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5.18 소식을 처음 접한 건 TV와 신문이었습니다.
당시 기억으로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군대와 시민이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전두환이 세상을 통제할 때라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하지 못할 때였고
신문과 방송은 전부 신군부가 장악을 하고 있어서
무엇이 진실인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깜깜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집은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를 구독할 때였는데
모든 신문이 "시민 폭동"으로 기사를 내보냈고
TV나 라디오 방송 역시 똑같았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세상 물정에 대하여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때여서
광주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5.18에 대한 진실이 전혀 보도되지 않는 상황이니
일반 국민이 그 배경과 참상을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집안에 전두환과 아주 가까운, 아니 매우 밀착한 친척이 있었는데
그 친척 때문에 어머니는 박정희나 전두환 욕을 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셨습니다.
당시 전두환과 얼마나 가까웠는지 웬만한 장관쯤은 눈길도 주지 않을 정도로
세도가 막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저희 친척 중 한 명이
자유 한국당에서 제법 뉴스를 뽑아내며 존재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용암처럼 뿜어져 나왔기 때문에
아무리 언론을 통제한다고 하더라도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공유하는 문제여서 항상 마음속에는 그 울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광주문제가 발생한 25일 후 약 2주간 예정으로 광주를 방문하였습니다.
친척 형님이 광주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안위도 궁금하기도 했지만
다른 여러 볼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주를 가본 적은 있었지만 아주 오랜만에 가보는 곳이어서
일단 전남도청 근처 불로동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인근에 있는 전남도청으로 나가보니
도청의 벽은 온통 총탄 자국으로 패어있었고
아스팔트 바닥은 뻘건 핏물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당시의
참상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도청 옆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해태제과와 롯데제과 광주지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거의 모든 유리창이 박살 난 채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식당 아주머니에게 "왜 저렇게 유리창이 깨져있어요?"하고 물어보니 ‘
‘아이고 말도 마쑈, 완전 전쟁판이었당께’
‘안 겪어 본 사람은 절대 절대 모를 것이여 잉’
‘내가 안 죽고 산 것도 다행인디 먹고 살랑께 어쩔 수 없이 이 짓이라도 해야 될 것 아녀’
그러면서 붉어지는 얼굴에 금방 눈물이 눈에 가득 고였습니다.
"어쨌던가 산 사람은 살아야 헝께 어서 밥이나 많이 자셔 잉?"
아주머니는 할 말은 많은 것 같았지만 이내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말대로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밥맛이 제대로 날 리가 없었기 때문에 대충 허기만 때우고 전남대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전남대 병원에는 친척 누님이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지금같이 휴대폰이 보편화되지 않을 때라 연락이 참 어려워 안부를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누님의 첫마디는,
"서울에서는 어때?"
"뭐가?"
"아니 이번 광주사태를 서울 사람들은 뭐라고 하냐고?"
"그냥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하던데?"
누님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아이고 여기는 전쟁통이었어, 그리고 우리 병원은 매일매일이 초상집 같아"
실제로 병원의 대기실이나 진료실, 또는 ICU, 수술실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과 한숨과 안타까움을 안고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진료를 받는 사람이나 가족들도
똑같이 공감하는 눈물과 한숨으로 유가족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조선대 병원이나 기독병원도 거의 똑같았습니다.
당시 사망한 사람들은 이미 장례를 치렀지만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 가족들은
여전히 그 고통과 아픔을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39년이 흐른 현재까지 그 고통은 지속되고 있을 것이며
영원히 그 아픔은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의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장애나 후유장애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형님을 만나 저녁을 같이했습니다.
