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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명장설, 경기도문화포털이 앞장서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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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8:3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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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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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명장설, 경기도문화포털이 앞장서겠습니다?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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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가입일자 : ]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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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시는 분 같은데...,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하고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고, 님도 논문을 써서 당당하게 나가는 게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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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링크를 따라 경기문화포털에 들어갔습니다. 문제의 대목;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자 조정과 도원수 권율은 부산포의 왜 군 본진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부산포 공격은 이순신을 파직하고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산포 공격은 수 많은 난제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1597년 당시 왜군의 전투력은 왜란 초 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강되었고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전술 도 잘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수군도 함선을 새로 건조하고 군졸들을 훈련시켜 전력이 증강되었지만, 전염병 등으로 입은 손실이 컸고 무엇 보다 이순신 휘하에 있었던 장수들이 원균의 지휘를 받지 않으려 하면 서 결속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더구나 경상도 해안이 왜군에게 점령된 상황에서 수군 단독으로 공격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어 뛰어드는 격이 었다. 원균은 육군과 수군의 합동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 만 원균의 주장은 도원수 권율에 의해 묵살되었다. 냉정함을 상실한 상 태에서 결행한 한두 차례의 작은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출전을 머뭇 거린다는 이유로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았다. 원균은 치욕에 몸을 떨었 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면서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설 줄 몰랐던 용장 에게 곤장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해 원균은 틀어 박혀 술만 마셨다.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의 패배는 참혹 한 것이었지만, 패배는 예상했던 일이 현실화된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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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 필자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은 생각컨대 '육군-수군 합동작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수전은 예외없이 연안 전투였으므로 육군-수군 합동작전이 상식이었습니다. 임진란에서 왜군 패배의 결정적 포인트가 바로 이 대목이었습니다. 일본수군이 이순신한테 판판이 깨지는 바람에 육군의 전라도 진입에 실패했고, 이게 전황의 대국을 그르쳤다, 이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분석이었습니다. 정유재란 때 수군을 특별히 신칙한 게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윗글에 보다시피, 원균은 수군 단독 출정을 강요당했습니다. 한바다 전투가 아니고, 본영을 공격하는 데 수군 단독작전? 누가 봐도 몰상식한 작전이지요.
칠천량 패전은 원균한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권율의 책임도 따져야 맞고, 권율의 책임을 따지자면 당시 전황이 전체적으로 어떠했는지, 그리고 권율의 판단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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