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6년 4월 19일 (화요일)
■ 대담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앵커 최영일 시사평론가(이하 최영일)>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반발해 학생과 시민들이 앞장서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 오늘이 4.19혁명 56주기입니다. 정면인터뷰, 오늘은 4.19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 가져보겠습니다. 역사학자죠.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 연결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이하 한홍구)> 네, 안녕하세요.
◇ 최영일> 오늘 4.19혁명 56주기인데요. 요즘 젊은 층들은 교과서에서만 배우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4.19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요. 아쉽게 생각하시죠?
◆ 한홍구> 네,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났죠. 갑오농민전쟁이나 독립협회만큼 시간이 많이 흐른 거니까, 학생들에게 잊혀지는 것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이것이 우리 헌법에 대한민국의 존립 근거로 나와 있습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잘 기억해야죠.
◇ 최영일> 제가 어릴 때는 ‘4.19의거’, 이렇게 배웠는데요. 지금은 4.19혁명으로 부르죠. 언제부터 혁명으로 승격된 건가요?
◆ 한홍구> 원래 혁명이지만, 혁명이라는 게 정권이 무너진다고 해서 다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죠. 그 이후에 체제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혁명이라고 말 할 수 있을 텐데요. 4.19가 지속되지 못한 것은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4.19가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5.16 세력이 4.19를 격하해서 의거라고 부르고, 5.16을 혁명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렇게 되어 있다가 비로소 현행 헌법에 와서 4.19 정신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게 되었고, 문민정부 이후에 당연히 4.19혁명이 제자리를 찾은 거죠. 5.16은 군사반란, 쿠데타, 아주 좋게 이야기해줘야 정변 정도로 평가가 되는 거고요.
◇ 최영일> 네, 4.19와 5.16의 이어진 관계가 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 한홍구> 그렇죠. 둘 다 혁명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최영일> 지금은 87년 헌법에 4.19혁명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거죠?
◆ 한홍구> 헌법에는 4.19혁명이라고 나오지는 않고, 4.19 민주이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87년 6월 항쟁 이후에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군사독재 세력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걸 온전하게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했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미완의 혁명이라는 것은 4.19가 추구했던 여러 가지 좋은 가치들, 그런 것들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지 못한 까닭이죠.
◇ 최영일> 그렇군요. 4.19가 왜 일어났느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한 학생 시위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발단과 배경, 교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한홍구>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3.15 부정선거를 굉장히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뽑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렇게 흔히 생각하는데요. 사실 한국 정치사가 대단히 불운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그때 무투표 당선이 된 셈이었습니다. 야당 대통령 후보가, 56년 선거 때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병사했고요. 그래서 조봉암 후보로 채웠는데 조봉암 후보가 기대 이상의 선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후보하고 붙는 것을 겁을 내가지고,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서 조봉암 후보 죽여 버렸죠. 59년 7월에요. 그리고 이듬해 해가 바뀌어서 60년 3월 15일에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되는데, 야당의 후보는 조병옥 후보였는데, 이분이 2월 15일에 돌아가셨어요. 후보 등록이 끝난 상태에서요. 그런데 그때 후보가 이승만과 조병옥 두 분만 등록을 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정, 부통령제였는데, 부통령이 권한은 없었지만 대통령 유고시에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그때 나이가 86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임기를 정말 끝마칠 수 있을지, 빠듯한 상황이고, 그래서 부통령 자리를 꼭 자유당이 차지해야 되겠다, 그래서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통령 선거에 집중적으로 부정이 진행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학생들이 저항을 하게 되었고요. 4.19가 갖는 의미는,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이식된 측면이 좀 있습니다. 3.1 운동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고 실제 민족 해방투쟁은 열심히 했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할 기회는 사실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분단이 되고, 미군정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이식이 되긴 했지만 그 민주주의가 우리 것으로 되는 과정이 4.19였죠.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 어린 학생들이 피를 흘려가면서 수입된 민주주의를 우리의 민주주의로 토착화 시키는 과정에서 4.19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겁니다.
◇ 최영일> 지금 말씀하신 그 대목인데요. 4.19혁명이 정치인도 아니고 정당도 아니고 정권 교체를 바란 특정 세력도 아니고, 말씀하신대로 순수하게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해서 시민 참여로 완성되었다, 이 대목이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이겠죠?
