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검찰 관계자 증언으로 본 상황 재구성
이인규 2009년 중수부장때
“그 정도론 곤란…더 써내라”
박연차 고강도 수사로 압박
새 변호인으로 선임된 박영수
박연차-검찰 ‘메신저’ 역할
이때 작성된 ‘박연차 리스트’에
반기문과 야당 의원 이름 등장
“검찰이 리스트 어딘가 보관”
“반기문 전 총장이 차라리 고소를 하면 좋으련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12일 ‘귀국 일성’으로 “(‘박연차 리스트’에) 왜 내 이름이 나왔는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한겨레>가 여러 날에 걸쳐 만난 전·현직 검찰 관계자들은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다고 확인해줬다. 덧붙여 이들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변호사와 상의해 검찰도 모르고 있던 이름들을 적어낸 것이어서 신빙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들은 반 전 총장이 관련 의혹을 보도한 언론을 고소하면 수사의 전제가 되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직 대통령이 수뢰 혐의로 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불거진 주요 대선주자의 금품수수 의혹인 만큼 이른 시일 안에 명백히 확인하는 것이 유권자인 국민을 위한 도리라는 뜻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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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와 상의해 스스로 써낸 것” 반 전 총장의 이름이 왜 ‘박연차 리스트’에 들어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2009년 2월께 문제의 리스트를 써낼 당시 박연차 전 회장은 대검 중수부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그 전해 7월 국세청의 특별 세무조사에서 글자 그대로 ‘탈탈 털린’ 그는 12월12일 대검 중수부에 구속됐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검찰 정기인사에서 대검 중수부 라인업이 전부 바뀌었다. 그를 구속한 ‘박용석 중수부장-최재경 수사기획관-박정식 중수2과장’이 ‘이인규 중수부장-홍만표 수사기획관-우병우 중수1과장’으로 교체된 것이다.
곧이어 고강도 압박이 시작됐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검찰 관계자는 “박 전 회장이 전임 수사팀에 몇 명 이름을 적어 냈었는데, 새로 부임한 이인규 팀에서 ‘그 정도로는 곤란하다, 더 써내라’고 글자 그대로 ‘올 코트 프레싱’을 가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여차하면 사업하는 딸들도 구속할 수 있다는 ‘사인’을 박 전 회장에게 보냈다.
이에 “두 손 두 발 다 든” 박 전 회장은 1월에 막 옷을 벗은 ‘검찰 전관’을 새 변호인으로 선임한다. 현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별검사로 활약하고 있는 박영수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2005년 4월부터 2007년 3월까지 대검 중수부장을 지냈고, 이인규 중수부장이 서울중앙지검 형사9부장일 때 2차장으로 그의 직속상관이었다는 점에서 박 전 회장이 최적임자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박 변호사는 박 전 회장과 검찰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수행했다. 박 전 회장에게 검찰의 요구 사항을 전하고, 다시 박 전 회장이 기억해낸 이름들을 정리해 검찰에 제출한 것이다. 이때 작성된 것이 나중에 ‘박연차 리스트’라고 이름 붙은 명단인데, 거기에 반기문 전 총장과 야당 중진 ㅇ 전 의원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박 전 회장 수사를 통해 검찰이 처벌한 전·현직 정치인, 관료가 모두 21명인 점을 고려하면, 명단 규모는 당시 나돌던 ‘30명설’이 유력해 보인다.
전·현 검찰 관계자들은 이 리스트의 ‘임의성’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검찰의 압박에 못 이겨 적어 내기는 했으나, 검찰이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 결과 등을 들이밀고 자백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검찰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이름들을 박 전 회장이 스스로 적어 낸 것이어서 그만큼 신빙성이 높다는 뜻이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를 하다 보면 우리(검찰)가 쪼니까 마지못해 진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박연차 리스트’는 정반대였다. 박 전 회장이 스스로 적어 낸 것이다. 반 전 총장이나 ㅇ 의원은 검찰에서 거론되지 않던 이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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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하면 좋지만 못할 것이다” 검찰이 당시 반 전 총장까지 수사하려고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박 전 회장이 반 전 총장에게 금품을 건넸다고 한 시점은 그가 참여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있던 2005년께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리스트가 제출된 2009년엔 공소시효가 살아 있었다. 물론 반 전 총장이 당시 현직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수사 여부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을 수 있다.
당시 상황에서 분명한 것은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숨지면서 검찰 수사가 ‘동력’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국민적 비난 여론 속에 이인규 중수부장이 책임을 지고 검찰을 떠났다. 이 부장은 사직하기에 앞서 수사팀에 “박연차의 조서를 반드시 받아놓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수사할 수 있도록 근거 자료를 확보하라는 취지로 추정된다.
전·현직 검찰 관계자들은 반 전 총장의 이름이 적혀 있는 문제의 리스트가 검찰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스트 파기는 곧 범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직 검찰 관계자는 “그거(리스트)는 검찰이 싫든 좋든 보관할 수밖에 없다. 없애버리면 직무유기나 직권남용, 증거인멸 등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반 전 총장은 박 전 회장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이이고, 인연이 없다”며 관계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12일 귀국 전후에도 언론에 ‘인격살인’이란 표현을 쓰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반 전 총장이 이인규 중수부장의 후임인 김홍일 전 중수부장을 귀국 다음날인 지난 13일 50분 동안 독대해, 이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검찰 안팎에서는 ‘고소를 통한 검증’ 필요성이 제기된다. “리스트를 열어보자”는 얘기다.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됐을 사안이어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기는 어려우니, 반 전 총장이 의혹 제기 언론사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수뢰 혐의로 특검 수사를 받고 있는데, 유력 대선주자인 반 전 총장의 금품수수 의혹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고소를 통한 검증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과연 반 전 총장이 자신있게 (고소장을)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강희철 석진환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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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te.com/view/20170118n03318?mid=n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