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초도 아니고, 패미니스트도 아니고 그냥 성질이 드러운 놈이어서 가능했던 초간단 결혼 이야기입니다. 과장없는 실화이지만 웃자고 올린 이야기이니까 다큐성 댓글은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나마 결혼하고 가족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안사람 덕분입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부모님과 안사람입니다.
배경설명)
성질 드럽고 큰 놈(182/87)과 그 놈이 첫 연애인 작은 여자(155/45)가 10년 동안 연애(서로 동갑)를 합니다.
당연히 예비처가에서는 매년 초에 남자 놈을 불러다가 식칼 꽂아놓고(?) 담판을 벌이려고 합니다.
예비장인어른: 내 딸가지고 노는거지? 회사들어가면 결혼한다며!!!
예비 마누라: 다른 여자있으면 얘기해. 깨끗하게 물러나줄께 ㅜ.ㅜ
결국 마누라 나이 30이 되는 해에 결혼을 결심하면서 벌어졌던 "나 건드리지마. 내 성질 알지?" 해프닝입니다.
가족 예복)
그 놈: 대학원 등록금때문에 벌어놓은 돈 없다. 그리고 아버지와도 사이가 안좋으니까 집에 손 못벌린다. 양쪽 혼수는 일가족으로만 하고 다른 친척 혼수는 일체없다.
그리고 가족 예복도 이 돈으로 끝이다. 처가에서 뭐라고 하면 이 결혼 끝이다.
결국 백화점에서 처가집 식구들 예복사다가 친척대우에 대한 말이 나와서 그냥 두고 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예복에 대한 이야기가 안나오더군요. 반대로 제 친척들에게도 어떤 답례도 못하게 했습니다.
혼수준비)
그 놈: 반지 하나와 시계 15만원짜리이면 됩니다. 저 돈 없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1,500만원 준비했습니다. 이 돈으로는 지하 단칸방으로 가야 합니다.
장모님: 첫 딸 결혼이네. 나는 그렇게 못하네. 그리고 내 딸은 절대로 지하에서 시작 못하네.
그 놈: 내가 전세방 못구했으니까 너도 혼수 해오지 마라. 침대는 절대로 안된다. 침대 들여오면 그 날로 이 결혼 끝이다. 아! 오디오도 해오지 마라(당시는 오디오세트가 필수였습니다).
결국 장모님의 읍소로 반지 하나 + 100만원짜리 시계로 혼수는 끝이고, 처가집 지원으로 4,000만원짜리 (쥐나오는) 낡은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침대는 처가집에서 저희 신혼여행 중에 몰래 들여놓았습니다.
함받기) - 당시 함받기는 상당히 중요한 혼례절차였습니다.
그 놈: 아주 간단하게 갈테니까 아무 준비할 필요없어...
장모님: 여보. 사위라는 새끼가 지가 직접 함가방 들고 왔어요!!!
처제: 우리 집에 괴물 들어왔다 ㅡ.ㅡ
함들이고 요란떠는 것이 싫어서 제가 그냥 함가방 들고 들어갔더니 처가집 친척들까지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아무 말씀 안하시더군요. 마누라만 드디어 결혼한다는 것에 신나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결혼축의금 중 일부는 신랑신부 친구들 뒷풀이용으로 내놓았습니다.
결혼식)
결정판입니다. 서울 식장에서 폐백까지 5시간 이상 결혼식한 사람 없을 겁니다. 그것도 주례사 중 1.4후퇴 이야기나오고 통곡이 나온 결혼식은 저희 부부밖에 없을 겁니다.
대형 기술세미나를 혼자서 기획하고 지휘하다보니 결혼식은 남의 일이 될 판이었고 나중에야 주례선생님 섭외가 빠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식장은 이북오도청과 주례는 황해도 명예군수님으로 결정되었는데... 뭔가 불안하죠?
하객은 어쩔 수 없지만 주례는 절대로 이북 실향민이면 안됩니다. 주례에서 1.4 후퇴 이야기 나오면 결혼식은 끝입니다. 이 분이 잘나가다가 하객 중에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그만 한국동란 그리고 1.4 후퇴, 우리 이대로 세상을 등질 수 없다 기타 등등이 쏟아지더니 (아버님이 실향민이어서) 친구분들이 대거 통곡을 하고...
눈물바다가 된 3시간짜리 결혼식입니다. ㅡ.ㅡ 나중에 비디오를 확인하니 저는 실신지경이고 신부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애들도 지겨워서 울어 제치고 완전 엉망이었죠. 나중에 신랑신구 친구촬영에서 저희는 사회와 담쌓고 사는 커플이 되었습니다.
순도 100% 진실로, 결혼식 도중에 다들 자리를 뜨고 폐백까지 끝내고 나왔더니, 하객과 친구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희는 너무 배고파서 하객이 먹다 남긴 부페음식 먹었습니다.
신혼여행)
그 놈: 나 일본가고 싶다. 그런데 돈없어서 배낭여행이다.
마누라: 그래! 그래! 가자! 가자!
그런데 숙소가 유스호스텔입니다. 남녀 숙박동이 따로 떨어져있는...
4일 차에 신혼부부라는 것을 알게 된 직원이 하도 황당해서 방 하나 비워줬습니다. 마누라가 불쌍하다고...
마누라: 일본 음식이 입에 안맞아. 이제 편의점 도시락 그만 먹으면 안돼?
그 놈: 배낭여행이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불평이 많아. 먹어야 걸어 다닐 것 아냐!!!
알았어. 오늘은 특별히 카레라이스 사줄께.
귀국편 비행기에서 펑펑 우는 마누라...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는지...
야외사진 찍을 때에 소풍왔던 중학생들이 한목소리로 "신부가 아깝다"를 외쳐서 저를 쪽팔리게 했을 정도의 미모인데... 10년 연애하다보니 복에 겨웠죠.
봉하마을 뒷산에 올랐을 때의 안사람 모습인데... 저와 살아가는 내내 저런 표정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에고! 내가 저런 놈을 믿고..."라면서요.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