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한적한 변두리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인데,
가을만 되면 ,그리고 억새풀만 보면 생각나는 일이랍니다.
......논두렁에 가을이 되면 억새가 하얗게 핍니다.
밤엔 쏟아 지는 별빛을 흠뻑 받으며
어디선가 불어 온 바람에 일렁이며 아침을 기다려온 억새는
드디어 잎사귀에 이슬이 맺힌걸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더욱 새하얗게 도도한가 봅니다.
고추 잠자리 가끔씩 날아 와 기웃거리고
높은 뭉게 구름 흘러 가는 한낮이 지나면
이윽고 서쪽으로 해가 기울고
마지막 햇살이 억새꽃을 비추면
그때 먼길을 돌아 온 나그네가 지친 몸을 이끌고
터벅 터벅 길을 가다가
그 하이얀 억새에 이끌리어 잠시 쉬어 간답니다.
5일장을 찾아 다니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장돌뱅이 그남자는
간혹 그 마을을 찾아 오는 사람입니다.
그 날 저녁은 유난히 더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햇살에 반사된 도도한 자태의 억새는
그 남자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히는 그리움의 아픔이었습니다.
회한으로 아련한 가슴은 이내 쓸쓸함으로 무르익어
일찍 뜬 달빛을 벗삼아
봇짐에서 꺼낸 소주병을 기울입니다.
한모금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얼굴이 하나씩 떠 오르고,
어릴 적 고향 뒷산의 가을 억새와 닮은
달빛에 처연한 억새꽃을 바라보며
그렇게 하염없이 마시며 홀로 있던 그 남자는 이내 꼬구라져 잠이 듭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들에 나온 농부에게 보인 건 싸늘히 식어 버린 남자의 주검.
눈가에 맺힌 방울은 눈물인지,
아니면 억새의 이슬인지 아직도 모르겠답니다.
이 것이 그 남자에게 들은 억새의 전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