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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피의 상징정치학-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리뷰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5-06-06 04:23:07
추천수 45
조회수   5,411

제목

젖과 피의 상징정치학-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리뷰

글쓴이

용정훈 [가입일자 : 2002-04-27]
내용
 
http://blog.naver.com/rockid74

 

 

 


 

 

 

 

 

 

 

 모세는 이집트에서 유대민족을 이끌고 사막에서 40년을 떠돌다가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다. 모세가 이끌고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총 60만이나 되는 대규모의 집단이었지만, 출발한 최초의 세대 중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강철같은 믿음의 소유자였던 여호수아와 갈렘, 단 두 명 뿐이었다. 그 외에는 모두 아이들이나 여정 중간에 태어난 세로운 세대들이었다. 보통 이 서사에서 처음 주목하게 되는 요소는 "마침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목표의 성취지만, 그 이면에는 "40년 동안"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주는 교훈이 있다. 즉 종국적 성취에 이르기까지 오랜 인내와 희생이 필요하며 그 와중에 신념을 지키지 못한 자들은 모두 도태되고 말리라는 것. 인간사에서 개혁을 포함한 비교적 큰 변화의 시도는 모두 만족의 지연을 포함한다. 농경을 처음 발명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쉬울 것이다. 식량이 될 만한 종자를 당장 먹지 않고 씨를 뿌려 수학을 하게 되면 더 큰 만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인류 문명의 주목할만한 도약은 이렇게 만족지연을 요구하는 개혁과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런 종류의 인내와 신념지키기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신화는 엑소더스 말고도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를 이루는 한 요소인 호랑이와 웅녀의 인간되기는 문화를 통한 진정한 인간화에서 이러한 인내와 신념이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모세와 이스라엘민족이 오랫동안 떠돌았던 시나이사막풍경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변화를 위한 교훈으로 작용하는 만큼이나, 현재의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도구로도 작용한다는 점이다. 멀게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 종말론부터 가깝게는 소비에트 연방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을 꿈꾸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역사관처럼, 모든 혁명서사는 오히려 체제의 영속화를 위한 납치가능성에 취약하다. 체제의 엘리트들은 이런 서사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심판과 혁명의 영구화를 통해 오히려 변화와 혁명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한다.

 

 극중 이모탄에 의해서 지배되는 시타델 사회도 다르지 않다. 부족한 자원과 가혹한 환경 때문에 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을 시타델은 철저하게 폭력을 독점하는 계급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천국을 약속하는 케케묵은 종교적 서사를 통해 체체를 유지한다. 결국 신념을 지킨 자만이 자신과 함께 영웅들의 천국에 들리라는, 영구히 현재형인 종말론이다. 이렇게 미래의 전망이 별볼일 없고 피지배층의 정신적 역량이 취약할 때, 체제의 엘리트들이 만만하게 남발할 수 있는 공수표는 내세에 대한 기대다.(반면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한 전망이 있을 때는 예외없이 발전의 공약을 남발한다.) 천국의 약속 만큼 강력하게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구성원 전체를 하나의 단일한 인격체로 표상하고 그 표상과 개인적으로 심리적 관계를 맺는 집단주의적 환상이다. 보통 현실세계에서 민족과 계급을 통해 구체화되는 이 환상은 개인의 불멸에 관한 욕망을 종교만큼이나 강력하게 조장한다. 국민국가의 국립묘지(실은 전사자 묘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귀족묘지 만큼이나 강력한 불멸을 선사한다. 각국의 국립묘지와 이전의 전몰자 묘지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고 아군의 희생을 신격화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있는 개성화된 집단이라는, 또 다른 신의 기억속에서 불멸한다. 맥스가 낙인을 피해 도망갈 때 그를 추격하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워보이부터, 추격전 끝에 가망이 없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영웅적으로 산화한 워보이, 그리고 종국에 눅스까지, 그들은 예외없이 집단의 기억에 집착한다. 

