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모 교육재단 수필집에 원고가 팔려서 나 온 제 글입니다.
나라를 지키려고 교실에서 전쟁터로 간 이나라 학도군에 이 글을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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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이 담을 타 넘는 국도 변 풍경을 보면서
대전 월드컵 경기장을 돌아 조금 더 공주 방향으로 올라가니 한밭 대학교 정문 길이 보이고 이내 사방이 아늑한 봉포란 대전 국립묘지가 나왔다.
그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조국을 위해 싸운 젊은 영혼들이 그 넓은 산자락 터에 촘촘스럽게 이름표를 달고 질서정연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망자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다만 저만치 산에서 두견새가 울고 건너편 산자락에서는 머슴새도 울었다.
유월 초여름 혼들의 땅에는 차라리 살아있는 사람조차 숨을 잠시 멈추게 할 정도로
서글픈 새 소리들만이 울리고 그런 정적은 마치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
원탁으로 우르르 달려 와 모여들 듯 하다.
젊은 나이에 어느 날 갑자기 전쟁터로 끌려가 이름 모를 계곡, 혹은 강변 혹은 들판에서 단발의 총성으로 비명에 간 60년 전 청년 들이 작은 묘비 하나씩 머리 위에 받쳐 들고 있는데..저마다 처절하게 슬픈 사연을 덮어쓰고 계시는 묘들을 멍하니 한참 보노라면 살아 있는 내 가슴 속도 달리 위로할 방도가 없어 침묵뿐이다.
이곳에 영관급 묘소에 친구 부친이 잠들어 계신다.
지방에 친구와 결혼식 참석차 내려갔다가 육이오도 다가오고 하여
“울 아부지 한데 잠시 들러서 소주 한잔 따라 드리고 서울 가세”
하여 나도 잠시 들린 곳이다.
봉고버스에서 내려서 친구가 여동생을 포함해 형제들끼리 부친의 묘소에 올라간 사이 어주자는 넓은 주차장에 홀로 서서 기다리는데 먼저가신 분들의 묘들이 하나같이 어주자를 향해 사방팔방 내려다보고 있었다.
꽃피고 새 우는 행화춘절이지만 국립묘지의 이미 돌아가신 분들 모습은 사적적(死寂寂)이요 살아있는 나도 생망망(生茫茫) 이로세 하며 인생 무상함을 또 느끼는데..
그때다....대형 관광버스가 한대가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푹-쉬-익!’
하는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한번 내더니 정차를 했다.
대형 버스라서 어디 단체로 영령들을 달래로 오신 분들인가..하였는데 정작 내리시는 분은 백발이 성성하고 키가 아주 작달막한 폭삭 늙으신 노인 한분만 내리셨다.
화장실에 가시려나?...
아니지 단 한 사람의 화장실 볼일로 지나가는 관광버스가 이곳 국립묘지 주차장 안으로 들어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궁금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는데 관광버스 기사 양반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키 작은 노인을 보고 이렇게 소리 질렀다.
“어르신 빨리 갔다 오이소! 오래 걸리면 안되니더”
“예 예 내 퍼-득 갔다 옴씨더”
차에서 내린 백발의 노인 왼손에는 누런 종이쪽지가 쥐어져 있었고 노인은 버스에 내리자마자 동쪽 일반병사들의 묘 터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알았지만 경북 어느 마을 노인회 단체로 부여 백마강에 단합 대회 놀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국립묘소를 지나치게 되자
“아이고 육이오 때 죽은 우리 만술이 행님이 저기 국립묘지에 주무시니더...기사양반 잠깐만 들어가서 소주나 한잔 따라주고 가시더!...안동서 이까정 올라면 원체 멀어가가 와 본지가 오래됐니더..”
기사 양반이 안 된다고 하여도
“나도 늙어서 이제 혼자 여기 못 와 보니더..잠시만 정차 해주면 내 퍼-득 행님 묘소에 소주 한잔 따라 드리고 옴시더”
버스 기사가 난감해하자 ..노인은 오래된 무풍지 색갈처럼 슬픔이 가득내린 표정으로 다시 하소연하였다.
