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장애인 고물장수친구가 한 명 있었다.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말할때 보면 입도 돌아가 발음이 어눌하여 누가봐도 딱 장애인이다.
모습이 그러니 불쌍하다하여 사람들이 돈도 받지않고 고물을 막 내주어서,
그가 고물상으로 들어올때면 항상 리어카에 고물이 산더미처럼 실려있었다.
상황이 그러니 일반고물장수보다 돈을 두 배로 더 벌었다.
내가 이 친구를 만나게 된 시기가,
하던 사업이 망하여 그나마 남은 가산을 정리하여,
마눌과 여섯 살 네 살박이 두 아들을 데리고, 지방 소도시로 이사를 했을때였다.
마눌에게 조그만 분식가게를 차려주고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가게를 얻은곳이 시내외곽이다보니 내가 도울만큼 장사가 잘되는것도 아니라서,
나도 뭔가 일을 찾아 나서야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이었는데,
가게 근처에 고물상이 하나 있었다.
열 명 남짓한 고물장수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다섯명 정도가 고물상안에서 먹고자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자기집에서 출퇴근을 한다.
빈손으로 가도,
리어카와 그날 장사밑천과 뻥튀기한자루와 엿가위를 빌려준다.
고물을 수집해오면 그때그때 계산을 하고,
일을 마치는 저녁엔 빌린거 갚고 나머지수익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능력에 따라 다르지만,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어지간한 회사봉급 이상의 돈을 벌어간다.
당시엔 찬밥 더운밥 가릴정도의 여유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내발로 고물상을 찾아가 자청하여 일을 시작했다.
스물아홉 젊은 나이로 작업복을 입고 엿가위를 치며,
하루종일 리어카를 끌며 시내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는게,
아무리 긍정적인 삶을 살기로 한 나였지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으랴.
남의 돈 훔치지않고, 남에게 사기안치고, 정직하게 내가 땀흘려 일한 노동의 댓가를 가져가는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있는게 아니다.
그 직업을 바라보며 귀하다 천하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귀천이 있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건 숭고한 것이다.
먼훗날 나를 되돌아봤을때, 한 치의 부끄럼도 없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뭐 이런 개똥철학으로 머릿속을 세뇌시키니 용기백배할수 있었다.
일이란건 단순했다.
리어커를 끌고 엿가위를 치며 시내 이곳저곳 다니다가,
고물을 팔려는 사람을 만나 흥정하여 맞으면 리어커에 줏어담고,
운이좋아 건물철거하는 곳에서,
알미늄샷시나 구리전선 동파이프라도 좋은 값으로 사게되는 날이면,
그날은 횡재하는거다.
나름 언변 좋다는 소릴 많이 들어서인지 흥정에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운이 좋은날만 있는건 아니다.
하루종일 발가락이 부르트게 돌아다녀도 별로 돈이 안되는 파지나 고철만 싣게되고,
400kg이 넘는 중량의 리어카를 끌고 언덕배기를 오를라치면,
숨이 턱에 차고, 땀이 비오듯하여 윗옷이 소금기로 얼룩지는 날도 허다했다.
이런 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바로 글 서두에 언급한 그 장애인 고물장수를 만났다.
고물상 사장님말로는 충주에서 고물장사를 했는데 여기에서 일하고싶다고 했단다.
근데 이 친구를 몆 일 겪어보니,
딱 봐도 장애인인데, 하는 말과 하는짓은 일반사람 뺨치게 똘똘하다.
이 친구가 들어오기전만해도 내가 1 등을 달리고 있었는데,
고물 수집해오는걸보니 나를 단박에 2 등 자리로 밀어 내었다.
게다가 막걸리도 잘마신다.
저녁에 일끝나고나서 술을 좋아하는 동료 너댓명이 고물상앞에 있는 대폿집으로 몰려간다.
두부김치 하나 시켜놓고 순식간에 서너주전자를 비워버린다.
그뿐이랴 기분파여서 열에 일곱번은 계산도 그 친구가 했다.
화끈한 친구였다.
급속도로 친해졌다.
