집에 들어 왔으려나. 그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전화를 거는 것이 못내 분위기를 깰 듯해 가만히 경희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서 창석을 보니 스파게티를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다 입을 가리고 웃고 있다. 그는 창석을 보며 말한다. 너 오늘 왜 그러냐? 속 안 좋냐? 이제 나도 결혼식 준비해야지. 요즘 다이어트 중이거든. 창석의 대답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린다. 아니, 너 갑자기 왜 그래? 남자가 결혼식장에 그냥 들어서면 되는 거지. 살이 얼마나 쪘다고 그렇게 유난을 떠냐. 서글서글 웃고 있던 경희의 눈매가 경직된다. 경희가 창석에게 걱정스럽다는 듯 다정히 말한다. 그래. 이 친구 말이 맞네. 다이어트도 좋지만 먹을 건 먹고 운동하면서 해야지. 그리고 그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일어선다. 

 경희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창석이 그를 쏘아붙이기 시작한다. 너야말로 오늘 왜 그래. 누구 결혼에 초 칠 일 있어? 흡연석으로 잡질 않나. 옛날이야기를 꺼내려 하질 않나. 말조심해. 나 이번에 저 여자 못 잡으면 내 인생 쫑이야. 그는 창석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한다. 이 자식이 나를 놀리나. 하지만 창석의 눈빛은 진지하다. 그는 무언가 심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희가 돌아 온 다음부터 그녀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자리가 되어 버린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워 창석과 함께 가만히 경희의 말을 듣기만 한다. 그러면서 분위기에 맞춰 억지로 웃으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려 한다. 지난 삼개월간 창석에게 무슨 일어났는가, 그때 창석은 변함없는 얼굴로 결혼하고픈 사람을 찾았다며 웃었는데, 혹시 집에 큰 빚이 생겨 돈 많은 이 여인에게 억지로 장가가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영계라며 얼른 시집 들려 하겠지. 그는 신나게 자녀계획을 이야기하는 경희의 말을 끊고 무거운 음성으로 창석에게 말한다. 너희 집에 무슨 큰 일 생긴 거 아니냐? 

 경희가 멈칫, 입을 다물자 분위기는 숙연히 가라앉았다. 창석이 입을 열었다. 일은 무슨 일. 너야말로 오늘 정말 이상하다. 창석과 경희는 멀뚱거리며 그를 쳐다보기만 한다. 

 반지를 맞춰야 한다며 창석과 경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홀로 거리에 서서 수많은 간판을 올려다본다. 머리에 낀 이물감이 더욱 커지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형태를 띠고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이 잠식해 가는 이상한 기운에 현기증마저 느낀다.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자 대기하던 사람들이 도로를 건넌다. 지하철 역 출입구에서 쏟아져 나온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을 쳐다본다. 남자들은 보통 반듯하게 걷고 여자들은 팔자걸음이다. 성인용품을 파는 듯한 가게 유리창에는 ‘남성용도 있습니다.’라고 적혀있고 뷰티크에는 남성정장이 진열되어 있다. 미용실 창에는 남성들이 쪼르르 앉아 머리를 매만져지며-미용사 역시 대부분 남성들이다-지나가는 사람들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내려 보거나 입을 가리고 웃고 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사회적 구분이 뒤바뀐 것이다. 이게 뭐야? 아니 이...이게 어떻게? 

 이물감이 그의 온 몸을 뒤덮는다. 그는 점점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계속 집에만 틀어박혀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을 감지 못 했는지, 지난 밤 사이에 하늘이 열리고 세상이 뒤바꿔진 것인지, 이것이 꿈은 아닌지. 낙하산을 타고 밀림에 떨어져 홀로 숨 가쁘게 헤쳐 나가야만 하는 고독에 몸서리를 친다. 그는 다인의 맑은 눈동자를 떠올린다. 휴대폰으로 혜선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기가 꺼져 있으니... 종료버튼을 누르고 다시 통화버튼을 누른다. 전화기가... 또다시 종료 버튼과 통화 버튼을 누른다.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 미친 이 반복해서 버튼을 누른다. 어떤 버튼을 눌렀는지 그 스스로도 모를 때 신호음이 가기 시작한다. 여보세요? 낮선 남자의 목소리다. 제발. 제발, 누구라도 받아줘. 누구라도 이야기해보고 싶어. 여보세요? 누구세요? 무슨 일이세요? 제발, 끊지 말아줘. 제발.  

