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우리 옆 동에 총무과 계장님이 '농협중앙회'에 괜찮은 아가씨가 있다고 소개를 해주시겠단다. 한 번
만나볼래?”
어머니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렸다.
“예. 만나볼게요. 다음 주 주말에 시간됩니다. 그때로 약속잡아주세요."
나는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직장인 4년차인 샐러리맨. 3년전 사내 커플로 연애를 하였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솔로가 된 이후 쭈욱 연애를 해오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매우 설레였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다.
“아들~ 소개팅은 없던 일로 해라. 여자가 알고봤더니 고졸 출신에 계약직이란다. 그래서 엄마가 없던 일로
했단다.”
아무렇지도 않는듯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그걸 왜 일방적으로 취소하세요?”
나는 화가난 말투로 내뱉었다. '사람을 그렇게 색안경끼고 보면 어떡합니까' 라고 차마 쏘아 붙이지는 못하고 대신 이렇게 내뱉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뭐랍니까?”
“으응. 뭐라더라. 미영인가 미연인가 그럴꺼야.”
어머니는 조용히 내 눈치를 살피며 미안한듯 대답했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잠이 오지 않는다. 아까 낮에 있었던 어머니의 말씀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아! 그 여자가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얼마나 자존심 상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 마음을 생각하니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신자는 아니지만 신께 어머님을 대신하여 용서를 구했다.
누구도 한 사람에게 상처주고 아프게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학력, 직업따위로 쉽게 그 사람의 가치를 단정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다음날 나는 직장에 가자마자 사내 매신저를 켜고 민정이를 찾았다.
“민정아, 너 예전에 농협중앙회 다녔다고했지? 혹시 미영씨인가 미연씨인가 그 분 알아?”
“응, 미연언니 자주 만나는 친한 언니야. 저번 주에도 만났어. 근데 오빠가 그 언니를 어떻게 알아?”
“아니야 아무 것도... 혹시 미연씨 남자친구 있어?”
“아니 없음데... 왜?”
품질 부서의 민정이는 아주 호기심에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응, 아니야. 고마워. 수고해.”
나는 그렇게 회사 동료인 민정이에게 그녀의 정보를 묻고는 회사에 다음날 휴가 결재를 올렸다.
“딩동. 99번 고객님”
나는 집에 있는 모든 농협 통장을 챙겨서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농협중앙회로 갔다. 4명 가량의 여자들이 맨 앞 창구에서 일렬로 근무하고 있었고 책상위로 각자의 명함판이 있었다.
‘김미연’ 어렵지 않게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내 번호표의 순번은 103번. 나는 꼭 그녀의 창구였으면 하고 간절히 간절히 바랬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만남을 ‘운명’으로 여길 참이었다.
“103번 고객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맑고 밝은 목소리에 현기증이 나는듯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는 내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그녀의 창구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떨렸다. 숨이 멈출 것 처럼 심장은 쿵쾅거렸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어... 저기... 이 통장 좀 정리하려구요.”
긴장을 해서 그런지 나는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통장집에서 통장 하나를 찾아 그녀에게 건냈다.
그리고는 그녀가 그 일을하는 동안 그녀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녀의 가녀린 손, 반지는 없었다. 그녀의 큰 눈, 진한 눈섭, 단정한 머리카락, 날씬하지 않지만 뚱뚱하지도 않은 그녀의 몸매까지도.
밝고 당당한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기만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을 때 그녀가 말을 건냈다.
“고객님 통장정리 끝났습니다” 라고 말하며 통장을 내밀며 덧붙였다.
“다른 용무는 없으십니까?” 그녀는 내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묻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눈을 통해 그녀에게 들키는 것 같아 시선을 급하게 돌리며 가방에 다시 손을 넣어 다른 통장 하나를 꺼냈다.
“이것도 좀 정리해주세요.”
또 다시 그녀를 훔쳐볼 시간을 번 셈이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통장을 내밀며 그녀가 물었다.
“다른 건 또 없으세요?”
어! 사실 나는 당황했다. 사실 더 있었다. 몇 년동안 방치했던 농협통장 전체를 정리할 셈이었다. 하나가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긴장을 해서 다 꺼내지 못한 탓이다.
“저기... 죄송한데 이것도 좀 정리해주세요.”
그녀는 표정이 바뀌었다. 장난기 많은 학생을 대하는 여자 선생인마냥 웃음을 간직한 표정으로 싫지않게 나에게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아니, 한 꺼번에 주시지 않고 왜 따로따로 하나씩 주세요? 불편하게...”
하지만 그녀는 짜증이 난 게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센스를 발휘한 것이었다.
그녀의 그 밝은 표정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그리고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싱그럽게 아름다운 가을 하늘 아래에서,
우리의 첫 만남, 아니 나의 첫 만남은 이렇게 103번째 고객으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