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에 실린 기사를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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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올해 52세다. 작년 연말 퇴직했다. 해외 명문대를 나와 외국계 기업에서 잘나가다가 삼성 임원으로 스카우트됐다. 그때는 삼성, LG, SK,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이 진공청소기처럼 인재들을 빨아들였다. 로봇이니 풍력이니 바이오니 신사업 구상들도 거창했다. 이 분야에 나만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으니 어디서든 연락이 오겠지 했는데 두 달이 지나도록 감감이다. 헤드헌터는 "요즘 구조조정이니 조직 개편이니 알게 모르게 밀려나는 40·50대가 엄청나다"고 했다. 스펙이 좋을수록, 직위가 높을수록 더 힘들다고 했다. "최소한 6개월~1년은 각오하시라"는 말도 덧붙였다. 모르는 이들은 삼성 임원을 오래 했으니 최소한 먹고살 걱정은 없겠다고 하지만 기러기 생활 8년째다. 쉰두 살부터 놀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고 애들 대학 졸업시켜 장가 보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2. 나는 1968년생, 한국 나이로 48세다. 그래도 아직 40대니 50대보다 낫지 않겠나 생각했다. 해외 명문 MBA를 나와 증권사와 통신업계를 두루 거치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됐다. 증권사 애널리스트할 때는 기업체 IR총괄이나 재무총괄로 모셔가겠다는 제의가 많았다. 막상 나와 보니 어느 업종이나 스카우트는커녕 있는 사람 자르기도 바쁘다. 벌써 백수 5개월째다. 20년 넘게 살림만 한 와이프는 내 눈치만 본다. 집 근처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했더니 헤드헌터가 기겁을 한다. 그 시간에 차라리 구직활동이나 열심히 하란다.
#3. 나는 1963년생이다. 외국계 기업을 두세 군데 옮겨다니며 20년 넘게 관리회계 업무만 했다. 서류를 낼 때마다 나이가 많다고 난색이다. 눈높이 낮추라고 해서 부장, 팀장급으로도 지원했다. 구직 사이트에 이력을 올려놓으면 제일 먼저 연락오는 게 보험회사다. 사무실 제공, 월 100만원 기본급을 준다. 그나마 성과를 못 내면 잘린다. 이제 겨우 1년이 지났는데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친구들은 "그래도 와이프가 교사라서 얼마나 다행이냐"고들 하지만 대출 끼고 산 목동 주상복합아파트가 밤마다 목을 죄어온다.
#4. 나는 헤드헌터다. 외국계 헤드헌터 회사에서 20년 넘게 일하고 있다. 요즘 "잡 마켓(Job Market)"은 20년래 최악이다. 멀쩡한 40·50대가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어지러울 정도다. 노후 대비도 안 돼 있고 자식들은 한창 돈 들어갈 때다. 40대 후반~50대 초반에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부·차장으로 퇴직한 사람을 재취업시키는 게 제일 어렵다. 한 회사에서 20~25년 근속한 대기업 부장들은 시장에선 찾지도 않는다. 5~6년 전만 해도 대기업에서 퇴직하면 그다음 레벨 기업들, 예를 들면 웅진, STX, 팬택 같은 곳에서 받아줬다. 지금은 그럴 만한 중견기업이 없다. 숫자로 따지면 대기업 0.1%, 중견중소기업 2.8%, 소기업·소상공인 97.1%이니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벤처·청년 창업에 목 매지만 전체 고용의 37.6%, 양질의 일자리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중견기업들이 소리 소문 없이 무너지는 중이다. 대기업 인사담당자들 만나보면 물량 조절을 하는 듯하다. 내보낼 인원이 아직 많은데 어떻게 하면 사회적 충격을 최소화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인상이다.
#5. 나는 40대 애널리스트다. 지난해 12월 기준 미국 대졸자 실업률이 2.9%까지 떨어졌다. 거의 완전 고용 수준이다. 젊은이들 몸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일본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전례 없던 자신감과 낙관론이 팽배하다. 엊그제 일본 출장을 갔더니 십수 년 동안 고작 점심이나 사던 일본 증권사 부장이 호기롭게 2차를 가자고 했다. 50%를 상회하는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결코 허상이 아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나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글로벌 마켓에서 한국시장은 있으나 마나 한 신세가 된 지 오래다. 단언컨대 이대로 가면 10년 뒤에는 2015년이 그나마 살 만했다 하게 될 거다. 정부는 갈수록 갈팡질팡 우왕좌왕 무능의 극치다. 꼴 보기도 싫고 지긋지긋하다. 투표 용지에 도장 찍었던 순간이 너무 후회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