 

 전화를 받은 남자는 예전 직장일로 며칠 간 잠시 만났던 소설가였다. 소설가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를 떠올려내고는 무슨 일인지, 그곳이 어디인지 다급히 물었다. 그는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말들을 찾아낼 수 없었다. 횡설수설하는 그를 향해 소설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섬뜩 하시다구요? 전 항상 섬뜩합니다. 그러다가 섬뜩함과 세련되게 지내는 방식을 알게 되었죠. 소설가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라며 담배나 술을 권했다. 그리고 지금 지방에 있어 그 곳으로 갈 수 없으니 다음에. 다음에 제가 한 번 찾아뵙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잡고 기대며 담배를 꺼냈다. 한 개비 피우고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자 술집으로 향했다.  

 낮에는 레스토랑으로, 밤에는 술을 파는 곳이다. 이른 시각, 그가 홀로 들어서서 술을 시키자 주인아주머니는 인상을 찡그리며 구석진 곳으로 안내한다. 그는 이제 그녀의 표정으로부터 재수 없게, 대낮부터 남자가 왠 술이라는 뜻을 읽을 수 있다. 구석진 자리에서 소주를 시키고 마음을 가다듬으려 한다. 시간이 지나자 술집은 사람들로 들어차 북적댄다. 그는 생각에 잠겨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고 담배를 피운다. 시끌벅적, 잔 부딪치는 소리가 뭉그려 들리고 빛은 빻은 듯 가루처럼 그의 눈에 투영된다. 그는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린 남성들이 여성들 사이사이에 끼여 다소곳이 술을 마시고 있다. 정장을 차려 입은 모습들이 회사원인 듯하다. 한 여성이 술잔을 높이 치켜들고 말한다. 이번에 임신하게 되는 우리 후배를 위하여! 그는 사레에 걸려 술을 캑 캑 토해낸다. 임신하게 되는 여성은 침울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잔을 든다. 다른 여성들이 말한다. 야. 그건 여자의 신성한 의무야. 지나고 나면 언제 그렇게 했는지...한다. 어느 남성이 임신하게 되는 여성을 향해 수줍게 말한다.

 선배. 출산권을 받았다는 건 건강한 여성이라는 뜻이잖아요. 처음만 그렇지 다음부터는 순풍, 순풍 낳는다고 하더라고요. 힘내세요. 그는 이런 것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담뱃재를 턴다. 휴대폰은 여전히 아무에게도 연락 오지 않고 테이블 한 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그는 왁자지껄 떠드는 그들에게서 세상의 흐름을 잡아내려 하지만 쉽지 않아 단념한다. 주문서를 들고 계산대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데 누군가 곁에서 그를 부축한다. 많이 취하셨네요. 화들짝 놀라며 누구일까 쳐다보니 조금 전, 그 동문회에서 그를 힐끔 쳐다보며 이죽거리던 여성이다. 그는 부담스러워져 그녀의 품에서 팔을 뺀다. 왜 이러시죠?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택시 타는 데까지 바래다주려고요. 그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 여성은 끈질기다. 결국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와 여성을 쳐다본다. 머쓱해진 여성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소리친다. 이거 미친놈이네. 그 여성이 서둘러 술자리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고개를 돌린다. 계산하는 그를 향해 주인아주머니가 말한다. 그러기에 왜 남자 혼자 술을 마셔.

 그는 굳은 표정으로 황급히 가게를 빠져 나온다. 도시의 소음이 아련히 울린다. 거리가 거대한 물결처럼 뒤틀려져 굽이치고 쏟아져 내려오는 사람들을 그는 거슬러 오르고 있다. 거센 물결을 끊임없이 맞받아치며 중심을 가누려 하지만 못내 전신주를 잡고 구토를 한다. 비릿한 냄새가 속에서부터 끓어오른다. 뿌리 내리는 이물감을 뱉어 내려는 듯 배를 더욱 죄고 눈물을 흘리며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그는 다시 구토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본다. 하늘은 붉은 빛을 띠며 전신주의 전선들로 조각 나 있다.  

