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의식한 것이든 아니든 최재영님이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예민한 주제를 건드렸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최재영님이 “일본은 뭔 배짱으로 하와이를 쳤는지도 궁금합니다.”라고 물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질문 의도가 혹 단순한 정보/지식이었더라도 해몽은 ‘진주만 기습의 현재적 의의’입니다. 이게 과거와 현재의 대화입니다.
질문에 모범답안은 댓글에 대충 나왔으니까 생략합니다.
문제는 그게 모범답안이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항용 그렇듯 정답은 여럿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게 왜 문제인고 하면, 일본 주류 사회 시각이 우리가 아는 모범답안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이렇게 댓글을 다셨더군요; “예를 들어,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사실이고 미국이라는 잠자는 거인을 깨워 일본 멸망의 길로 스스로 안내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면 틀린 의견이 되는 것이죠.”
그럴까요?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틀린 의견이 아니고 다른 의견입니다. 어쩌면 맞는 의견일지도 모릅니다. 태평양전쟁, 즉 미국-일본 전쟁은 표면상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을 한 듯싶지만, 기원을 살피면 러일전쟁 막판 이미 맹아가 보였고, 1930년대 양국 공히 한판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루스벨트의 포츠머드 중재 이후 미국정책이 일본을 견제하는 기조였고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고철 금수, 석유 금수 등 對일본 조치가 잇달아 나옵니다. 쇠 없이, 기름 없이 어떻게 전쟁을 합니까? 일본 목을 노골적으로 조이고 나온 것입니다. 또한, 지금은 이게 定說이죠; 진주만 기습 전 워싱턴 정부는 기습 작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도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미해군이 두 손 놓고 당하게 방치했습니다. 등 등 등, 이상을 종합하여,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유도했다, 또는 방치했다고 해석합니다. (과거에는 동 해석을 소위 ‘수정주의’로 규정하여 음모론 비슷하게 소수설 취급하였으나, 지금은 좌우 가릴 것 없이 팩트로 인정하는 팩트입니다.)
이상을 팩트라고 할 때,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냐? 이게 현재적 의의입니다:
일본은 태평양 전후 질서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전범국가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진주만기습에 미국의 "농간"이 있었달 것 같음, 우리가 왜 전범국가냐? 오히려 피해국가이다, 라고 항변할 논리가 생깁니다.
전범국가가 아니므로 정상국가이다. 즉,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정상헌법으로 돌아가자, 이 논리가 생깁니다.
잠자는 거인을 깨운 게 아니고, 자는 척 쌔근대는 거인한테 속아넘어가 잡아먹혔다고 할 때 기분이 어떨까요? 더럽겠지요. 열통 터질 일입니다. 극우파가 감정적으로 어깃장을 놓고 극단적 방향으로 치닫을 소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반미’가 약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것은 사회심리학에서 별건으로 따질 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