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친구 부인 삼우재 날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다.
그러니까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친구 부인이 간암 말기였다. 그동안 요양차 양평에 있었다. 한 3개월 있었나? 비용은 한 달 기준 300만원. 기타 비용까지 하면 과장급 한 달 월급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2. 근 보름 전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앞으로 보름을 넘기기 어렵겠다고 하네. 일산 암센터에서 인천 국제성모병원으로 옮겼다. 친구는 아마 자신의 분신과 같았던 부인을 마지막이라도 깨끗한 곳에 있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3. 친구 부부가 인천 부평성모병원에 일차 진료차 온 적이 있다. 그때 보고 이제껏 친구 부인을 보지 못했다. 친구 부인이 양평에 있을 때 우리 부부는 생각했다. 친구 부인이 암에 걸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고, 환자가 반겨할지 어떨지 모르니 병문안은 가지 말자.
4. 그러나 만약 지금이라도 보지 못하면 다시는 친구 부인을 보지 못하고 보낼 것 같아서 우리 부부는 어려운 결정을 했다.
5. 부인은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은 다 빠졌다고 했다. 암 치료가 의미가 없어 중단했더니 머리카락이 미리 정도자랐다. 얼마나 힘든 투병생활을 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 머리카락은 온통 하얗게 세었다. 복수가 차면 빼낼 수 있다지만 다리에 물이 차면 피와 살이 섞여 있어 물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단다. 다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 있었다. 우리를 잘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부인의 얼굴과 몸짓에는 이미 사신이 내려 앉아 있었다.
6. 그 와중에 우리가 왔다고, 아니 누가 왔다고 일어나 앉으려했다. 웃는 것인지 고통에 찡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웃음이 스쳐갔다. 아니면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인지 운명에 대한 저주의 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7. 부인은 통통한 편이었고, 수수한 얼굴이지만 조금 예쁜 편이었고, 무엇보다 명랑 쾌활한 편이었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해 부인과 대화를 하면 즐거움이 있었다. 최근 몇 년간 복지시설이나 도서관에서 노후 복지에 대한 강의도 하고 다녔다.
8. 부인은 친정 아버지를 고혈압으로 잃었고, 친정 어머니를 간암으로 잃었다. 오빠도 간암으로 벌써 고인이 되었다. 이제 자신이 간암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B형 간염 보균자였고, 오빠도 자신도 B형 간염 보균자였다. 그리고 셋이 모두 같은 병명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9. 친구는 강의를 했던 사람이고, 부인은 선거에서 지기는 했지만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친구가 강의를 그만 두자 부부는 인천 송도유원지 인근에서 태능갈비집이라는 제법 큰 가든을 운영했다. 여기서부터 부부는 가지 않는 길, 그러니까 서서히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다.
10. 식당을 해 본적이 없는 부부가 그 큰 식당을 운영했으니 시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화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고 하더니 구제역이 같이 왔다. 결국 큰 빚을 지게 되었고, 식당을 정리했다. 부부는 파산했고, 빚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둘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신용회복 절차에 들어갔다.
인천 동암역 인근에 15평 남짓하는 식당을 했으나 역시 그의 불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결국 친구는 부인에게 식당을 맡기고 자신은 송도 매립지 공사현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평생 강의만 했던 사람이. 샌님같은 사람이. 그곳은 내 아들이 여름방학 때 등이 벗겨질 정도로 고생했던 곳이기도 했다. 낮에는 나가 공사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들어와 부인의 일을 거들었다.
11. 친구는 다행히 공사현장에서 전기 기술을 배워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일당을 받았다. 부부는 열심히 일했고, 조금씩 빚을 갚아나갔다. 그리고 이제 부인의 빚은 다 갚았고, 친구의 빚도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몇 달 후면 그 지긋지긋했던 빚도 다 청산하고 이제부터는 온전히 저축할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12. 그리고 부인은 간암 말기가 되었다. 살만하면 죽는다는 옛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왜 하필 친구 부인이 이것을 다시 증명해야 했는가.
13.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수요일이 고비라고 하네. 수요일 아침 다시 전화가 왔다. 오늘 아침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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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저녁에 집 사람과 같이 장례식장에 갔다. 나는 멀거니 먼데를 쳐다보고 집 사람은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16. 발인일, 새벽같이 일어나 장례식장으로 갔다. 도착했을 때는 벌써 화장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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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중
전광판에 그렇게 떴다. .
20곳의 전광판이 동시에 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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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중
사방은 울음소리도 뒤덮혀 있다. 육신은 불꽃 속으로 사라지고 영혼만 맴돌고 있었다.
잘 가시오. 결혼도 안 시킨 두 딸을 두고 뭐가 급해서 그리도 빨리 가오.
남겨진 내 친구는 어떻하고..
17. 삼우재를 지내고 친구의 두 딸을 불러 세웠다. 고생했다. 너희가 엄마와 같이 산 세월보다 아빠가 엄마와 같이 산 세월이 더 길었다. 너희들은 결혼하면 떠나가겠지만 아빠는 혼자 남는다. 아빠에게 잘 해 줘라. 내가 말 안해도 알아서 잘 하겠지만...
18. 두 딸을 보내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친구와 두 딸은 부인과 엄마의 병 구완을 위해 모두 직장을 그만 두었다. 한 사람의 병자는 온 가족의 희생을 받고도 부족해 기어이 갔다. 친구는 실업 급여를 신청했다.
19. 친구에게 실없는 농담을 건넨다. 돈이라도 있으면 재혼이라도 할 건데, 돈도 없고 어떻게 할거나. 하긴 돈이 있어도 두 딸 때문에 안 되겠다. 자네가 재혼하면 딸들은 아빠가 엄마를 배신했다고 생각할 테니. 그러니 여자를 만나거든 재혼은 하지 말고 친구처럼만 지내라. 친구는 나에게 묻는다. 벌써 그런 소리를..
20. 전에 들었던 법륜 스님의 말을 해줬다. 한 여인이 스님에게 물었다. 남동생이 먼저 갔는데 지금도 가슴이 많이 아프다. 꿈에서라도 한 번 꼭 보고 싶은데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할까. 스님은 답한다. 누나가 자꾸 남동생을 생각하면 남동생의 혼이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다. 좋은 곳으로 가야 옳으냐 아니면 누나 때문에 가야할 곳을 가지 못하고 떠도는게 옳으냐. 그 여인도, 나도 깨달음을 얻는다. 친구도 깨달음을 얻었다.
21. 내침 김에 더 말했다. 망자는 자신의 스케줄에 따라 인생을 살다 갔다. 자네도 자네 인생의 스케줄이 있으니 너무 망자에 매이지 말게. 사는 동네가 다르니 사는 방법도 달라야 하겠지.. 어느 TV는 말한다. 부인이 죽은 후 남편은 수 십년을 매일 묘지에 찾아가 꽃을 놓고, 집에 부인의 영정 사진을 걸어 놓고 향을 피운다. 혹자는 이를 남편의 정절이라고 우러러 보지만 부인이 망자가 된 후 그에게는 자신의 삶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네,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어도 된다네.
22. 지금은 경황이 없겠지만 조금 지나면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네. 그때 주저 말고 전화하게. 달려감세.
23. 친구는 내가 잘 간수할 테니, 먼 길 잘 떠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