 그는 택시 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더디고 더딘 걸음으로, 숨이 막히지만 그래도 앞을 응시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정류장 팻말은 없지만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다. 새로 도착하는 택시들은 속속 한 무리의 여성들을 내려놓고 대기하고 있는 택시들 쪽으로 들어선다. 줄을 짓고 있는 하얗고 까만 택시들이 마치 뱀처럼 보인다. 맨 앞의 택시가 골목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태우고 이탈하면 대기하던 택시들이 흐물흐물 앞으로 전진해 대열을 맞춘다. 그는 꽁무니에 갓 도착한 택시를 타려다가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 앞으로 걸어간다. 갓 도착한 택시에서도 여성들이 내리고 있다. 그녀들은 그의 앞에서 주춤대다 블록과 블록 사이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는 여성들이 들어가는 골목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 우뚝, 멈춰 서 버리고 만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다. 

 정육점에서 본 듯한 붉은 조명, 혹은 수족관에서 본 듯한 파란 조명의 쇼윈도 안에는 하나같이 준수한 청년들이 속옷만 입고 서 있다. 어떤 쇼윈도 안의 남자는 터질 듯한 근육으로 거대한 아령을 들며 창밖을 향해 미소 짓는다. 무언가를 집어넣었는지 성기가 속옷을 찢어버릴 듯 우람하다. 술에 취한 여성들은 풀린 눈을 하고 이 가게 저 가게 눈을 돌리다 호객꾼에게 붙들려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 문에 서 있는 남자들은 손님을 좀 더 끌어 오기위해 굵으면서 감미로운 목소리로 누나. 여기요. 누나. 눈앞에 펼쳐진 이 진기한 광경에 그는 주저앉아 버리고만 싶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아기 옹알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황급히 옷을 뒤지며 휴대폰을 찾는다. 깜박거리는 휴대폰 액정에는 ‘다인이 엄마’라고 적혀있고 아기의 음성으로 전화 받으세요. 전화 받으세요. 벨이 울린다. 그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주저앉는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혜선은 거실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다인은 요람에서 잠든 듯하다. 그는 화가 나 노려보는 혜선에게로 다가가 무턱대고 끌어안는다. 지금이 몇 시야? 아니. 이 남자가. 아휴 술 냄새. 혜선은 손사래를 치며 술 냄새를 쫓아 내려한다. 혜선이 아무 말 없이 나간 일은 그에게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 창석씨랑 무슨 일 있었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잠시만 가만히 있어줘. 촉촉한 눈빛을 던지는 그를 혜선은 가만히 바라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아휴. 우리 다인 아빠 이렇게 취한 거 정말 오랜만에 보네. 곧 혜선은 샐쭉 입을 내밀며 화를 낸다. 그래도 지금이 몇 시야? 

 오늘 하루 종일 악몽을 꾸었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쓰러진다.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며 혜선이 중얼거린다. 아니. 이 남자가. 옷은 벗고 자야지. 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을 느낀다. 부축을 받아 성큼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조금씩 멀어져가는 혜선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보세요? 창석씨?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저 혜선이예요. 다인이 아빠에게...

 

 다인이 아빠. 다인이 아빠. 성당 가야지. 혜선이 내려다보며 그의 몸을 흔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이고 눈을 크게 뜨려 노력하며 시계를 본다. 혜선은 준비해 놓은 꿀물을 내밀고는 총총 화장대로 걸어간다. 그는 곧 노곤한 몸을 일으킨다. 예배, 한 시간 전이기 때문이다. 

 욕실 거울 속에서 면도크림을 솜사탕처럼 말아 올려 턱에 바른다. 차고 부드러운 감촉이 뺨을 자극한다. 유선형의 면도기가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레몬 향을 밀어내고 수염을 깎아낸다. 면도가 잘 되었는지 턱을 들이밀다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그는 고개를 가로 짓다 갸우뚱 얼마 전 이런 똑같은 상황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구름처럼 떠돌던 기억이 그제야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그는 순간 긴장한다. 조용히 움직이며 거울 안에 있는 스스로를 쳐다본다. 어제 일은 이 곳이 아닌 저 거울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아니었을까? 깊은 터널을 통과하듯 밤새 긴 긴 악몽에 시달리다 터널 끝에서야 한 줄기 빛을 타고 이 거울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칫솔을 손에 쥔다. 지난 밤 사이 꾸었던 꿈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무엇보다도 그는 간만에 마신 술로 숙취에 젖어 있다. 

 그는 차문을 열어 다인을 베이비 시트에 눕히고 옆에 앉는다. 운전을 하는 내내 혜선은 초조하게 시계를 훔쳐본다. 어서 욕실에서 나오라고 재촉하던 혜선을 떠올리며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본다. 능선을 타고 산을 반 바퀴쯤 돌기에 돌산과 나무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산바람을 쐬며 그는 정신이 맑아짐을 느낀다. 

