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아침 운전을 하려고 밖에 나섰더니 눈이 내립니다.
밤새 내렸는지, 벌써 차 지붕과 유리에 하얗게 쌓여 있더군요.
눈을 걷어내는데 손이 시립니다.
여전히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니, 불현듯 예전 아스라한 기억하나가 떠오릅니다.
경기도 평택에 안*리 라는 곳이 있습니다.
6.25 이후 미군이 거주하게되면서 생성된 기지촌 입니다.
80 년 대 중반, 이곳 골목에서 화방을 운영한적이 있습니다.
대로변에 점포를 얻으면 수입이 좋았겠지만,
비싼 보증금과 임대료의 부담으로 골목을 선택할수밖에 없었죠.
골목을 들어서면, UN Club 이란 미군 홀이 자리하고,
골목 안쪽엔 미군을 상대로 매춘업을 하는 사창가가 있었는데,
주 고객이 흑인병사들이다보니, 따라서 제 고객도 흑인병사들이 많았습니다.
제 점포가 클럽 바로 앞이라,
밤이 되면, 희황한 네온불빛과 환한 가로등으로 불야성을 이루었죠.
밖에까지 울리는 클럽음악과,
술취한 흑인품에 얼굴을 묻고 거의 안기다싶이 클럽을 드나드는 처자들..
몆 푼의 달러를 벌어들이기위해,
불쌍하다못해 슬퍼보이기까지하는 추파를 흘리며,
하이톤의 목소리로 지나가는 흑인을 유혹하는 아즈매들...
이곳에선 뭐 거의 매일 보게되는 흔한 풍경들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한 두 블록 주위는,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택가 입니다.
한마디로 아이들 교육상으로는 무지 안좋은 환경 입니다.
이런 안좋은 환경속에 자리했던 제 점포 바로 옆에,
왕대포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오기전부터 있던곳이니 꽤 오래된듯 합니다.
할머니가 장사를 하던 이곳은, 토박이 어르신들이 주로 드나들었는데,
막걸리와 소주, 두부김치, 노가리구이, 제육볶음, 닭발무침, 닭볶음탕..
이런게 주 메뉴였던듯 합니다.
뭐 지금도 거의 그렇지만, 애주가였던 제가 이곳을 찾아갔던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퇴근시간 9 시가 되면,
불을 끄고 점포문을 잠그고 왕대포집을 찾아갔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굴속같이 어두침침한 이 집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저를 맞이합니다.
제가 들어가면, 술을 마시던 어르신들이 일제히 저를 쳐다봅니다.
이런 묘한 분위기가 적응하기 어려워서인지,
저는 한번도 의자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셔본적이 없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입구에 있는 카운터테이블 앞에 서서,
"대포 한 잔 주세요~ " 하면,
그 할머니가 땅속에 묻혀있는 커다란 단지에서 덮어놓은 은빛 쟁반을 열고,
표주박으로 막걸리를 휘휘 저어 푼 다음 , 스텐그릇 가득 부어 테이블위에 올려 주는데,
여기서 또 이 할머니만의 독특한 습관을 마주하곤 합니다.
막걸리잔에 꼭 새끼손가락을 넣어 한번 더 저어 주더군요.
그러면 저는 원샷으로 들이키고,
안주로 내준 마늘장아찌 하나를 입에 넣고 입가를 훔친뒤,
한 잔 값 200 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나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이, 불과 채 5 분도 안걸립니다.
이 짓이 며칠 반복되다보니, 어느날부턴가 제겐 별명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가 들어가면 할머니가 웃으시며,
"아이구.. 신사양반 오셨네~ " 하더군요.
아마도 후다닥 마시고 나오니까, 매너좋다고 붙여준 별명인듯 합니다 ㅎ ㅎ
며칠 다니다보니, 실내 안쪽 방문이 열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초등학교 2 학년 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숙제를 하는지 방바닥에 엎드려 뭔가 쓰고 있더군요.
어떤날은 손님이 들어오면, 할머니를 도와주고싶은지 술주전자와 술잔도 날라주고,
손님이 가고나면 테이블위의 그릇들을 치우는 모습도 보입니다.
내막은 알수없지만,
아마도 아이부모에게 문제가 생겨, 할머니가 키우게 된게 아닌가 짐작되더군요.
할머니도 오죽하면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떠맡게 되었을까..
어쩔수없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겠지요..
어느날, 여느때처럼 그 왕대포집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손님이 하나도 없고 할머니도 어디 가셨는지 안보이더군요.
제가 들어가자, 그 여자아이가 저를 단박에 알아보고 방에서 나오더니,
매우 익숙한듯 그 단지의 은빛쟁반을 열고, 막걸리를 퍼올려 스텐그릇에 부어주는데,
여기까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나도 많이 봤다는듯, 고사리같은 새끼손가락을 막걸리잔에 넣어 휘휘 젓는데...
충격 먹었습니다!
그 눈송이처럼 하얀 손가락이 탁한 황톳물에 젖어지는 모습이,
차마 봐서는 안될 모습을 본것 같았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막걸리를 넘기고 난후,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앞으로 할머니가 안계시면 내가 퍼다 먹을테니까,
손님 오셨을때 술따라 주는건 하지마라~ "
아이가 그 초롱초롱한 맑은 눈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의 가정사에 관여할수 없지만,
부모의 사랑을 듬뿍받으며 뛰어놀고 공부해도 모자를 나이에,
그 동굴같은 환경에서 아이가 술주전자 나르던 모습은,
이후 오랫동안 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더군요.
고사성어 "맹모삼천지교" 가,
왜 세대를 아우르며 회자되는지 알것도 같습니다.
과거의 제 삶도 참 어려웠지만,
물질만능시대인 요즘도 힘들게 사는사람은 참 많습니다.
결혼하기도 어렵고, 어렵게 결혼하더라도 부모노릇 또한 쉽지않으니,
싱글족이 늘어납니다.
요즘 혼밥, 혼술이 유행이라는군요..
그래도 이 겨울 이 시간,
제 글을 보는분만큼은..
혼자가 아니길 바라며.. 글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