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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 그리고 친일파와 빨갱이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9-05-12 17:54:45
추천수 9
조회수   1,154

제목

진보와 보수, 그리고 친일파와 빨갱이

글쓴이

이정석 [가입일자 : 2013-01-27]
내용


진보와 보수 친일파와 빨갱이라는 구분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치열한 이념 구분일 것입니다.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유한국당을 구심점으로 하는 보수를 친일파,


또는 토착왜구라고 경멸하고 보수 진영은 진보측을 향해


빨갱이또는 좌빨이라고 매도합니다.


또한 현 집권세력이 엄연히 영남진보세력 중심인데도


여전히 절라도” “홍어(호남을 비하하는 말)”등의 표현으로


과거 독재정권에서 시도하였던 특정지역 비하의 시각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현 민주당의 근간이 사실상 김대중으로 부터 시작된 뿌리이고


그 뿌리로부터 성장한 가지들로 인해 영남보수 패권의


둑이 허물어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김영삼, 이기택 등의 영남민주세력도 존재 했었지만


김영삼은 호랑이 잡으로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라는 변명을 남기고


보수진영에 투항에 버렸고 2% 이상 부족한 이기택은 하나의 잔가지였을 뿐이기 때문에


결국 영남보수패권 뚝방에 구멍을 내고 둑을 무너뜨린 것은


김대중으로 부터 비롯되었다는 근원적 인식이 깊게 각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19, 전두환 7, 김영삼 5년 등


천년만년 영속될 것 같았던 영남보수정권은


IMF 금융위기라는 변명할 수 없는 실착을 저질러


준비된 대통령의 구호를 외친 김대중에게 정권을 넘겨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국민이 삶을 포기하고


기업들은 강제 구조조정을 요구 당했으며


정경유착으로 부실화된 은행들은 대부분 통폐합 되거나 민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국가부도라는 실착을 유발했으면서도


당시의 보수세력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저변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으로 부터 소박맞은 김종필을 꼬시지 않았다면


그나마도 정권을 잡을 확률이 매우 희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수십 년 간 아웃사이더로 맴돌던 야당이


헌정사 최초로 정권을 획득했고 그로부터 생성된 배경은


노무현과 문재인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영남보수패권에 흠집을 낸 단초와 그 원인제공자인 김대중과 호남은


영남보수세력의 부와 권력을 강탈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남진보세력인 노무현과 문재인이 정권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보수진영이 보는 시각은 김대중의 이념과 사고가 그대로 이어지는


호남정권으로 등치된다고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좌파와 우파,


이러한 분류개념은 프랑스 혁명당시의 왕당파와 혁명파로부터 유래 되었고


그 분류는 대립이 심했던 양측이 서로 같은 자리에 앉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왕을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 몰려 앉은 것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또한 왕에게 하사받은 영지에서 대대손손 부와 권력을 누리던 귀족과


장사를 해서 돈이 많은 부르주아,


그리고 그 밑에서 일하던 하층민과 농민은 서로의 욕구가 달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쟁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땅과 권력은 있어도 현찰이 궁핍한 기득권 귀족과


돈은 많지만 피지배 계급일 수밖에 없는 부르주아는


왕의 의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끝없는 음모와 암투를 지속했다고 합니다.


부르주아는 주로 상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돈을 더 벌려면 새로운 시장의 개설이 필요하고


그 시장의 개설허가는 왕이 최종 결정할 수 있으므로


왕의 환심을 사기위해 엄청난 로비와 뇌물,


또는 선물공세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또한 모든 상거래액의 10%를 세금으로 징수하여


왕권과 왕실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왕은


돈 많은 상인계급인 부르주아와 선대로부터 이어진


공신그룹인 영주들 사이에서 양측의 주장과 요구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의 우측에 앉은 귀족은 우익,


좌측에 앉은 부르주아는 좌익,


, 하나의 날개로는 날아갈 수 없는 새와 같이


프랑스 왕 역시 귀족의 정치적 날개와


부르주아의 경제적 날개를 적절히 사용해야


원활한 국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개를 적절히 조정하고 조절하지


못하면 왕권은 추락해 버릴 수밖에 없고


그 추락은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기인되며


당시의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지는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과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은


선대인 루이 14세의 무분별한 낭비와


목적없는 전쟁, 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남발 및 확장으로 비롯되었지만


결론적으로 양쪽의 날개인 정치와 경제,


그리고 부의 적절한 분배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왕조의 몰락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부의 분배가 얼마나 중요한가? 라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고


물질에 대한 인간 본연의 욕구는 여지없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왕정시대의 기득권과 분배의 모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갈등은 결국 마르크스 사상이 태동되고