 성당 예배당에서는 이미 신부님이 설교하고 있다. 예배에 늦은 그와 혜선은 고개를 숙이고 앉을 자리를 찾는다. 신부님이 원죄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뱀의 간계에 빠져 아담이 하와를 유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유혹은 우리 삶에 있어 항상...

 신부님의 음성을 들은 그가 붙박인 듯 멈춰 선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한다.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기에 신부님인가 확인 하려 했던 것이다. 망연자실해 서있는 그를 혜선이 얼굴 찡그리며 끌어당기고 교인들이 웅성대며 쳐다보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묵묵히 창밖을 응시한다. 혜선도 화가 났는지 아무런 말 없다. 다인만이 창알거리며 허공에서 무언가 잡으려는 듯 손을 휘젓고 있다. 혜선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요즘 우울증이 유행이라는데. 친정에라도 한 번 갔다 오는 게 어때? 그 역시 한숨을 내쉬며 생각한다. 친정, 하긴 마당 정자(庭)지. 

 그는 대꾸 없이 다인을 쳐다본다. 다인이 그를 향해 손을 뻗는다. 얼굴을 들이밀자 다인은 그의 볼을 잡고 간드러지게 웃는다. 눈매가 그를 닮아 순하다. 그는 다인의 눈을 쳐다본다. 그의 근심 한 귀가 두둥실 녹아 내려 순백자에서나 보았던 단아한 빛을 내는 다인의 흰 자위 위로 표류하는 듯하다. 오랜 시간 나무의 진이 엉겨 생긴 호박 같은 눈동자에 그는 애처로움을 느끼며 다인에게 뽀뽀를 한다. 갑작스런 그의 입맞춤에 숨이 막힌 듯 다인이 울기 시작하고 그는 놀라 움찔거린다. 혜선은 애를 조용히 시키라며 신경질을 부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간다. 장난감처럼 조그만 세상이 낮게 깔려 있다. 담배를 물고 쪼그려 앉아 시멘트 조각들을 힘없이 던진다. 늦봄인데도 바람이 거세다. 그는 아찔해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다. 바뀐 건 바뀐 거고. 그래도 인터넷으로 알아봐야겠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그런데 알 수는 있을까? 그는 또다시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이 전부 미쳤다고 말을 해? 아니 내가 미친 게 되겠지. 그럼 아무 말 없이 멍청히 웃으며 이 세상에 적응해 나갈까? 

 그의 우울함에 자학이 더해진다. 현대 세상은 바로 감옥입니다. 예전에 본 어느 철학자의 글귀를 떠올린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고안해 낸 간수 없는 감시의 감옥 파놉티콘, 원형의 감옥 중간에 감시의 탑이 높게 올라가 있고 항상 밝게 빛나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다. 간수가 없어도 죄수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이 감옥을 철학자는 현대 세상에 빗대어 말했다. 권력은 자기 모습을 내보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게 되는 일망감시장치의 구조를 통해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실현하게 된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잔인하게 처벌하는 방법보다 감시하는 방법에 의존한 권력의 전략으로 인간의 육체는 규율에 길들여집니다. 

 그는 그 글귀를 보았을 때 미친놈이네, 웃으며 넘겼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서 육중한 돌들이 떨어진다.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쌓이고 쌓여 거대한 탑을 만든다. 그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탑을 올려본다. 종교에 이를 정도로 치밀하게 재구성된 파놉티콘이 그를 압사시킬 듯 내려 보고 있다. 지금은 단지 탑의 그늘에 서 있지만 앞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그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그는 그늘에서 도망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생각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의 마음 저편에서 울컥, 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내가 원래 가졌던 것이 무엇이었나. 내가 더 이상 뺏길 것이 무엇인가. 그는 서서히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눈앞의 세상을 노려본다. 그늘에서 도망치기만 꿈 꿀 것이 아닌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고 탑을 향해 소리치고 싶어진다. 내려다 볼 테면 보라지. 내려다보면 볼수록 거꾸러지기 쉬우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탑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뜨리는 것이 낫겠지.

 그는 담담히 한숨을 내쉰다. 골몰하는 그를 향해 아찔해져 보이기만 했던 세상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이제 그를 둘러싼 이 거대한 긴장과 어떻게 세련되게 지낼지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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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광덕 2019-11-26 21:28:30
답글

김일영 2019-11-27 06:33:20

    경험이 일천하여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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