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을 읽다가 놀란 게 여기 증언하는 분들 중 이강로 님은 내가 교대 다닐 때 국어교육과 교수로 계셨던 분입니다.
한글학자 최현배 님의 수제자셨는데 학생들에게 바른 한글 사용을 항상 강조하시고 잘못 발음하는 경우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없으셨습니다.
교대부초에서 교생실습 나가서 시범 수업하던 여학생이 수업 중 학생들에게 "여기 꼬시 예쁘게 피었죠?" 했다가 이 교수님에게 눈물을 을릴 정도로 혼이 났었지요. '꽃이'는 '꼬치'라고 해야지 "꼬시"라고 했다고...
초등교사가 바른 국어를 구사해야 어린이들이 바른 국어를 배운다는 게 그 분의 지론이셨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전래되는 우리의 고유말을 쓰도록 강조하셨습니다. 예로 '공병'이 아니고 '빈 병'으로...
그래선지 나 역시 지금까지도 바르게 발음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우리 한글을 지키기 위해 일제 강점기때 국어학자들은 물론 그들을 지원하는 사업가까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에 대한 증언들이니 꼭 읽어 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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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왕 정세권, 고문 당한 것도 모자라 3만5000평 서울 땅 빼앗겨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문에 이어 재산마저 강탈
김경민 서울대학교 교수 2016.04.01 10:20:57
1930년대 중반, 일제는 내선일체을 내세우며 우리말과 한글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였고 학교 안에서의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1935년 자체 회관을 갖추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조선어학회는 눈엣 가시였다.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매일같이 화동 129번지 학회사무실에 출입하면서 감시하고 있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박용규 지음, 한글학회 펴냄, 2012년), 199쪽)
조선어학회 참여 회원들의 면면을 보면,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어학회를 의심의 눈길로 볼 수밖에 없다. 3.1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과 반일 민족주의자 주시경의 제자 그룹, 민족 종교인 대종교 신봉 인사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참여한 민족 운동만도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 신간회,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사건, 재만 조선동포 학살 사건 위문 활동, 대동단, 대동청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록회 사건 등 다양했다. 따라서 일제 시각에서는 문제적 인물들이 대거 모인 조선어학회는 민족운동의 소굴이었고 언젠가는 손 볼 대상이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52쪽)
조선말 큰 사전 편찬에 헌신한 이강로의 증언이다.
"나는 1940년부터 조선어학회에 기웃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 조선어학회 사건이 난 줄도 모르고 어학회 건물 근처에 두 번 갔더니, 조선인 출신 일본 형사들이 어슬렁거리다가 나를 불렀습니다. '너 이리 와봐'라고 해서 가니, 형사가 두 번 내 뺨을 때려 맞았습니다. 형사가 '조그만 자식이 독립하러 다니느냐. 다 안다.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라고 말하며…" (이강로의 증언,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56쪽)
이런 문제 단체의 회원이며, 회관을 지어주고 각종 활동을 지원한 정세권은 일제 입장에서는 조선어학회 돈줄로 파악되었기에, 정세권 역시 그들에게는 선순위 감시 대상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옭아내기 위해 의도한 것이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53쪽~155쪽) 1942년 9월 함흥 영생여학교 학생의 편지 내용을 꼬투리 삼아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을 고문하여 자백서를 쓰도록 강요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학회 회원들을 대거 검거하기 시작한다. 일제는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학회 핵심 회원과 사전 편찬을 후원한 찬조 회원을 대거 연행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57쪽)
▲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의 현충사 방문 기념사진. 앞 줄 맨 왼쪽에 정세권,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이극로, 같은 줄 네 번째에 안재홍. ⓒ한글학회
일제는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한징, 안재홍을 포함하여 핵심 33인을 검거하였는데, 33인 숫자는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과 수를 맞추려는 일제의 속셈이 있었다. (<반세기의 증언>(이인 지음, 명지대학교출판부 펴냄, 1974년), 134쪽 /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58쪽) 이들과 함께 증인으로 붙들려가 심문을 받은 8인 (주요 후원 그룹)이 있는데, 이 중 정세권이 들어간다. 검거된 이들이 받은 고초는 대단했다.
핵심 회원으로 고문을 당한 김윤경의 증언이다.
"고문의 종류로 말하면 물 먹이기, 천정 들보에 매달고 치기(소위 비행기태우기), 몽둥이로 난타하기, 사지로 버티고 개처럼 엎드리게 하기, 난로 불에 타던 장작개비로 벗은 몸을 지지기, 목도로 정강이를 산적 이기듯 난도질하기, 뺨치기, 발길로 차기, 유도 식으로 메어치기, 먹으로 얼굴에 그림이나 글을 써 붙이고 여러 사람 앞마다 돌아가면서 능욕적 문담 시키기, 찬 물이나 뜨거운 물을 끼얹기…(…) 이극로는 처음 함흥경찰서에서 첫날에 2번, 둘째 날에 3번, 셋째 날에 2번 모두 일곱 번이나 죽었다 살아났다. 이윤재는 물 먹는 고문을 몇 번이나 당했는지 유명을 달리하였다." (김윤경의 증언 /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64쪽~166쪽)
김윤경 본인도 6번이나 기절하였고, 이인(초대 검찰총장)은 가격을 당해 앞니 두개가 빠지고 양쪽 귀가 찢어졌다. 이만규도 귀 한 쪽이 크게 손상되었다. 가장 아픈 부분은 수차례의 물고문과 난타를 당하여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이 옥사한 것이었다.
