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태풍의 영향으로 이틀간 내리 비가 온다길래
점심 단단히 챙겨 먹고 오늘 스케줄을 다시 정리하며 일터로 나갔다.
비 온다고 뒹굴기만 하긴 날이 너무 길므로
그동안 마무리 하지 못한 바구니를 완성키 위해 대나무부터 베어 놓고
풀뽑기 놀이를 하려 했는데 비가 온다.
찔끔 찔끔 졸졸...
그러다 후두둑.
그 때 불현듯 든 생각,
아, 하나님은 내가 개고생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가 보다,
오늘도 놀라는 말씀인가 보다.
놀고 지내라는 팔자인가 보다.
개들에게 있는 정성 없는 정성, 지극으로 살피니
개 복이 나한테도 오나 보다.
기왕 논 김에 오늘도 놀자.
어차피 하루 더 하나 덜 하나 별 차이도 없다.
그러니 하루 더 노는 데 괜히 찝찝해 하지 말고 푹 쉬자.푹,
팔자가 그런 걸 어떡 하나.
세상엔 법칙 같은 게 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고 부득부득 우기며 살아서 그렇지,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고, 될 놈은 뭘 해도 된다.
그런 게 있다.
아니, 그렇다고 믿는 게 편하다.
여태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 나이에 새삼스레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 마냥 물길 거슬러 사는 것도 그렇다.
그런 건 물고기나 하는 짓이다.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보면
고래고래 소리질러 찢어지는 고음을 내는 가수더러 가창력이 있네 마네 하더라만
목소릴 큰 놈이 이길 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렀다고 감동이 그 목소리 톤만큼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 큰 놈이 대단해 보이지도 않더라.
소피 젤마니(Sophie Zelmani)는 큰 소리 한 번 없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듣는 내내 감동을 주더라.
부드러움 속에 있는 강한 마음을 느낀다.
살아온 것이 잘못 됐으면 마땅히 고쳐 나가야 하지만,
잘못된 것이 없다면, 그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내가 만족한다면,
그냥 하던 대로 사는 거다.
생긴 대로 살고, 팔자 대로 사는 거다.
꽃이 멋스런 저택의 정돈된 잔디밭에 있지 않고
풀밭에 듬성듬성 피었어도 나는 오롯이 꽃만 도려 내어 감상할 줄 안다.
꽃 주변을 정돈할만큼 나는 부지런 하지 못하고,
설사 부지런 하다 해도 가꾸는데 기력을 소모하느라 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으리라.
잘 사는 사람, 잘 되는 사람 시기할 필요가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 어렵사리 느끼는 평화로움이 괴로움으로 변한다.
고생을 덜 한 만큼 편안했으면 된 거지.
어차피 내가 보는 대로 있는 거니까
보는 눈을 착하게 하면 된다.
고로 나는 착하다. 겁나 많이.
논 밭에 똑같은 종자를 심었다고 생산물의 질이나 양이 똑같은 것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약 치고 풀 뽑고 물관리 잘 한 논밭과
이른바 태평농법으로 기른 것은 차이가 많다.
태평했던 놈은 그 수확량 만큼 태평할 수 있었던 것이므로
수확량이 더럽다고 원망하지 말자.
차라리 팔자 탓을 하자.
내가 내 팔자에 반하는 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물 흐르듯 살다 보니 허브를 기르게 됐고,
기르는 것은 잘 하는데 수확한 것을 추접스럽게 이거 사주란 말은 못해 고민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팔아 준다.
바구니도 겨울철엔 할 일이 없어 심심풀이 삼아 배우긴 했어도
내 정성을 돈으로 바꾸는 데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가만 두는데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알아서 팔아준다.
이게 뭔 팔잔지...
사실, 냉정히, 그러니까 아주 객관적으로 계량하면
그 값어치는 보잘 것 없다.
다행히 내 그릇은 딱 그만큼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한다.
그만큼에도 고맙다.
나는 이 조막탱이만한 우리 마을이 참 만만하고 좋다.
인구가 많았으면 모두에게 골고루 다 마음 주며 잘해주지도 못했을 텐데
몇 명에게만 친절히 대할 뿐인데도 마을 전체에 잘 한 것이 된다.
손해 보는 것은 별로 없다.
설사 잃었더라도 어차피 본래 내겐 없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마을은 부자 동네는 아닌데 할머니들의 마음씀이 헤프다.
고구마 순도 동네 할머니가 잘라 가라고 하도 사정을 해서
계속 거절하는 것도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가져다 심었다.
물론 멍멍이들 산책시키는 길에 딱히 할 일이 없어 심심풀이 삼아
할머니들이 낑낑거리는 일을 도와주기는 한다.
그래도 개중 제일 젊은 놈이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은 노인들이
힘겨워 하는데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기도 그렇다.
너무 오랫동안 거들면 부담스러워 할까봐
그만해도 됐다고 하면 그만 하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지도 않다.
마침 멍멍이들 노는 동안 할 일도 없다.
동네 사람들은 나더러 복덩어리가 굴러왔다고 하는데
나야 말로 복덩어리 할머니들이 있는 곳으로 굴러온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잘 해서 그러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