똑같이 벌고 똑같이 나눈다라는 구호는


수많은 인민들에게 평등의 개념으로 인식되어 요즘말로


경제민주주의에 해당하는 화두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공산과 공분의 명분은 지배계급에 착취당했던 인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혁명이었고 평등이었고 또한 민주주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산사상은 결국 몰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구를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고와 능력으로 열심히 일해도 분배는 똑같이 받아야 되니


결국 열정과 근면이 사라져 생산성이 갈수록 낮아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산성이 낮아지면 분배의 몫이 갈수록 감소할 수밖에 없어


인민들의 삶은 점진적으로 피폐해져 가지만 이미 기득권의 맛을 향유하고 있는


관리계급은 자신들이 확보하고 누리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왕정시대의 영주계급과 하층민의 구분과 다를 바 없는


사회로 갈 수밖에 없어 민중들은 지배층에 저항하는 세력이 형성되게 되고


기득권들은 그 저항세력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강력한 기관을


운용할 필요성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공산사상은 인간의 욕구에 대한 성찰이


보편타당성의 관점에서 살피지 못하고 매우 표면적인


상대적 비교에서 출발한 일종의 선동에 불과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원천적으로 잉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그대로 이입되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이며 또한 적용되고 있는 중입니다.


현시점 역시 보수층은 진보진영을 좌파또는 빨갱이로 매도하고


진보진영은 보수층을 꼴보 기득권” “친일파로 비하하여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해 버립니다.


 


이러한 대립적 구도의 고착은 미국 시민이었던


이승만이 미국의 대리인으로 정권을 잡게 되고


정권의 핵심요직을 친일파로 채우면서 독립지사들을


대거 제거하고 탄압한 시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또한 스스로 독립운동가를 자처한 이승만이


일제에 부역한 인사들을 정권요직에 임명한 이율배반은


설사 어떤 불가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전제를 감안 하더라도


명백한 정의의 실종이자 자기부정일 수밖에 없는 해괴망측한 망동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이념과 배치되는 마르크스 이념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고


그 이념의 도입 및 주창자가 소련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행적도 그리 뚜렷하지 않은 이승만이


미국의 이념적 설정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전제가 가능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결국 소련의 확장을 저지해야 한다는 명분이 세워지고


그 명분은 정부조직과 통치의 방법을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였던 친일파들을 중용하는 반역적 결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 반역적 결정에 대한 자기합리화는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제조하고 매도하는 공작으로 이어지고


그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는 현재까지도 친일 기득권 세력들이


반대파들을 제거하거나 매장하는 용도로 사용 중입니다.


 


결론적으로 독립지사들에 대한 콤플렉스와


죄의식에 젖어있었던 친일파들은


그들을 견제하고 제거하는 최상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을 좌파


또는 빨갱이로 매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탄압을 받고


또한 목숨까지 잃어버리는 피해를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 전통적이고 효과적이었던 무기는


그들의 후예와 추종자들에게 여전히 절대의 무기로 전승되어


대통령을 비롯한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념적 주홍글씨 매도는


사실상 미국의 전략에서부터 기인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는 우리의 문제일 뿐


미국 국익의 관점에서는 선택의 절대기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미국의 판단과 전략은 이승만과 친일파를 이용하여


소련 세력의 확장을 방어하는 것이 최선의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며


그 목적의 달성은 진보적 좌파였던 독립운동가들을 제거해야


이승만과 친일파들을 수족처럼 이용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또한 미국은 과거나 현재나 자국의 이익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어제의 적도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냉철한 계산을 하는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주만을 폭격했던 일본을 포용하고 남한의 친일파 정권과 연대시켜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는 방어막을 구축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빨갱이공산사상을 추종하는 세력이며,


진보적 좌파였던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의 이익을 좀먹는


잠재적 빨갱이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친일파의 약점을 이용하여 소련의 확장을 저지하고


친일파의 이킬레스건인 일제부역의 콤플렉스를


독립운동가들을 제거할 수 있는 명분(선물)으로 제안하여


이이공이(以夷攻夷)(적을 이용하여 적을 치는 전략)


방법을 사용하여 미국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고 확장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독립지사들이 빨갱이로 매도되거나


철저하게 외면하고 방치하여,


현재까지 빈곤과 차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당시에 밀약된 국내의 친일파와 일본 등이


자신들의 이익을 상호 보장한 밀약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남북을 오가며 통일조국을 추진하던 김구 선생은


육군 포병 장교였던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석달 만에 15년으로 감형되고


불과 1년도 채 되지 못한 1950627


잔여형기 면제라는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였습니다.


