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가 손주를 낳아서 집에 2달간 계신답니다.
근데 딸은 딸일 뿐인데 손주가 큰 상전이 될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병원에서 2~3일 입원했다 퇴원해서 대부분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었는데
요즘은 병원에서 2~3일 입원하고 조리원에서 2주 있다가
친정집에서 2달간 조리를 한다고 하니
옛날과 비교하여 세상이 좋아졌는지
세태가 바뀌었는지 이해가 아리송 하기도 합니다.
어쨌건,
요즘같이 아이들 귀한 세상에
그것도 첫 손주가 2달간이나 납신다고 하니
여편네가 이것저것 준비하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래서 혹시 모기 손자라도 출입을 할까봐서
방충망도 바꾸고 장농밑 묵은 때도 닦아내고
천장과 벽에 붙은 먼지까지도 말끔하게 청소해 버렸습니다.
내친김에 베란다 창고도 정리하는데
언제 미수꾸리 해놨는지도 모르는 박스 몇개가 있어서 뜯어봤더니
무려 20여년 전에 녹화해둔 비디오 테입이 100여개나 나왔습니다.
테입에 붙은 딱지를 보니
곡명, 지휘자, 솔리스트 등 등이
1988년부터 1998년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네요.
그중에는 아이들 어릴때 촬영해 두었던 것도 있고
결혼식 테입도 있고 외국 여행 기록도 있었습니다.
일면 반갑기도 하고
또다른 면에서는 그야말로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수 있는
골동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어릴때 모습이라도 함 보고 싶어서
역시 창고에 처박혀 있던 비디오를 돌려봤더니
완전 치매증상이고 재생테잎 역시 심한 노이즈는 물론,
아예 테입이 돌아가지도 않는 것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디오 테잎을 그냥 버릴수는 없었습니다.
20여년 전 무려 200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 데크도 그렇지만
그 테잎들 녹화하느라 애쓴 생각이 나서
비디오를 수리하여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비디오 데크는 Victor HR-SC1000.
8mm 테잎도 같이 재생할 수 있는 상당히 고급기종이었습니다.
요즘은 비디오 테잎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에
수리점 찾는것도 이리저리 소수문을 해야 했고
어렵사리 찾아 수리를 맡기니
수리비용을 정할 수는 없고 일단 맡기고 가라고 합디다.
그리고 약 7일 후 수리가 완료되었다고 하여 찾으러 같더니
비용은 150,000원 이랍니다.
......!
이런 된장......!
예상보다 훨씬 웃도는 수리비에 '뭐가 문제가 있던가요?'라고 물으니
너무 오래된 기종이라 콘덴서만 수십개가 오바이트를 하고
각종 센서도 치매에 걸렸고 오디오 회로 역시 문제가 있고
전원부도 안정적이지 않아서 몽땅 들어내고 수리를 하였답니다.
쓰던 오디오라면 수리비 150,000원이 별것도 아니지만
20년 가까이 쓰지 않던 고물이고
비디오 테잎들도 제대로 재생될지 의문이거니와
앞으로 무슨 녹화를 하고 비디오를 감상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치 헛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쨌건 수리한 비디오 덱크를 가지고 와서
무려 120여개나 되는 테잎을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마누라 잔소리를 바가지로 들으면서 꼬박 3일간이나......
결론은?
너무나 감회가 새롭고 재미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눈물도 찔끔거리는 감동을 수북하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찜찜하게 지불했던 수리비 150,000원은 전혀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잘 돌아가지 않는 테잎을 흔들어 달래고
테잎을 분해하여 WD40도 조금씩 뿌려주고 해서
어찌어찌 70여개의 테잎을 살려냈습니다.
손주를 낳은 딸아이의 유치원때 모습,
생일잔치, 재롱잔치, 초등, 중등 졸업 영상은 물론이고
둘째딸 태어났을 때와 막둥이 아들녀석에 관한
여러 영상을 보니 참말로 가슴이 먹먹해져 오고
그동안의 세월의 길이가 실감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소 닭보듯 하는 여편네가
'저렇게 이뻣었나?'하는 새삼스러운 감회와
지금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늙은 영감태기일 수밖에 없는 내가
새까만 머리와 윤기나고 탱탱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유치원 재롱잔치에 뛰어놀던 큰딸아이가
벌써 결혼해서 손주를 낳았으니
'세월은 유수와도 같다'라는 옛말이 학실하게 공감되었음은
학실하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오디오질 30년이라 테잎의 상당수는 당연히 음악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테잎에서 재생되는 영상에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카라얀, 번스타인, 라파엘 쿠벨릭, 어거스틴 뒤메이. 부르노 호프만, 루돌프 제르킨 등 등.....
물론 요즘에는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영상을 찾을 수 있지만
그당시 온갖 정성을 들여가며 녹화를 뜨고
32인치 소니 트리니트론 브라운관 TV로 감상했던 감동은
절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었던 것입니다.
테잎의 화질은 VHS급이라 당연히 떨어지고 색감 재현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디오를 통해 재생되는 음질은
조금 과장하자면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물씬 물씬 묻어나와서
그동안 디지털 기기에 함몰되었던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요즈음 릴테잎을 한 번 들여볼까? 하고 고민했었는데
이정도의 음질이라면 굳이 릴테잎을 생각할 필요가 없겠다는 판단 입니다.
혹자는 부피도 크고 쓰임새도 별로 없는 비디오를 거론하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살짝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근래 재발견한 비디오 테잎의 여전한 존재감과
음악의 본질이 무엇이던가? 하는 자아성찰의 시간을 얻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조만간 용산이나 청계천으로 비디오 테잎을 구하러 갈 것 같습니다.
구닥다리 비디오 테잎의 재발견과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여편네의 잔소리는 당연히 쏟아지겠지만,
그거 어제 오늘 겪은 일도 아니고
30년 구력이면 구렁이 담넘어 가는 기술과 요령도
적잖게 터득했으니 아마 그렁저렁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구시렁구시렁 글이 길어졌네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