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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미리 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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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2 14: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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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미리 알고 있었다.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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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가입일자 : ]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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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가 개봉할텐데... 맥아더에 대해 사이버 전쟁이 벌어지겠죠.
제 블로그에도 엄청나게 몰려올겁니다. 맥아더에 대한 반대쪽(미국내) 자료가 많다보니 매년 6월 말만 되면 대거 원정오죠.
맥아더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반면에 미국(역사, 특히 전사학자)에서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여기에서 불씨를 붙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맥아더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을 존중하시고 그냥 이번에 공개된 사실만 알리겠습니다. 전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라 새로운 것도 없습니다만.
1. 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미 보고가 되었는데 묵살되었죠. 극동사령부(맥아더와 바탄갱)가 유아독존 수준이었기 때문에 비웃고 뭉갠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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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미 정부 내에서는 북한군의 남침 예견 실패를 놓고 책임 공방이 뜨거웠다. CIA, 극동군사령부를 비롯한 합동참모본부 등의 정보 부서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차에 <워싱턴 뉴스>가 1950년 9월 1일과 10월 5일에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러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이 1950년 3월 10일에 북한군의 남침을 정확하게 예측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가 "1950년 3월 10일에 6월 경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부에 보고했다" 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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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사령부는 중공군의 참전도 비웃고 뭉갰죠. 그 결과는 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2. 압록강 너머 폭격은 3차대전 발발이었다.
요즘도 압록강 너머 중공군 기지에 폭격해서 밀어버려야했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정부가 너무나도 놀라서 전쟁 중에 최고지휘관을 갈아치운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3차대전이 벌어질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트루먼이 자신이 날아갈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맥아더를 경질한 이유입니다. 중공 본토폭격 주장은 맥아더가 얼마나 북한, 중공 그리고 소련까지 얕잡아 봤는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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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Joseph Stalin)의 회담에서 중국과 소련이 6?25전쟁에서 협력을 합의한 사항이 기록된 CIA 정보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포기하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계속 싸운다. (2) 중국은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 파견한다. (3) 미국이 만주 폭격을 요청한 맥아더에 동의하는 경우 소련은 중소상호원조조약과 중소 동맹에 의거 일본의 미군 기지를 폭격한다. (4) 한국 파병으로 중국 내 병력이 부족한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은 소련군이 중국 내에 주둔하는 것을 환영한다. (5) 한국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소련은 국제 의용군을 조직해 한국에 파병한다. (6) 소련은 중국에 탱크와 트럭, 연료와 탄약 지원뿐 아니라 해공군 병력을 파견한다. (7) 중소 국경의 주요 지점에 대규모 군수품 기지를 세운다.
믿기 힘든 분은 미국자료를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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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재 |
2016-06-23 10:5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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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학자 '허버트 빅스'는 자신의 저서 에서 "1950 년 6 월 이전에 일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야 말로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해 주는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중국 대륙이 공산화 되자 1949 년과 1950 년 상반기 사이에 한국을 우선적 목표로 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일본에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대비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우선 점령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 8 군의 전투태세를 강화시키기 위한 제반 조치들이 취해졌다. 전투사단의 본격적인 전쟁을 대비한 훈련돌입과 동시에 미국의 군사기지에 대한 대폭적인 시설확장과 대대적인 보수사업이 추진되었다. 1949 년 10 월 에는 5,800만 달러를 투입하여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 설비를 확장시켰으며, 1950 년 2 월에는 약 600 만 달러를 투입하여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의 시설확장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런 군사시설의 확장이나 보수공사들과 함께 미 극동사령부는 '롤 업 Roll up' 계획이라 알려진 제 2 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각지에 흩어진 비축 무기를 재생하여 미 제 8 군 보병사단을 무장시키려는 계획을 비공식적으로 비밀리에 실행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의하여 1949 년 한 해만 해도 20 만 톤 가량의 군수품이 오키나와에서 일본으로 조달되었다. 1949 년 4 월 "대충자금 특별회계법"이 일본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미국은 일본의 군수산업을 재생시키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의 군수산업은 전쟁도발의 근원을 없애기 위하여 그 전부가 미국에 의해 몰수 되도록 되어 있었으나 예정된 군수산업의 30 %도 몰수되기 전에 배상 몰수조치가 중단되고 이들 군수산업 공장들은 미국의 지휘 하에 다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확고한 미국의 병참기지이자, 아시아에서의 반공을 위한 무기고로 자리잡게 되었다. 1949 년 이후 벌어진 일본의 병참기지화 과정이 한반도와 어떤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은 한국전쟁 중에 일본이 수행한 역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허버트 빅스의 저서 '지역 통합 전략'에는 한국전쟁에서의 일본의 역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 미국 비행기는 일본 비행장을 이륙하여, 닛산 모터와 라이센스 하에 제조된 이시데키 회사의 네이팜탄을 한국에 떨어뜨렸다. 미국 대포는 방대한 양의 일제 포탄을 쏘아대고, 미국의 제 7 함대는 일본항을 출발하여 한국 해안선에 근 3 년간 포격을 퍼부어 댔다. ........"
" 한국전쟁에 대한 군수품 조달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저장소와 여타 설비들은 일본에 소재하였다. 중요한 재건 계획은 일본의 산업설비와 노동력에 의존하였다. 그들은 군수품의 운송과 취급, 군대의 이동과 주거 공급 및 병원 수용에도 실제적인 용역을 제공하였다. ..... 전쟁의 대부분 기간 동안, 한국의 모든 군대는 주로 2 차 대전 당시의 트럭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거의가 일본에서 개조, 수리된 것이었다. "
미국은 모종의 대규모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의 효과적인 협조가 필요하였고, 이를 보장받기 위하여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을 부활시키고자 기도하였다. 이런 미국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불행한 제물로 활용되어졌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박해는 장차 있을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 중에 야기될지도 모를 배후 위협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1949 년 9 월 8 일 일본 정부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명령으로 일본에 있는 주요 한국인 조직들(한국민주청년동맹, 한국인거주자 연맹 등)을 해체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간부들을 추방시켰다. 맥아더는 또 일본의 병참기지화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일본공산당을 1950 년 3 월 3 일 불법화 시키고, 이어 6 월 1 일에는 동경시내에서의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비상계엄을 발동하였다. 1950 년 6 월 16 일에는 집회와 시위를 금지시키는 비상계엄 조치를 일본 전역으로 확대시키어 일본은 사실상의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확히 9 일 후인 6 월 25 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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