◆ 한홍구> 네,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이렇게 나섰다는 게 아주 유래가 없는 일인데요. 사실 한국 역사의 불행한 측면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든 세력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노동도 그렇고, 청년도 그렇고, 농민도 그렇고, 여성도 그렇고, 지식인들도 그렇고, 다 파괴되고 학생만이 그래도 좀 남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에게 굉장히 무거운 짐이 지어졌고 학생들도 회피하지 않았는데요. 그 당시 학생들의 특징, 4.19 세대의 특징이 뭐냐면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4.19 때 20살이었으면 1940년생 근처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기 직전에 우리가 해방이 된 거죠. 그래서 우리말로 교육을 처음 받았고요.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입니다. 현실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를 했지만 책에서는 민주주의를 배웠기 때문에 그 세력이 민주주의가 유린당하는 현실, 그것에 항의할 수 있었던 것이죠.
◇ 최영일> 일제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은 우리 해방 후 교육의 첫 세대, 이런 말씀이시네요?
◆ 한홍구> 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중고생들이 4.19를 주도하기도 했는데요. 고등학생들의 사회적 지위가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높았습니다. 고등학생이 문자 그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요. 집안에서 제일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그리고 평균 수명이 짧기 때문에 20살 가까이 살면 인생의 3분의 1을 산거예요. 그래서 사회적인 대접도 고등학생이라면 무척 셌죠.
◇ 최영일> 네, 그러면 4.19의 성과, 교수님은 어떻게 정리해주시겠어요?
◆ 한홍구> 4.19는 처음에 이승만의 하야까지 목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이승만은 그 당시에 절차적으로는 문제없이 당선이 되었거든요. 학생 데모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도 자유당 정권에서도 겨우 4월 23일, 4.19가 지나고 4월 23일에 이기붕씨가 부통령 사퇴를 고려하겠다, 사퇴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미온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승만 물러가라’하는 구호는 25일, 26일 경에야 비로소 나온 거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승만 정권이 물러났다는 것은 학생들이 기대하기 어려웠던 성과였습니다. 4.19가 정권 붕괴 이후에 동력을 잃었다고 할까요.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헤맨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요. 그건 학생들이 준비했던 상황 이상으로 상황이 전개 되었고, 그 이후 상황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 거죠.
◇ 최영일>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서 피 흘린 과정이 엄연히 있었던 건데요. 최근 들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이런 지적도 일부 있는데, 교수님은 어떤 생각이세요?
◆ 한홍구> 심각한 후퇴를 부인할 수 없죠. 오죽하면 여당 원내대표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하고 외치면서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또 하나는 4.19가 일어나던 시기가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대통령 후보가 세 분이나 연달아 죽거나 죽임을 당하는 상황, 거기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는데 시민들이 나서서 세상을 바꾼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이번 4월 총선을 보면서 정말 우리 시민들의 위대함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선거를 통해서, 이것이 혁명까지는 안 되지만 정말 중대한 변화의 단초를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가 항상 꽃이 만발한 게 아니고, 어두운 시기를 겪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우리가 자각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 최영일> 네, 교수님 끝으로 지금 21세기인데요. 우리가 4.19, 순국선열이라는 말 쓰지 않습니까? 4.19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기 위해서 지금 현재 우리가 해야 할 과제, 뭐라고 보세요?
◆ 한홍구> 4.19처럼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정권을 무너트리는 시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주주의도 많이 발전했고, 사회도 복잡해졌고요. 하지만 학생과 시민들이 주역이 되어서 세상을 바꾸고, 특히 이번 투표에서도 변수가 20대, 30대 아니었습니까? 20대, 30대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굉장히 답답한데, 그건 20대, 30대가 잘못해서 이런 세상이 만들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4.19 당시에도 학생들이 잘못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그 지경까지 갔던 것은 아니고요. 그렇지만 20대, 30대, 또는 4.19 때의 학생들이 세상 문제에 참여하고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앞으로 자기가 살아갈 세상을 자기 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힘을 믿었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역사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우리가 다 같이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아마 지금 4.19를 잘 계승하는 길일 겁니다.
◇ 최영일> 알겠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한홍구> 네, 감사합니다.
◇ 최영일> 지금까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