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엔 작은 감나무가 두그루 있었다.
익어야만 먹을 수 있는 떫더름한 재래종감
지금은 베어내고 단감나무를 심어서 어느정도 자랐지만
관리가 안된다.
그래선지 해걸이를 한다.
우리집은 동네서 상수리집으로 통했다.
양지바른 언덕위에 자리잡은 우리집 입구엔
커다란 상수리 나무가 4그루 있었다.
여름이면 거기에 그네를 매어
고만고만한 또래들이
그네를 타곤했다.
옆에있던 까만 토종돼지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꿀꿀꿀"
꿀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리고 저녁이면 엄마의 팥죽(지금은 팥칼국수라고 불림:검나 친절한 필자 주)을
모두 한그릇씩 먹고 귀가했다.
대문은 따로 없었고
울타리엔 탱자나무를 가지런히 심어놓아
탱자가 주렁주렁 열렸었다.
한번은 친구가 놀러 왔다가
장닭에게 쫓겨 달리다
어깨에 올라타 쪼아대는걸 뜯어 말리기도 했었다.
우리집 아랜 100년은 됨직한 동백나무집에
이웃4촌과는 거리가 아주아주 먼 영감/할멈
단둘이 살고 계셨다.
외동아들은 일찌감치 서울에서 살고있어 명절때만 가끔 얼굴을 비췄다.
영감님은 일찌감치
촛병이라고 동네에서 명성이 잦았다.
읍내 장날이면 귀가하는 소리가 동구밖에서
온동네 떠나갈듯 우렁차게 들렸다.
물론 좋은소린 아니고
누구에게 하는지 왼갖 욕설을 해댔다.
우리집과 달리 그집엔 감나무가 참 많았다.
그것도 키작은 단감나무
그리고 해년마다 주렁주렁 단감이 열렸었다.
하지만 이웃 4촌과는 아주 멀어서인지
"하나 먹어라"고 단 한번도 내어주지를 않았다.
난 가끔 손닫는 곳의 감을 하나씩 따먹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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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지난 어느 따뜻한 날~
친구 동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놀러왔다가
그집의 단감을 몇개 땄나보다.
그날저녁!
고래고래 우리집을 향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음날
그 감나무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몇년후 돌연
졸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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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 동생은
몇년 후 4촌 형수와 눈이 맞아
인천에서 아들낳고 잘산다는 소문에 이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4촌 형수(동네 형님이라서 형수님이라 불리던)였다가 제수씨가된 여인은
남매를 버리고 4촌 시동생과 인천에 숨어 살다가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아들을 키우고 산다는 소문만 들었고
이후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시절 내겐
";아 난 저 아저씨처럼 살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