또한 이극로가 당한 고초는 대단하였다.
"이극로는 비행기 타기를 열 두 번이나 당하였다. 십여 분 동안 두어 차례나 죽은 상태에 있었다. 처음에는 고통을 못 이기어 큰 소리로 부르짖더니, 조금 지나면 혈맥이 막히어 잠잠하게 되었는데, 기진맥진하여 까물치어 죽은 모양에 이른 듯 했다.
그는 혹독한 난타로 손톱과 발톱이 빠져서 병신이 되었으며, 몸에 흠집이 생기었고, 늑막염이 생기어 수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난타로 말미암아 볼기와 사지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부르터서 돌작밭(자갈밭)처럼 된 일도 있었다."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 166쪽)
정세권 역시 당시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함경도로 15일 동안 끌려가서 (아버지도) 고문을 당하셨어요. 학자 분들이 많이 끌려갔죠.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학자가 아니에요. (일종의 학회) 고문이었죠. 그런데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셨어요.
당시, 병원에 갈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명래 씨가(재래 의약의 거두이며 해방 후 가정상비약으로 유명했던 이명래 고약의 발명가) 오셔서 아버지를 끼고 치료해주셨어요. 그래서 살아나셨죠.
그 다음에 이극로 선생님이 고문 당해가지고 (우리가 그 때 살던) 혜화동 집으로 오셨어요. 오셨는데 그냥 바지 뒤가 전부 피투성이였어요. 고문당한 이야기를 아버지랑 한참 하시고 가셨어요."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5년 9월)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단순한 고문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상당한 재산을 일제에 빼앗긴다. 아래는 한글학회지에 실린 첫째 아들 정균식 님의 글이다.
"1935년부터 애국 단체인 조선어학회에 회관을 기증하고 그 사업에 필요한 일체의 재정적 뒷받침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한편, 안창호, 안호상, 이인, 이은상, 김성수 등과 더불어 양사원을 조직하여 이인과 함께 역시 재정적 뒷받침을 하였다.
1942년 일본 경찰이 조선어 학회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을 트집하여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일제 검거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정세권도 흥원으로 붙잡혀 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얻은 병으로 오래되지 않아 우선 석방되었다.
그러나 우리말 사전 편찬 그 자체가 별로 대단한 죄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안 일본 경찰은, 양사원 문제와 상해 임시 정부와의 관련 문제를 들고 나와 죄를 더 무겁게 하려고 갖은 악형과 모멸을 다하였다. 결국, 그들은 서울에 정세권의 사유지 수만 평이 있음을 알아내어, 이를 거저먹을 양으로 갖은 위협을 가하였고, 심지어는 경제범으로 몰아 1943년 6월 18일 서울 동대문 경찰서에 구치하여 온갖 협박과 압력을 가하여, 성동구 자양동에 있는 3만5279평의 사유지를 그들의 '대화숙'에 조공하라고 강요하였다. '대화숙'이란 우리 민족에게 이른바 그들의 '대외혼'을 주입시키기 위하 세뇌 기관으로서, 정세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말 할 수 없는 고통과 모멸을 덜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에서도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방적으로 1942년 11월 16일 1만2697평은 판 것으로, 2만2582평은 증여하는 형식으로 꾸며, 1943년 6월 23일 등기를 완료하였다. 물론 이때까지 정세권은 정시 통제 경제 법률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서울 동대문 경찰서에 구치되어 있었다." (정균식, '기농 정세권의 애국 운동 줄거리', <한글새소식> 131호, 한글학회, 1983년, 22쪽)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흥원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여 돌아왔고, 1943년 다시 경제범으로 몰려 동대문 경찰서에 끌려가 재산을 강압적으로 탈취 당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랑 오빠도 같이 잡혀 들어갔었죠. 처음에는 당신과 아들을 빼어 줄 테니 돈을 내라고 아는 사람을 통해서 회유했어요. 아버지가 거절하셨죠. 그런데, 조선어학회 동지들이 눈앞에서 고문 받는 것을 보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대요. 고문이라도 덜 받게 하려면 일제가 원하는 대로 재산을 줄 수밖에 없었대요."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년10월, 2014년 2월)
민족 자본가로서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심적 신적 고초를 겪었고 재산마저도 일제에게 강탈당한 것이었다.
정세권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핵심 회원들은 심한 고문을 받은 동지였다. 그렇기에 그들 간의 인연은 끈끈하였다. 이극로와 함께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최현배를 유족은 기억한다.
"조선어학회 때 고문당하신 분들끼리 나중에 같이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항상 서로 연락이 되어 있었죠. (정세권은 6.25 동란기 다리를 다쳐 미처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홀로 있었다). 서울 수복 후, 최현배 선생님이 아버지 걱정이 되었더니 아버지 뵈러 들렀다고 들었어요."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년 10월, 2015년 9월)
"아버지 돌아가시고 맨 처음에 분향하러 오신 분이 최현배 선생님이었어요." (막내 따님 정남식 님 인터뷰, 2015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