“제발 부탁하니더 한번만 봐 주이소 내 봄 감자 캐마 기상양반한데 감자 몇 됫박 줄낀께네 잠간 내라주면 내 퍼-턱 형님 묘에 들러서 소주 한잔만 따라주고 가시더..안크케도 이게 행님 한잔 줄랐꼬 지난 파수에 풍산장에서 산 안동소주씨더!”
안동 시골 중학교 버스기사인지라 다 알고 지내는 사인지라 결국 몇 번이고 노인이 사정하자 할 수 없이 국립묘지 앞을 지나가던 버스가 키 작은 노인을 위하여 국립묘지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키 작은 노인은 육이오 의성 전투에서 일등병으로 죽은 형님을 찾아온 것이다.
젊은 나이에 조국을 위하여 싸우다가 죽은 일반 병사 묘들은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쪽으로 당당 걸음으로 올라가시는 노인을 주시하던 어주자는 노인이 부르지도 아니하는데 슬금슬금 노인 쪽으로 올라갔다.
왜냐하면 저만치 당당 걸음으로 올라가신 노인은 손에 표 쪼가리를 들고 그 수많은 묘비 사이에서 형님 묘소를 찾지 못하여 우왕좌왕 거렸다.
종이쪽지를 몇 번이고 다시보고 또 ... .. 다시 이리 허부적 저리 허부적 하시는데 아무래도 형 묘비를 쉽게 찾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허긴 저렇게 고만고만하게 수천 명 들어선 일반사병 묘비 중에 무슨 수로 저렇게 늙으신 백발노인이 형 묘비를 금방 찾아 낼 것인가?
어주자가 서둘러 그 노인 쪽으로 뛰어 올라가니
모두가 주차장에서 자기 한 사람을 위하여 기다린다는 조급함 때문인지 노인은 거의 울상으로 종이쪽지에 적힌 형 묘비 번호를 잡고는 안절부절 이셨다.
“어르신 묘 찾기 힘드시지요?”
어주자 인사 소리에 화들짝 놀라시더니
“아이고 행님 묘가 어딘지 당췌 고만고만하여 몰씨더....10년 전에 한번 와 보았는데 저 아래 버스가 나 때문에 기다리고, 시간도 없는데 큰일 났니더”
“어르신 그 종이쪽지 주이소 제가 찾아 드릴테니”
그러자 노인은
“하이고 고마이더”
하면서 내민 누런 헌 종이에는 싸이펜으로 이런 메모가 있었다.
만술이 행님 묘 터 번호 - 무궁화동산 다열 -76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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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바랜 누런 종이를 받아든 어주자도 막상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저쪽 같니더”
하고 올라가서 확인 하면 바 열이 나오고, 다시 내려오면 번호가 틀리고.. 그 좁은 곳에 수천기가 몰려 있으니 총각으로 전쟁터로 끌려가서 낙동강 전투에서 불쌍하게 죽었다는 그 노인의 형 만술이 일병 묘비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아직 젊은 어주자마저 쉽게 묘비를 찾아내지 못하고 헤매자 노인은 불안한 듯이 자꾸 주차장 쪽을 내려다보셨다.
버스가 빨리 내려오라고 빵빵 거렸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덩달아 어주자도 당황스러웠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드디어
“일병 김만술 의성 전투에서 전사”
라는 묘비를 확인했다.....어주자 얼마나 기쁜지
“어르신 이쪽으로 오이소 찾았습니다!”
소리 지르자 몇 줄 아래쪽에서 서성거리던 노인이
“어딧껴 어딧껴?”
하시면서 헐레벌떡 달려 오셨다.
달려 온 노인은 초라한 비석에서
“김만술”
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급히 주머니에서 새우깡 한 봉지 그리고 오징어 하나를 묘비 앞에 놓고는 소주 한잔을 종이컵에 채우시더니 넙죽 엎드리면서
“행님..만술이 행님 아이고 만술이 행님 나 만복이 왔니더!
아이고 우리 행님아! 우리 행님아! 50년 전 꽁보리 밥 한 그릇 먹고 너부렁재 넘어 전쟁터로 끌려가실 때, 행님 손 흔드시던 모습 아직도 만복이는 못 잊니더
못 잊니더 아이고 행님아! 아이고 만술이 행님아!”
노인이 엎드려 두런두런 이야기 하시더니 드디어
“너부렁재 넘어가면서 손 흔드시던 모습...”