키가 자그마하고 야무지며 항상 웃음 띤 얼굴이 특징인 형님의 인상은
우리가 평소 알던 그 분위기를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뭔가 분노하고 지긋지긋하고 허탈한 심사가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님은 군의관으로서 5.18 사망자의 검시를 주로 맡았는데
총상이 제일 많고 대검 등에 찔려 사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가 5월 중순이었으니 사체는 사망 직후부터 급속하게 부패가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 사체들을 검시한다고 하니 리어카, 고무통, 가마니, 이불, 비닐 등에
둘둘 말아 싣고 왔는데 유가족의 통곡과는 별개로
시체 썩는 냄새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퇴근을 하면 가운은 모두 소각하고 몇 번씩
비누질을 해서 샤워를 해도
온몸에서 사체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래서 안티프라민을 몇 개씩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수시로 코밑에 발랐는데 하도 발라대니 코밑이
벌겋게 헤어져 버렸다고 허~허 웃었습니다.
그 이튿날 전남대와 조선대를 방문하였는데
지금도 매우 선연하게 남아있는 이미지는 소주병과 담배연기,
그리고 학생들의 허탈한 눈동자였습니다.
전남대나 조선대 모두 예외 없이 수많은 소주병이 곳곳에 쌓여있었는데
5.18로 인해 학우들은 물론 가족을 잃은 슬픔을 소주로 달랜 흔적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습니다.
또 하나는 대부분 학생들의 퀭하고 허탈한 눈동자였습니다.
마치 영혼의 일부분이 소실된 것 같고 울분 끝에 생성된
극복하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그대로 배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캠퍼스 중간중간 잔디밭에는 수십 명의 학생들이 앉아있었는데
한꺼번에 피워대는 연기가 마치 봉화불 올라가듯 하늘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담배연기는 당시 광주 사람들의 한(恨)의 입김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이 방문 일정 속에서 만난 소설 같은 인연도 있었습니다.
J로 시작하는 어느 기관의 비서로 재직하고 있는 아가씨였는데
첫인상이 매우 활달하고 호기심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상관을 만나러 온 사람에게 다짜고짜
"어디서 왔어요?"
"네 서울에서 왔습니다"
"뭣땀시 오셨능가요?"
"아, 예 그냥 이런저런 일로 잠깐 뵈로 왔습니다"
"오~ 그래요 잉, 그래도 서울서 오신 양반인디 우선 목이라도 축이셔요"
하면서 박카스 한 병을 불쑥 내밀었습니다.
지금이야 서울이나 지방이 별로 시공간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방 사람은 서울을 선망하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에
제가 서울 사람이라는 것에 일단은 환대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쨌건 간에,
그 기관장을 만나고 나오니
아가씨는 따뜻한 녹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비도 겁나게 옹께 뜨뜻한 차라도 한 잔 드시고 가셔요^^"
"아, 예 감사합니다"
차를 마시고 있는 사이 기관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이 저의 가슴 가운데를 쿡! 찔러버렸습니다.
"어이, 미스터 리, 오늘 비도 겁나게 옹께 우리 미스 J랑 재미난 얘기 많이 허고 놀다 가 잉?"
"나는 저녁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네"
나는 솔직히 첫인상이 매우 좋았던 J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차라
그 호탕한 기관장의 말 한마디에 큰 핑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아 네, 우산도 없고 큰일 났네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또 뵙겠습니다"
"응 그려 그려, 청춘 때는 신나게 놀고 즐겨야 나이 먹어 후회를 안항께
오늘 좋은 시간 가져봐 잉?
"글고 우리 미스J 진짜 괜찮은 여자여^^"
기관장이 퇴근한 이후 호기심 가득한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거의 1시간 남짓이나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7시쯤 거리에 나왔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는 양동이로 들어붓듯 쏟아지고 우산은 없고 참 난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미스 J의 손바닥만 한 양산을 얻어 쓸 수밖에 없었지만
하반신은 금세 빗물로 흠뻑 적셔지고 말았습니다.
크기가 작은 여자 양산이 겨우 머리와 상반신 일부만 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폭우가 쏟아지는 객지에서
첫눈에 호감을 느낀 여자와 양산을 쓰고 가는 심정은
한마디로 달달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설렘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이심전심이었을까요?
수줍음이 많고 조심성 많아 소심한 저에게
"이것도 인연인디 요~오기 가서 맥주나 한잔 하실라요?"
하이고~오!
이게 웬 떡인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처럼 응답했습니다.
