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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보내드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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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 11:5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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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보내드리고..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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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연 [가입일자 : 2014-08-08]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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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19 : 00 경 병환으로 사투를 벌이시던 아버님께서,
향년 85 세 로, 한많은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뒤로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언젠가는 내게도 이런 날이 찾아올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어, 입관절차중에 수의를 입으신 아버님 몸에 손을 얹으니,
그동안 아버님께 못되게 굴었던 생각만 떠올라,
다 말라버린줄 알았던 내 눈속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디에 그 많은 눈물이 고여있었던지.. 정말 펑펑 울었습니다.
제 조문객들은 얼마 되지않았지만,
교사로 퇴직하신 형님과 대기업에 다니는 동생의 인맥이 엄청나더군요.
끊임없이 몰려드는 조문객들을 맞아 수백번의 절을 하고, 식사자리로 안내하는데,
눈코뜰새가 없더군요.
온몸에 감각이 없을정도였지만,
이게 다 내아버지께 저지른 불효의 댓가려니..
그저 눈물만 흐릅니다.
화장장에서 숯덩이처럼 조각조각 부서진 아버님의 유골이 담긴 상자를 보여주더니,
다시 들어가 한줌의 재가 되어 유골함에 담겨져 나오는데,
또 다시 울컥합니다.
결국 마지막엔 이리 한줌의 재가 되버릴 인생인데,
나는 무얼 그리 아둥바둥 많은 욕심과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았을까?
참 부질없고 덧없고 무상합니다.
무사히 장례를 마치고,
어제, 아버님을 모신 추모관에 가서 삼우제를 지내고 왔습니다.
이제 아버님은 다시는 못 볼 먼나라로 가셨고,
나 또한 언젠가는 그 뒤를 따르겠지만,
그래도 목숨이 붙어있는 이 사람은,
남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또 이 이승을 부지런히 헤집고 다니겠지요.
"아버지!
부디 이 세상의 나빴던 기억은 모두 잊으시고,
저 세상에선 좋은 기억만 간직한채,
편히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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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창연 |
2018-12-22 11:3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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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종님.. 원래 내면의 얘기는 하기 어려운건데,
솔직한 심경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도 제 내면의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수종님의 글을 읽으니, 마치 제 아버지 얘기를 하시는듯 판박이 입니다.
어쩌면 그리도 비슷할까..
저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 맏이로 태어나,
국민학교 다닐적엔 항상 1등만 하실정도로 머리가 좋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서 중학교를 보내지 못해,
반평생을 할아버지를 봉양하며 농사일을 하셨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저희 7남매의 교육을 위해,
도시로 이사가자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경기도 평택이란 곳으로 이사를 하셨었지요.
당시 가난하고 배운거없는 아버지가 하실수 있는 일은, 논농사와 막노동밖에 없었습니다.
어릴때 제 기억으로도 정말 막노동은 안해본게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평택역 수화물취급소 일을 하기도 하셨는데,
우리가 알고있는 일반 리어커가 아닌,
바퀴도 크고 나무로 짜여진 거대한 구루마에 화물을 싣고,
각 상가 점포에 배달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쌀을 20kg단위로 포장하는 배려의 시대도 아니었기에,
배달하는 화물의 무게가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일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저녁이면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
어머니와 싸우셨기에, 저희도 수종님처럼 불안에 떨어야했습니다.
술이 취하시면 늘 자주하시던 말씀이 있으셨죠.
'내가 1등만 했던 사람이야.
공부만 했어도 이렇게 살사람이 아니야!'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해서 공부를 할수없었던게 늘 평생의 한이셨죠.
그걸 알기에 제가 글 서두에, 한많은 세상이란 문구를 넣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자식에게 다정한 말이나 표현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아버지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어릴적 어머니 심부름으로,
건물철거현장에서 일하시는 아버지 도시락을 갖다주러 갔었습니다.
요즘이야 일시키는 사람이 점심을 제공하지만, 당시엔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아버지께서 런닝셔츠 차림으로 비지땀을 흘리시며,
무거운 함마를 들고 바닥을 내리치고 계셨습니다.
도시락을 건네드린뒤 제가 쭈뼛거리며 가지않고 서있자,
"왜 안가고?"
철없던 제가 말했습니다.
"50 원만 주세요."
"왜?"
"호떡 사먹으려구요."
아버지께서 아무 말없이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50원을 꺼내주시는데,
주머니천이 뒤집어지며 딸려나옵니다.
모래와 콘크리트파편이 우수수 떨어지더군요.
한마디 말씀은 안하셨지만, 어린 마음에도 저는 알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아버지의 사랑법이란것을요..
아무튼 술드시면 주사도 심하고 저희를 불안하게 했지만,
자신의 몸을 바쳐 저희 7남매를 위해 희생하신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아버지의 주사가 너무 미웠기에,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눈물한방울 나오지 않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신게 현실이 되니,
아버지의 그 미웠던 행동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않고,
제가 아버지께 못되게 굴었던것만 떠오르는겁니다.
수종님 말씀처럼, 입관식때 하염없이 펑펑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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