저녁이면 둘이서 바베큐치킨집을 찾아가 생맥주도 많이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나이도 나와 같다는걸 알게되어,
바로 친구하기로 했다.
우리가 둘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보면,
옆자리의 손님들이 힐금힐금 곁눈질로 쳐다보는걸 의식하게 되는데,
나는 왜그러는지 알고있다.
그러나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 그는 나의 친구였으니까...
그런데 이 친구는 나와 친구이기도 하면서 경쟁자이기도 했다.
몆날며칠을 쫒아다니며 간신히 뚫어놓은 철거현장에 가보니,
모아서 한번에 준다던 샷시더미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현장소장에게 물어봤다.
"아니 저한테 팔기로 했잖아요 누구한테 파셨어요?"
그러자,
그 친구가 와서 팔라고하여 팔았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그렇지 선약을 하고서 그러시믄 안되죠?" 하니,
"이 양반아!~ 그 불쌍한 사람이 그리 먹고살겠다고 애쓰는데 어떻게 안도와주나!"
ㅋ~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다.
왜냐? 현장소장의 말이 틀린말도 아니고 그는 나의 친구였으니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건 어쩔수 없었다.
같이 술마시다 얘기를 꺼냈다.
"야 임마~ 너는 내가 몆날 며칠을 그리 공들여논걸 한방에 나꿔 채가면 어쩌냐?"
그러자,
"그랬구나 나는 정말 몰랐다 그냥 물건이 쌓였길래 팔으라고 했더니,
바로 가져가라 하던데?.. 미안하다 오늘 술은 내가 사께~"
"그래 알았다 임마!"
ㅋ~
이런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그때마다 더 이상의 말을 할수가 없었다.
어쨋거나 그 친구보다는 내가 더 사람행색을 갖추었고 그는 나의 친구였으니까...
그런데 장애를 가졌슴에도 열심히 사는 그에게 치명적인 단점은 있었다.
바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적인 시선을, 그 또한 극복하기 어려웠다는거다.
일반적인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린다는건 그에게 꿈나라같은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어딘가는 니짝이 있지않겠냐? 부지런히 돈 모아서 너두 장가가야지.."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귀담아 듣지않았다.
충주에서 같이 일했다는 형님이란 사람을 불러들이더니,
방한칸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는데,
이 형님이란 작자가 경마에 미친 사람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죽어라 4 일을 일해 벌어모은 돈을 가지고,
둘이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있는 경마중계장에 금토일 3 일 연속 출퇴근을 했다.
호기심에 나도 딱 한번 따라가봤는데,
담배연기 자욱한 실내에,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멍때리며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이건 사람이 할짓이 아니다싶어 이후 다신 가지않았다.
전해들은 얘기로는,
어떤날은 탈탈 털려 빈손으로 오고,
어떤날은 100 만 원도 딴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날은 둘이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사창가에 들러 회포를 풀고온다고 했다.
피끓는 젊음에다 생식기를 가졌는데 상대해주는 여자가 없으니,
이해못할바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힘들게벌은 피같은 돈을, 구멍뚫린 독의 물처럼 줄줄 새게 한다는거다.
당장은 힘이 있으니 버틴다지만, 오륙십을 넘어 힘떨어지면 그땐 어떻게 살까?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은 사라지지 않을테고,
돈마저 없으면 그의 삶이 비참해질것이란건 불보듯 훤하다.
그게 그의 팔자이고 그의 낙이라고 한다면 나의 불필요한 오지랖에 불과하겠지만,
장애인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의지와 노력에 따라 행복을 누릴 수도 있다.
그간에 나의 직업이 여러번 바뀌면서 그 친구와 연락이 두절된지 30 여 년 가까이 됐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길이 없다.
여전히 고물장사는 하는지.. 아니면 좀 더 발전하여 고물상이라도 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고물상하다 망한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적이 없으니,
그가 고물상이라도 하고 있다면,
어쩌면 지금쯤 그를 닮은 아이 두 셋 옆에 끼고 환하게 웃고 있지는 않을까?
한때 내 젊은날의 초상 한켠에 기운차게 앉아,
맥주잔을 부딪치며 청춘을 노래했던 내 친구여!
부디.. 잘지내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