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화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전주 LG유플러스 협력회사 콜센터 현장실습생 홍은주 씨(가명)가 지난 1월 23일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2014년 10월 이곳 콜센터 직원이 자살한 이후 2년 3개월 만에 두 번째 자살자다. 2014년 10월 LG유플러스 상담팀장이 자살하며 남긴 메모에는 "수많은 인력의 노동착취"와 "정상적인 금액(임금) 지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증언이 남아 있었다.
이후 이곳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않은 실습생이 살인적인 노동 환경 속에서 취업 5개월 만에 자살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은 홍 씨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전북 전주를 찾았다.편집자.
땅이 우묵하게 파여 깊고 넓게 물이 고여 있는 곳이었다. 산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인적도 드물었다. 한껏 공원으로 단장했지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어쩔 수 없는 일. 전주에 위치한 아중저수지 이야기다. "아중"은 "관암"이란 뒷산에 갓을 쓴 사람 모양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지난 1월 23일 오후 1시께 변사체가 발견됐다. 전날 친구와 점심을 먹는다고 나간 고3 여고생 홍은주(가명) 씨였다. 경찰은 22일 오후 6시께 은주 씨가 스스로 저수지에 뛰어들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은주 씨는 죽기 직전, 저수지 둑이 바로 보이는 카페에서 10여 분 정도 머물렀다. 그곳에서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 한 통을 건넨 뒤, 저수지 쪽으로 향했다
은주 씨가 자기 몸을 던진 날은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치던 날이기도 했다. 당시 전주의 기온은 영하 9도. 그런 날씨에, 인적도 드문 저수지에 왜 자기 몸을 던져야만 했을까.
▲ 홍은주 씨가 뛰어든 저수지. ⓒ프레시안(허환주)
딸을 가슴에 품은 아버지의 한탄
은주 씨가 자살하기 3일 전인 20일 새벽 아버지 홍순성(58) 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딸의 친구였다.
"아버님, 은주가 회사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하더니 그만 자기 손목을 그었어요. 피가 많이 나요. 어서 오세요. 여기는 000이에요."
급히 옷을 입고 딸 친구가 말한 곳으로 달려갔다. 급히 달려간 병원에서는 다행히 동맥을 건드리지 않았단다. 자해한 곳을 꿰맨 뒤 집으로 데려왔다. 가슴이 타들어 갔지만 아버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속으로면 되뇌었다.
"회사 일이 얼마나 힘들길래 저럴까."
은주 씨는 평소 자존심이 무척 센 딸이었다. 자기와 관련된 말들은 잘 하지 않은 편이었다. 힘든 일을 겪어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은주 씨는 지난해 9월 초순부터 LG유플러스 협력회사인 콜센터 현장실습생으로 근무했다. 돈을 벌다가 야간대학을 가겠다면서 선택한 길이었다. 내심 대학 진학을 바랐던 아버지는 이내 알겠다며 딸의 의견을 존중했다.
정확히는 "SAVE" 부서였다. 해지를 요청하는 고객을 담당하는 역할이다. 내부에서는 "해지 방어" 부서라고도 부른다. 한마디로 고객이 계약해지를 위해 전화를 하면 이를 막는 일을 하는 셈이다.
회사와 관련된 말을 하지 않는 딸이지만 아버지도 느끼는 게 있었다. 딸의 스트레스가 심각하다고 느낀 것은 지난해 12월부터였다. 수습을 마치고 정식직원이 된 시점이다.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하지만 이를 맞추는 적은 거의 없었다. 전에는 하지도 않던 회의를 한다며 늦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콜(call)수를 못 채웠다"며 야근을 하기도 했다. 상담사인지라 회사에서 정해진 전화상담 건수가 있겠거니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딸의 성격도 거칠어졌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짜증 내는 횟수가 점차 늘어갔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해를 한 다음날 친구를 만난다면서 나간 게 아버지가 본 딸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꿈에 나타나면 한 번 묻고 싶어요. "너 왜 그랬니? 아빠 생각하면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은 못할 텐데…. 그렇게 모진 일 할 때 아빠 생각 한 번만이라도 했으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딸을 가슴에 품은 아버지는 했던 마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 홍은주 씨가 뛰어든 저수지. ⓒ프레시안(허환주)
그렇게 힘들다는 걸 조금이라도 알아챘다면...
은주 씨의 친구인 박윤민(가명, 20) 씨도 마찬가지였다. 은주 씨의 죽음은 여전히 윤민 씨에게는 상처다. 아직도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윤민 씨는 은주 씨가 저수지에 몸을 던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친구다.
"은주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아챘다면 이렇게까지 됐을까."
자책하고 또 자책하는 그였다. 은주 씨는 평소 친구들에게도 자기 힘든 일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은주 씨는 친구인 윤민 씨에게도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건 자기가 나약하다는 걸 드러내는 거고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깔봐. 그러니 너도 힘들다고 하지 마."
그래도 여러 징후는 있었다. 어떤 날은 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너는 왜 방어(계약 해지를 막는 작업)를 못 하냐"고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회사에 들어간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때는 한밤중에 전화가 오기도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은주 씨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나 진짜 죽겠다. 죽고 싶다. 더는 못 견디겠다. 고객들이 "쌍욕"하는 것도 힘들고 계약해지를 막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위에서 갈구는 것도 너무 힘들다."
누구를 특정지어 힘들다고 한 게 아니었다. 그저 힘들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친구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회사 자체가 힘든 듯했다. 그래도 친구가 하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인 줄은 전혀 몰랐다.
"내일도 회사를 가야 하는구나."
이따금 은주 씨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푸념도 그냥 말 그대로 푸념인 줄 알았다. 열심히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사 초기에는 고객 응대 매뉴얼 등을 암기하느라 바빴다. 이따금 연락하면 "바쁘다"며 끊기 일쑤였다. 회사에 적응할 즈음에는 상품 판매 1등에 오르기도 했다. 그랬기에 은주 씨가 하는 이야기는 그저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윤민 씨에게 친구는 은주 씨 하나뿐이다. 은주 씨가 죽고 난 뒤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축하해줄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양손을 다쳐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을 때, 내내 찾아와 병시중을 들어주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꿈은 밥집을 여는 거였다. 요리를 잘했다. 오리훈제고기를 넣은 김치볶음밥은 언제 먹어도 특미다. 윤민 씨는 그렇게 떠나간 친구 이야기를 늘어놓다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요. 회사만 아니었다면 그 친구가 그런 선택을 했겠나요? 그런데 회사는 사람이 죽었는데 위로금이라고 고작 100만 원을 주네요. 세상이 이런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