대목에선 울컥 슬픔을 못 참고 어주자가 옆에 있거나 말거나 어린아이처럼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울음이 절반인 목소리로
“행님 장가도 못가고 어메가 급히 삶아 준 꽁보리 밥 한 그릇도 다 먹지 아니하고
내보고 남은 것 먹으라 카시고 너부렁재 넘어 전쟁터로 간 우리 행님아! 저승에선 잘 있닛껴..어-이구 이승에서 장가도 못 갔는데 저승에서는 장가는 가싯니껴? 허이고 허이고 어이...그질로 가서 영영 고향 집에 안돌아 오실 줄 알았다면 이웃 집에 쌀 한 됫박이라도 빌려서 꽁보리밥 말고 이밥 한 그릇 먹여서 보내야 하는데 ..어메는 형님 떠난 이후 돌아가실 때 까정 한평생 우리 만술이 불쌍타! 우리 만술이 불쌍타!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짓다가 돌아 가싯니더...아이고 불쌍한 만술이 행님아!
꺼이꺼이 목에 핏줄까지 떨면서 어린아이처럼 우시는 노인의 울음은 참으로 서글펐다.
엉거주춤 옆에서 기다리던 어주자도 덜컥 눈물이 솟기 시작했다.
주름진 얼굴에 눈물 자욱이 비치고 노인의 입은 아이처럼 삐죽거리시면서
“아이고 우리 행님 만술이 우리 행님! 길도 멀고 농사 일로 자주 못 찾아와 봐도 행님 제삿날은 너부렁재 길목까지 나가서 해마다 소주 한잔 따라놓고 울었니더 행님 우리 만술이 행님!..."
한참을 엉엉 울더니 일어서서 다시 소주잔을 가득이 부어 묘 터에 돌아가면서 뿌렸다.
소주를 뿌리시면 서도
“행님...저승에서 장가는 들었닛껴! 아이고 우리 행님아... 장가도 못 가보고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서 죽은 우리 행님아! 저승에서 결혼은 했닛껴?“
어깨를 들먹이면서 노인은 또 이런 말을 토하시면서 울먹이시는데 어주자도 도저히 눈물이 나서 그 모습을 더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뒤에서 노인과 죽은 만술이 행님의 슬픈 넋두리 대화는 계속 되었다.
“행님..나 시간 없어서 이제 가 봐야 하오...행님 오늘이 마지막이요...나도 제 작년 할망구 먼저 죽고 작년부터 몸이 안 좋아요, 그러니 쪼매만 기다리시요 나도 한두 해 더 살다가 행님 사시는 저세상으로 갈 터이니 우리 그때 만나서 못 다한 이야기 합시다...만술이 행님 부디 잘 계시요... 만복이 갑니다. 잘 계시욧!”
마지막 말
“잘 계시욧!"
하실 때는 원망인지 격정인지 화가 난 듯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눈물을 훔치시면서 발길을 돌려 주차장으로 내려오던 그 백발노인은 어주자를 보더니
“행님 묘 찾아줘서 참 고맙니더..하마터마 오늘 행님도 못보고 갈뿐 했다 아잇껴!”
노인의 그 인사말에는 아직도 절반은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저만치 주차장에서 관광버스 기사가 이쪽에 어주자와 인사를 나누는 노인을 보고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였고 서둘러 노인이 당당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갑자기 어디서 두견새가 또 슬피 울기 시작 하였다.
그 두견새 울음은 마치 조금 전 젊어서 장가도 못 가보고 육이오 때 죽은 행님 묘에 엎드려 엉엉 울던 그 목소리를....너무나 흡사하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50년 전에 19살 젊은 나이로 조국의 부름을 받고 꽁보리밥 한 그릇도 채 다 먹지 못하고 철없는 동생에게
“어메 잘 모시거라 내 퍼-득 갔다가 오마!”
하면서 너부렁재를 넘어갔던 만술이 행님의 영혼이 돌아온 듯하다.
끝.
어주자가 대전 국립묘지에 갔다가 어느 늙은 노인이 작은 묘비 앞에 엎드려
꺼이꺼이
“만술이 행님”
부르는 서글픈 사연에 목이 멨던 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