"아~하! 맥주 그거 좋지요‘
‘저도 이제 숙소 들어가면 할 일도 없는데......"
저는 그녀의 단골집이라는 반 칸막이가 있는 맥주집으로 갔습니다.
500cc 2잔을 마실 때쯤,
한국인 특유의 상대 신상 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향, 나이, 학교, 부모님, 취미 등 등 등.....
그리고 자연스럽게 5.18 문제로 이야기가 전이되었습니다.
미스 J는 천주교 신자인데 오빠가 5.18에 참여하여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 중이지만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겪었던 5.18 현장의 모습을 눈물 반, 한숨 반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러면서 "김대중 선생님도 끌려가셨는디 경상도 세상에서
전라도가 워찌 해 볼 방법도 없는 것 같다"라는 자조 섞인 한숨도 내쉬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이 밝고 활달한 이 아가씨는,
"과거는 과거고 현실은 현실잉께 그래도 힘차게 살아야 죠 잉?" 하면서
맥주잔을 들어 짱! 부딪치고 건배를 외쳤습니다.
5.18을 근래에 겪은 광주의 침잠된 분위기와
폭우 쏟아지는 객지의 밤에 호감 있는 아가씨와의
술자리는 여러 가지 느낌이 복합적으로 차올랐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그녀도 취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술기운에 발그레 해진 그녀의 모습은 참 이뻐 보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저는 그녀의 강력한 기습을 받았습니다.
"우리 키스할래요?"
"?!!!"
"싫으면 할 수 없고...."
그녀는 탁자에 팔꿈치를 딛고 맥주잔을 한 손에 든 상태로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그, 그, 그~을~쎄요......!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저는 그 기습이 내심 원하고 반가왔으면서도
솔직히 많이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남자이고 술기운이 온몸에 퍼져있는 상태라
그녀의 당돌하고 도발적인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암암리에 모종의 구상과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남자의 마음은 거시기거시기 하니까요^^
우리는 마주 보고 있던 자리를 한자리로 합쳤고
주위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이빨이 빠지도록 키스에 몰입하였습니다.
문제는 밀폐된 장소가 아니고 반 칸막이가 된 곳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이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소동이 벌어져 버린 것입니다.
솔직히 되게 당황스러웠고 어떤 봉변을 당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앞, 뒤, 전, 후 테이블의 사람들이 전부 일어나서
"야! 보기 좋다. 끝내 준다"라면서 박수를 쳐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를 합창하고
그 합창은 이내 홀 안을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연은 다른 테이블의 생일 축하 파티였는데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연결시켜 축하송을 불러준 것이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열렬한 키스 현장을 들켜버린 게면스러움도
화통한 광주 사람들의 축하로 인해 자연스럽게 소실되어 버렸고
서로 맥주를 시켜주는 화기로운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또한 맥주집 사장님도 공짜 맥주를 한잔씩 전부 서비스하고
노가리나 과일 안주도 전부 서비스로 제공하는 인심 폭격을 퍼부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에서도 5.18로 인한 처연한 분위기는 여기저기에서
배어나고 있었는데 그 소설 같고 영화 같은 느낌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련하고 선명한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맥주집을 나오니 11시가 이미 넘었고 사위는 깊은 어둠에 잠겨있었습니다.
아직도 가는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는 거리는 가로등 불빛과 함께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는데 불과 한 달 전 그 치열한 참상이 벌어졌다는 것이
잘 실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망각이라는 공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맥주집에서 익을대로 익어져 버린 그녀와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반 연인처럼 가까워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이심전심의 마음이 되어
소주 2명과 오징어포를 사서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세상은 누가 누구를 데려오던 좁은 창문으로 긴밤? 짧은 밤? 만을 확인하고
비용 결제를 위한 대화를 할 뿐이지만,
그 당시는 그러한 문제에 거의 무개념일 때여서 손님의 대소사에 이것저것
관여하는 일이 다반사 였습니다.
