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면 손을 먼저 관찰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육체 노동을 하는지 사무실 근무를 하는지 뭐 그런 것 까지는 모른다 해도
성격이나 성향 등을 간단하게 파악할 수도 있는데, 대부분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성의 특정 신체부위에 유달리 집착하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아는 어떤 녀석은 여자의 손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모든게 마음에 들어도
손이 안 예쁘면 싫다는 것이었는데, 결혼 직전까지 이르렀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굵직한
여자의 발목때문에 결국 포기하고야 만.. 아픈 기억이 있는 내 입장에서는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하얗고 매끄럽고 곱게 잘 빠진 여자의 손은 그 여러가지 상징성으로 인해 남자에겐
거부할 수 없는 로망이 될 수도 있으리라.
급행열차로 다섯 시간 거리를 토요일 근무 끝나고 야간열차로 달려와
잠깐의 데이트 후에 월요일 출근을 위해 일욜 오후 열차로 돌아가던 그녀에게
단지 발목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삼개월여의 연애 끝에 연락을 끊어버리는
못된 나를 지금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땐 그게 왜 그리 중요했을까..
그 것 빼놓곤 다 좋았는데..
만난지 두번 째 날,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란 영화를 좌석도 없이 입석으로 같이 보게 됐다.
갓 만나 서먹서먹 하던 때.. 하필 '채털리 부인의 사랑' 이라니..
그것도 입석으로.
앞사람이 가로 막아 까치발을 하며 영화를 보던 그녀의 두툼한 발목은
연애기간 내내 두고 두고 나를 괴롭혔다.
지금이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인데......
사무실이 있던 동네에 아담한 분식집이 하나 있었다.
주인은 삼십 초반의 활달한 여자였고 주위에 사무실이 많아 점심을 배달해주기도 했는데
수시로 배달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뭐, 오토바이도 아니고 머리에 이고 가져다 주는 일이라 쉽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날 이십 대 중반 쯤 돼 보이는 여자가 밥쟁반을 머리에 이고 들어섰다.
젊은 여자가 하기엔 좀 그런 일인지라 의아해 하는 우리 앞에, 해맑게 웃으며
밥을 내려놓는 모습에 .. 사실 첫 눈에 쏘옥 마음에 들어버렸다.
조금 당돌하기도 한 성격의 그녀는 가끔 건네는 농담에도 스스럼 없이 시원시원한
반응을 보여주다 결국 나의 데이트 신청을 받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렇게 몇 번을 만나다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보았다.
순간 흠칫하며 손을 빼던 모습에 조금 의아 하면서도 짧은 찰라에 느껴지는 투박한 감촉은
이십대의 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칠었다.
그 뒤론 손잡기가 꺼려져 한두 달을 그냥 만나다 제법 취한 어느날
그녀의 입을 통해서 애달픈 까닭을 듣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환경 때문에 고생하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도시로 떠나와
온갖 일을 해보다 의류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고 인정받기 위해 밤낮 없이 미싱을
만지며 옷가지와 씨름하다 보니 이제 제법 자리가 잡혀 의류 대기업에서 샘플을 만드는 부서의
책임자 자리에 까지 올랐지만 그동안의 험한 여정에 많이 지치고 힘들어
일년 쯤 휴직하고 올케가 운영하는 분식점을 심심풀이로 도와주기 위해 나왔다 말하며
밝은 조명 아래 어렵게 내민.. 해맑은 얼굴과는 극명하게 엇갈리는 그녀의 작은 손은 ..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마치 농사로 수십년을 잔뼈가 굵은 육십 대 여인네의 손처럼 굵은 주름이 갈라 패이고
거친 살가죽이 딱딱한 거북이 등처럼 되어버린 손은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 손 하나에 .. 살아남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치열하고 맹렬하게 살아온 그녀의 길지 않은
이십여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뭐라 위로하면 주제넘은 일이었고 한참동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길지 않은 만남 끝에 컴플렉스가 되어버린 학력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그 거친 손도, 길지 않은 그녀의 학력도
모두 다 의미를 잃게 만든 누군가와, 한지붕 아래서 눈물나게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믿어 소망해본다.
그 모든 것이 덧없고 허망한 것을..
흐르는 세월 앞에 .. 화려했던 젊은날의 영화 대신 오랜 헌신과 사랑의 훈장으로 숙성되어가는
여인네의 손을 지켜보며
보이는 것에 매몰되어버린 내면의 진실과 그 이야기에 경의를 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