임시정부 수반을 암살한 중대범인데도 불구하고


불과 1년 정도의 약소한 처벌을 받고 석방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대낮에 암살하고도


불과 1년 만에 석방되고 군대에 복귀했으며


소령으로 예편 뒤 군납회사를 차려


돈도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가 정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헌법을 비롯한 대부분의 법령이 제정된 법치국가에서


과연 그 정당성을 인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황적으로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는 추정이 100% 가능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단독범이라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이 안두희를 척살한 사람은 전북 정읍출신 박기서선생인데


정의봉(正義棒)이라고 명명한 방망이에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을 새기고


그 몽둥이로 하늘을 대신하여 안두희의 처형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방망이에 새긴 견리사의 견위수명은 안중근 의사가


20대 초반부터 좌우명으로 삼은 문구라고 하며


향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어 전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 역시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배후를 강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그야말로 뻔할 뻔자이지만 현재 이 시점까지도 그 배후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냈던 장준하선생의 죽음 역시


충분히 그 배후가 의심되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로 남아있습니다.


박시서 선생은 안두희 척살 재판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흉악범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라는


판결문과 함께 3년을 선고 받았으나


김대중 정권 때 3.1절 특사로 석방되어


실제 수형기간은 16개월 정도라고 합니다.


재판부 역시 박기서 선생의 살인의 정당성을


완곡하게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반미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앞, 뒤 정황을 살펴 볼 때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그렇게 얼토당토한 일이 벌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충분히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당시의 치열했던 냉전구도에서


대부분 좌파였던 독립지사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소련의 확고한 지지를 확보한 김일성 세력들과


언제, 어느 때 연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김구선생은 남북을 오가면서 통일국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여운형이나 김원봉 선생 등도 그러한 사고의 범주에서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김구 선생은 남과 북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거목이었고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리더였기 때문에


친일파 입장에서는 상징적 인물인 김구의 제거 이유가 명백해졌을 것입니다.


미국의 셈법 역시 그러한 잠재적 좌파의 발현을 막는 선택이


최선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실 김구 선생은 보수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을 뿐


급진적이거나 좌파는 아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민족주의자이자 전체 독립운동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김구 선생이 어떤 선택을 할지


미지의 불안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미국의 전략은 패전국 일본을 회유하고 당근을 제공하면서


일본을 강력한 우군으로 전환시키게 됩니다.


또한 남한의 친일파들을 발탁하고 중용하여 일본과 연대하고 만들고


그 세력들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중국, 북한을 견제하는 전략을 수립한 것입니다.


그래서 친일파들은 이승만 정권부터 독립운동가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빨갱이는 소련의 대리인 북한의 이념을 추종하거나 실현하는 역적이므로


무조건 색출하여 처단해야 한다는 사고가 오늘날 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친일파들의 빨갱이 딱지6.25 전쟁으로


그 명분이 훨씬 더 확고해졌고


군사독재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고 정적을 제거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방법 또한


빨갱이 딱지 붙이기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뇌된 수구들은 여전히 현재까지도


친일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해하거나 대치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좌빨또는 빨갱이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 태극기 부대가 태극기는 물론, 성조기까지


휘두르고 빨갱이를 녹음기처럼 합창하는 것을 보면


일반적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해방 전후의 상황과 미국의 셈법까지 고려할 때


그 배경과 현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자유한국당의 본질과 태극기 부대로 대변되는


극우들의 행태를 보면 미국이 의도했던 전략이


그대로 유지되고 표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냉전시대 미국이 극도로 경계했던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고 빨갱이역시 이승만 정권이


독립지사들을 탄압하고 매도했던 주홍글씨나 다름없었는데


이러한 행태는 당시 미국이 요구했던 의도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제시대를 주권을 말살한


침략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선진문물을 선물한 우방국으로 인식하는


반민족적, 반역사적 인식을 고집하고


고착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미국과 일본, 그리고 친일정권의


이익구조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본 역시 자신들의 논리를 수용하고 긍정하는 친일세력들로 인해


침략과 침탈이라는 부채의식에서 상당부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온갖 이익과 정보를 제공하고 공생공사를 도모했을 것입니다.


친일파들 역시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 하고


보장된 기득권을 손상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없는 빨갱이도 제조해 내야하고


그렇게 제조된 빨갱이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제거해 나갔던 것입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진보를 추구하던 좌파들 이었습니다.


지도층을 제외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노동자, 소작민 등의


하위계층이며 기득권에게 수탈되는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들이 파악한 공산주의공산과 공분


전제되었으므로 피지배계급으로서는 당연히 선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동조하고 협조한 친일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자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에


심리적 반발로 좌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와 현재의 이념판단의


가치관이 동일하게 재량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상(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또는 양반과 상놈,


그리고 지주와 소작인 등)을 비추어 볼 때 공산공분


개념적으로 正義로 인식되었고 또한 평등이었으며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수많은 지식인, 청년,


그리고 하층민들의 환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의 자유시장경쟁 이념과


소비에트 연방을 중심으로 추구하던 공산사상


어느 주장이 더 우월한 이론인지 결말이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교할 근거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선택은


마치 밥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국수를 먹을 것인가?”라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파는


이념적으로 보수적이고 국수적이며 전통과 자유를 중시하고


좌파는 개혁적이고 평등을 추구하며 변화와 분배를 중시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개념으로 분류하면 민주당은 개혁적 보수에 가깝고


자유한국당은 수구 또는 극우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집단입니다.


