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BC 50년 즈음에 쓰여진 키케로가 쓴 노년에 관하여에서 발췌.
(주의: 책 자체는 별로 재미없음)
"분별 있는 젊은 시절을 보낸 이에게는 지혜로운 노년이 오고,
욕망에 사로잡힌 젊음을 보낸 이에게는 흐리멍덩한 노년이 오게 된다.
노년의 체력도 마찬가지."
“기실 체력의 쇠퇴 그 자체는 노년 때문이라기보다는
젊은 시절의 방탕으로 말미암아 더욱 빈번히 초래된다네.
격정적이며 무절제한 청년기가 노년에게 쇠약해진 육체를 건네주기 때문이지.”
“만약 죽음이 영혼을 아주 없애버린다면 죽음은 확실히 무시되어야만 하고,
만약 영혼이 영생할 수 있는 곳으로 죽음이 영혼을 이끌어간다면 오히려 죽음은 열망되어져야 한다네”
“마치 집으로부터가 아니라 여인숙으로부터 떠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나는 삶으로부터 떠난다네.
자연이 우리에게 영원히 거주하는 곳이 아닌, 잠시 머무를 거처를 주셨기 때문이지. ……
오! 영광스러운 날이여! 나는 그때가 되면 영혼들의 저 신성한 집합체 속으로 갈 것이며,
이 시끄럽고 더러운 이승으로부터 빠져나갈 것이라네.”
“어떤 흥미가 유년기에 있다고 하세. 그렇다면 청년이 유년기의 흥미를 바라겠는가?
청년기에 갓 들어섰을 때 느낄 수 있는 흥미가 있지. 그러면 인생의 중간기라고 불리는 중년기는 그것이 필요하겠는가?
중년기에 느껴지는 흥미가 있지. 그러나 노년에 그러한 것이 추구되지는 않는다네.
노년에도 마지막 흥미가 있지. 하지만 앞서 지나간 시기의 흥미가 없어지듯이 노년의 흥미도 없어진다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 삶에 대한 ‘물림’이 죽음의 성숙한 시간을 가져오지.”
이 책의 평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에서 유리 세공 일을 하는 니콜라라는 사람이 윌리엄 수사(修士)에게 말하길,
그보다 2세기 전에 만들어진 유리창과 같은 걸 자신들은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
“겨우 고치는 정도인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옛날의 그 색깔을 낼 수 없거든요. ‥‥‥
맥이 빠집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옛날 사람들 같은 재주가 없는 모양입니다. 거인의 시대는 가 버린 것이지요.”
그러자 윌리엄 수사가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요, 우리는 난쟁이들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난쟁이는 난쟁이로되,
거인의 무등을 탄 난쟁이랍니다. 우리는 작지만, 그래서 때로는 거인들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식자(識者)들은, 대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또 하나의 난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는 표현은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사 베르나르 드 사르트르가 처음 사용했다.
윌리엄 수사가 인용한 말에서 ‘거인’이란 곧 ‘전통’을 뜻하며, 한 사회의 지적 인프라이기도 하다.
난쟁이는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난쟁이처럼 작지만,
위대한 전통(거인)의 무등을 타고 바라보기에 거인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말이다.
와싸다와 함께 한지 몇 년인가?
저도 이제 나이를 먹어 정년을 생각할 나이가 되니 이런 글들이 더 눈에 들어오네요.
와싸다 자게 분란이 몇번이었던지...심지어 안티(?) 사이트가 생기기도 했었지요.
무덤덤 해지는게 키케로가 말한 흐리멍텅한 노년인지
움베르토 에코가 언급한 우화처럼 거인의 무등을 탄 난쟁이인지 아니면 난쟁이의 무등을 탄 난쟁이인지....
암튼 세월이 흐른다는게 마냥 싫지만 않습니다. 을쉰들 같이 놀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