특히 장기투숙이거나 단골손님의 경우,
거의 같은 식구 개념으로 관리(?)를 해주었기 때문에
2주 숙박을 예약한 저는 이미 한식구의 개념으로 관리대상이 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아니 아침에는 혼자 나가더니 밤이 됭께 아가씨랑 같이 오는구만 잉?"
"애인이여?"
60대 주인아주머니는 둘을 번갈아 살펴보며 물었습니다.
"아~네~ 친구......ㅎ ㅎ"
"응 거시기~ 친구가 애인이고 애인이 친구지 뭐, 암튼 비가와서 쌀쌀헝께 어여 들어가"
사실 그날 미스 J와 숙소까지 같이 동행한 것은
꼭 남녀 간의 섹스를 전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날 서로의 첫인상에 호감을 가졌고
또 구두와 하의를 흠씬 적실 정도로 폭우가 쏟아진 거리를
작은 양산으로 인해 밀착하여 걸으면서
이미 체온으로 화학적 교류가 이루어진 것과
맥주집의 키스로 인해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져 버린 것입니다.
또한 5.18로 인한 도시 분위기가 워낙 침잠되어 있었고
그녀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고 싶은
심사가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우리는 옷도 벗지 않은 상태로 새벽 4기까지 술을 마시며
세상 이야기, 집안 이야기, 취미 등 등을 얘기했습니다.
만난 지 불과 하루도 되지 않은 낯선 남녀가
마치 오랫 동안 사귀었던 친구나 연인같은 사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쨌거나 불 튀기는 청춘남녀가 여관이라는 공간에 같이 있었다는 것에
그 예후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날은 그런 분위가 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익숙하고 오래된 연인 같은
상호 간의 공감 때문에 섹스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날 이후로 J와는 거의 매일 만났습니다.
무등산도 가고 신양 호텔의 커피도 마셔보고
충장로의 서점도 같이 가고......
그리고 약 열흘간 거의 매일같이 제 숙소에 다녀갔습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그녀의 품속에서 행복한 시간도 가졌습니다.
제가 서울로 떠나던 날.
J는 손목 묵주와 묵주 목걸이를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예쁜 포장지에 손수건과 편지까지 싸서 제 손에 쥐어줬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 마음을 참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녀는 첫날 만난 것과 같은 짙은 자줏빛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지금도 그 예뻤던 모습이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후 약 1년간 우리는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지방으로 전근을 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뜸해지고 자주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멀어지면 몸도 멀어진다"라는 속담 대신,
"거리가 멀어지면 몸과 마음도 멀어지게 된다"라는 것으로 대치되더군요.
1980년 여름에 겪었던 광주 분위기,
그리고 5.18로 인한 후유증이 그대로 침잠되어있는 곳에서 만났던
먼 추억 속의 J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살고 있는지
5.18 얘기만 나오면 동시에 오버랩되어
넉넉하고 화통했던 그녀의 성격과 부드럽게 물결치던
자줏빛 원피스가 자동으로 연상됩니다.
각설하고,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전두환과 가까운 우리 친척.
얼마 전 만나보니 요즘 태극기 부대와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똑같은지
상호 이해할 수 있는 간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광주사태는 불순분자가 국가전복을 위해
일으킨 폭동이고 그 주범은 김대중이다’
그러면서 ‘너도 빨갱이들 하는 소리에 물들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래이!’
‘인자 봐라, 광주사태는 역사가 증명할끼다. 그런 증거가 수도 없이 많다’
저는 당연히 듣기도 싫고 대꾸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도 않고 얘기하면 싸움 나니까 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하~ 이눔아 이거 나이 헛먹었네. 그리 세상 물정을 모리나?’라는
핀잔이 바로 연이어 꽂힙니다.
현재 이 친척은 주위에 온통 태극기 부대에 휩싸여 살고 있다 합니다.
주로 퇴역 군인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하는데 거의 90%가 영남 출신이랍니다.
그러면서 ‘문재인이 물러나면 다시 정권 잡을낀데 그때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니까 건강해야 된다’ 라면서 매일 모여서 운동에 집착한다고 합니다.
저희 친척이 올해 82살인데......
근데, 팔 굽혀 펴기를 400개씩이나 한다고 하네요?