그 이유는 보수의 기본 덕목인” “도덕과 윤리는 물론,


상당부분에서 법치를 따르지 않거나 깔아뭉개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전통은 근간 자체가 친일파, 또는 군사독재 문화에 젖어있어


순리와 타당성 보다는 명령과 강압, 또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조직논리로 손쉽게 이득을 취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편타당한 관점에서 자유한국당의 전철을 살펴보면


철저하게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에 불과한 이념집단일 뿐입니다.


 


전기한 바와 같이


미국이 이승만의 뒷배를 봐주고


친일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제거하거나 탄압한 것은


당시에 확산을 거듭하던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합니다.


물론 독립지사들이 좌파적 사고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들 모두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조선의 지주계급과 친일파들이 독차지했던


기득권의 해체 내지는 평등한 분배가 주된 목적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특히 공산사상에서 요구하는 전체주의가 자신의 생각과는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을 차지한 김일성이 불과 33살의 애송이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김일성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그 행적도 불분명했고 빨찌산 계열인 김일성과는 교류도 많지 않아


상호 공유할 수 있는 접점도 크기 않았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좌파적 사고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공산사상을 추종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독립군의 계급의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장유유서


의식이 엄격했던 상황에서 대부분 자신보다 아랫사람인 김일성을


리더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부 인사가 김일성 정권에 들어갔다가 대부분 조기에 숙청되고 말았는데


조선의 레닌이라고 불렸던 박헌영 조차 미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약산 김원봉 선생 역시


결국 숙청되어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남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고 활동한 남로당 출신 인사들도


대부분이 숙청되거나 처형되었는데


한결같이 미제 스파이라는 죄명이 씌워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같은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김일성과 같은 빨찌산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해방정국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사회였습니다.


우익과 좌익,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 등의 대결구도에서


어느 진영인가는 선택해야만 하는 강요를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파 민족주의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이미 진작 우경화로 기울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좌파 민족지도자들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군정과 친일파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좌파들을


인정사정없이 잡아들여 처형하거나 수감시켜 버렸습니다.


이때 가장 악명을 떨친 인간이 악질 친일분자 노덕술이었고


노덕술을 배후에서 지원한 배경은 대통령 이승만 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이승만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지정하고자 하는 인간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친일파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친일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그 친일은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반역자였으므로


그 죄의식과 심리적 콤플렉스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를 부정해야 했으므로


뉴라이트 교과서를 통해 또 다른 친일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불끈불끈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과연 正義란 무엇인가!


인과응보는 실제 작동하는 것일까?


사필귀정은 언제 어느 때 적용 되는 것인가!


 


지도자의 무능은 실로 엄청난 피해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격랑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 격랑에서 헤엄을 치고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손을 내밀어 구조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물에 그대로 운명을 맡겨 흘러가 버릴 것인가?


그리고 물길에 흘러가다가 나뭇가지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


 


역사란 결과론이고


그 결과를 절대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을 복기하고 되새길 필요는 분명합니다.




좌파와 우파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다보니

당연스럽게 해방정국의 상황이 대입될 수밖에 없고

그 상황에서 무엇인가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참 가슴 아프네요.



좋은 분들은 좋은 분대로...

나쁜 놈들은 나쁜 놈대로....

또 그 사이에 끼었던 민초들은 민초대로.....

......!

그것이 삶이고

또한 역사인듯 싶습니다.



그냥 제 생각대로 휘갈겼으니

제 나름의 상상과 의도가 섞였을 것입니다.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참작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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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운 2019-05-13 13:07:33
답글

잘 읽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이 떠오르네요...^^

이정석 2019-05-13 19:48:04

    지루하셨을 겁니다.
주절대는게 제 특기니까요^^

김승수 2019-05-13 18:06:17
답글

글이 길어 대강 문맥 정도 읽었습니다만 , 사회주의 소멸된지가 언젠데 아직 저러고들 있는지 착찹합니다 .

이정석 2019-05-13 19:50:30

    사회주의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었고요
해방정국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꼴보들의 이념 덧씌우기의
문제에 대해 제 나름의
생각을 쓴 것 뿐입니다.

김경태 2019-05-19 22:41:26
답글

그런데 오류가 엄청많은것같군요 물론 맞는말도 많습니다
여기방에서는 균형잡힌 글을 보기가 힘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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