100살까지 살랑가 모르겠지만 그 인간들 정권에 대한
집착은 대단히 지독하고 집요한 것 같습니다.
허긴 이승만은 제외하더라도
박정희 19년, 전두환 7년, 노태우 5년, 김영삼 5년,
이명박 5년, 박근혜 4년 등 1960년부터 45년을 통치하고
그 통치기간 동안 영남사람들이 독식하였던 권력기관과
그로 인해 파생되었던 이권과 정보 등은 이 나라를 기득권과
수탈민으로 양극화하는 괴물 구조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또 하나,
영남 사람들의 권력욕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영남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김대중입니다.
그러나 윤보선과 최규하는 정식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었으므로 비 영남 출신은 오로지 이승만, 김대중 밖에 없습니다. 노무현이나 문재인 역시 영남사람이니 이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영남 독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48년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 현재까지 72년이 흘렀는데 영남 사람들이 집권한 기간이 51년이 됩니다.(비 영남출신 대통령 집권기간 - 이승만 13년, 윤보선 2년, 최규하 1년, 김대중 5년) 그런데 김대중, 윤보선을 제외한 대통령이 전부 보수진영이니 이승만을 포함하여 영남을 주력으로 하는 보수세력은 72년 중 무려 64년을 집권한 것입니다. 이 보수 집권 동안 영남사람들은 일종의 특권계급을 부여받은 거나 다름없었고 온갖 이익 정보를 독식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기득권 방벽을 세운 거나 다름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제가 예전에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살다가 압구정동 한양아파트로 이사했고 나중에 대치동으로 이사했는데 이때만 해도 영남사람이 강남에 사는 비율은 평균 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이후 소위 강남 3구에 엄청나게 영남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복덕방 주인도 대부분 영남사람들이 차지할 정도로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이것은 미래의 강남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식으로 공유하여 주변 사람들을 몽땅 끌어들인 결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현재 영남세력을 중심으로 기득권 세력들이 차지한 모든 권력(군, 검, 경, 언론, 경제 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합니다. 자신들의 허튼짓으로 권력을 잃긴 했지만 혹자는 여전히 ‘70%의 권력은 보수가 차지하고 있다 ‘라고 평가합니다. 그만큼 진보의 벽은 얇고 권력 세포의 수는 형편없이 적다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사고하는 방향은 일반 국민들과는 전혀 각도가 다르고 또한 지향점도 다릅니다. 다만 권력이라는 방패가 있어야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고 또한 새로운 먹이를 쟁취할 수 있는데 권력을 뺏긴 상태에서는 예전의 군림이나 영화를 누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떤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권력을 다시 찾으려고할 것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위치에서 군림하였으니까요. 그래서 보수들이 진보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부분 ’ 비하적‘이거나 또는 자기가 데리고 있던 직원을 대하듯 하향된 시각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예 버릇이 되어 있습니다. 한 예로 노무현이 시도했던 "검사와의 대화"가 그러한 집단의 대비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저들의 심리나 사고의 일단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도 있고 작금의 자유한국당의 행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기한 바와 같이 영남세력들이 독식한 권력에서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김대중’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구조를 빵꾸 낼 가능성이 있는 ‘김대중’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익구조의 연합체인 영남세력은 호남세력을 탄압하고 비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구조에 심각한 구멍을 낸 일종의 반동, 또는 폭동으로 폄하하고 왜곡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산업화 시대에 기성세대로 살았던 60대~70대에 그대로 세뇌되어 어떤 일이 있어도 호남세력은 배척해야 될 이민족같이 취급하는 심리가 공유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전라도’ ‘홍어’ ‘좌빨’ 등의 비하된 표현은 어떻게든 빨갱이로 몰아 없애버리고 싶었던 ‘김대중’에 대한 표현과 다름없으며 김대중이 이 세상에 없는 지금에서는 호남인 전체로 그 표적이 옮겨간 것입니다.
사실 산업화 시대 이전 영남은 참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반대로 호남은 농자천하지대본 시대에서 서울 다음으로 풍족한 곳이어서
‘옛날 부자는 호남 출신이 많다 ‘라는 말도 전해집니다.
1922년 통계를 살펴보면,
당시 남북한 인구가 약 2,000만 명이었는데
한강을 기점으로 남한 1,200만 명, 북한 800만 명 정도였습니다.
남한 인구 분포를 보면,
1. 서울 30만 명
2. 영남 375만 명
3. 호남 430만 명
인구는 호남이 많았지만 영남은 호남에 비해 면적이 1.5배 넓습니다.
그러나 영남이 땅은 넓지만 농지가 적고 산야가 많기 때문에 참 먹고살기가 어려운 동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영남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면 ‘관리’가 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학동을 가르칠 수 있는 서당을 많이 개설했는데 그 학동(學童)의 또 다른 표현인 ‘文童’이 ‘문둥이’란 말로 비하되어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문동’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문둥이’는 ‘文童’의 비하된 표현이거나 지역의 방언일 수도 있지만 ‘학동’과 같은 의미라고 본다면 영남지방에 유독 서당이 많았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려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보면 영남은 현재 약 3배가 증가한 1,350만 명으로 인구가 증가되었고 호남은 여전히 430만 명으로 묶여 있습니다. 산업생산량은 말할 것도 없이 수백 분의 1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비교불가이고요. 그렇다면 호남의 그 인구는 다 어디로 가고 영남은 왜 그렇게 늘었을까? 하는 일반적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호남에는 산업시설이 철저히 배척되었기 때문에 지역 자체에 먹고살 것이 별로 없어 서울, 부산, 구미 등으로 대거 이주한 것이고 반대로 영남은 산업시설이 우후죽순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타지역의 유입인구가 대폭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TK의 토착민 비율(3대 이상 거주)은 약 55%이고 PK는 40% 정도입니다. 그러나 호남의 토착민 비율은 약 85%입니다. 외지인 유입율이 15%라는 것인데 농사 외에는 먹고 살 것이 없으니 다른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적을 수밖에 없어 토착민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결과는 영남지방에 거주하는 호남 원적자는 약 25% 정도 차지하고 서울, 경기는 약 30%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기아타이거즈가 전국구 인기구단이 된 요인도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스포츠 선수들을 비교해 보면 최용수(고흥), 정우람(전남) 양준혁(해남), 이승엽(강진) 등 이 아주 어릴 때 영남지방으로 이주했거나 현지에서 출생한 경우에 속하지만 부모의 원적지를 따져보면 전부 호남 출신들입니다. 그만큼 영남을 비롯한 수도권에도 호남 출신들이 많이 이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단어로 함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글을 쓰다 보니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고 자꾸 다른 가지로 뻗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나 근거적으로 명확한 사실관계가 확립되어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도대체 왜 보수 세력들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하하고 억지 주장을 일삼는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그 근저를 파헤쳐 보면 제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5.18로 인해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이 훼손되고 시민저항을 불러왔으며 그 불길은 6.10 항쟁으로 이어졌고 ‘김대중’이라는 비영남 출신 대통령을 탄생시켜 자신들의 이익구조에 심각한 구멍을 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5.18은 부정하고 폄하하고 싶은 심리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명백히 영남 출신임에도 ‘전라도’라는 주홍글씨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김대중’으로 대표하는 ‘호남 진보세력’이 영남 진보세력으로 이어졌다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무현, 문재인은 영남사람이지만 사실상 호남정권의 연장선상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5.18은 어떻게든지 부정하고픈 심리가 그들의 기저에 깔려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6차례의 국가 조사와 수차례의 군대 조사, 각종 증거 등을 종합하면 북한군 침투로 인한 국가전복이라는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5.18 관련법에 동의한 것이며 마지못해 그 법령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친척을 포함한 극우들의 가슴은 여전히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누렸던 각종 특혜와 권력 향유 등은 마약보다 훨씬 강력한 향수이자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시작하다 보니 어느새 4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네요.
그냥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에 분통이 터져 글을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너무 방만해져 버렸습니다. 제 개인의 생각이라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