 


시타델의 워보이들

 

 

 

 

 

 

 

 

 

 

 이러한 서사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상징이다. 이모탄은 흡사 종교적 제례와 같은 집회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데, 여기서 그 종교적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바로 잠깐 동안 진행되는 물의 방류다. 이 의식은 물이라는, 가장 필수적이고 긴요한 자원의 독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기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사실 이 "아쿠아콜라"라고 불리는 물은 지하수를 끌어올린 것으로, 이모탄으로 대표되는 체제의 지배층이 진짜로 체제의 구성원에게 이익을 주려면,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하게 공급할 수 있다. 그리고 물을 그렇게 절벽에서 방류해서 대부분 쓸모없이 버려지게 하는 대신 파이프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차례차례 나누어 줄 것이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피지배계층의 이해와는 다른, 지배권력의 유지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이모탄으로서는, 자신의 목적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러한 방법론의 두가지 핵심 요소는 낭비와 자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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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의 아쿠아콜라 방류.

 

 

 

 

 이 두 가지의 요소가 지배체제의 유지라는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필수적이며 상호보완적인 이유는, 이러한 목표의 수행이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조화시켜야 하는 난점이 있기 때문이다. 자선을 통해 지지와 권위를 얻어야 하지만, 만성적인 위기 상태 또한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층이 끊임없이 피지배층의 세뇌를 위해 생산하는 종말과 혁명의 서사가 힘을 잃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이 역점을 두어 발전시킨 도시와, 상대적으로 체제발전을 위한 희생(혹은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농촌의 지지율 역전현상인 "여촌야도"라는 상황에서 박정희가 느낀 곤혹감은 이러한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엑소더스에서 조금의 여유가 생겼을 때, 이스라엘민족이 저질렀던 일들을 목도한 모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자선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바로 낭비다. 낭비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는 자선을 베푸는 당사자의 아량과 실력을 강조함으로서 위신을 더욱 높여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상할 수 있는 것 처럼, 실제적인 효용을 크게 낮춤으로써 위기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토록 자선이 강조되어 왔고(시스템을 통한 분배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선기관들이 그토록 비효율적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이러한 효과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최소한 영화에서는 그래보인다.)

 

 이러한 물의 방류가 상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할 또다른 상징적 장면이 이미 극중에서 중첩되고 있다. 물의 방류 순간 생기는 흰 포말은 마치 젖을 연상하게 하는데, 그러한 의식을 집행하는 이모탄의 근거지에는 뚱뚱하게 살찐 여성들이 오리엔탈풍의 복장을 하고 젖소처럼 모유를 착취당하고 있다. 물론 젖은 신생아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다 큰 어른들에게는 전혀 무용하다. 여기서 중요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모탄의 장자인 릭투스가 젖을 맛보는 장면이다. 릭투스는 젖을 한 모금 맛보고, "진짜 엄마의 젖(mother"s milk)"라고 확인하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이유보다 의미를 강조하는 행위처럼 보인다.(Rigtus의 어원인 rig에도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왜곡, 조작한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서구의 아시아에 대한 편견이 강조된 복장, 즉 절대군주제가 지배하는 하렘의 여자들, 그리고 그들의 도구적 대상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가부장적 지배체제하의 "인간에의 물화(物化)", "생산수단의 독점"과 같은 오래된 의미소(semanteme)이다. 이 프레임 안에서 체제의 구성원들은 인간과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층의 시각을 무의식중에 내면화하며 그것을 원래부터 자연스러운 상태로 받아들인다.(아마도 한국이라는 극단적 물신숭배 사회에서 교육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초에 기독교가 가부장제 신화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내면화시키려 했던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것이었으며, 기독교적 세계관이 일면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합리적,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토록 각광받았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마르크시즘을 결합시켜 양자를 새롭게 해석한 네오마르크시즘의 핵심아이디어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연원한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 나중에 등장하는 추격전에서 이모탄의 아이를 잉태한 스플렌디드가 사망하자 이모탄은 그 배를 갈라 아이의 성별을 서둘러 확인하고, 릭투스는 자신의 동생이 남자였으며, 완벽하게 태어났다고 절규한다. 그들이 진짜로 잃은 것을 애석해 하는 것은 아이의 생명이 아니라 아이가 상징하는 가부장적 권력의 전승인 것이다. 


 또 눅스를 비롯한 워보이들이 자살적 공격을 강행하기 전에 스스로나 이모탄에 의해 입에 은색 래커를 뿌리는 의식을 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축원이나 축복 의식과 매우 닮아있다. 



이모탄의 아들, 릭투스 에릭투스(Rigtus Erectus)





 그러나 시타델의 사회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이러한 상징정치학적 장치 뿐이 아니다. 이 체제는 폭력을 담당하는 "무기농장(The Bullet Farm)"과 산업의 중요한 축인 "가스타운(The Gas Town)"과 실제적인 수준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세계대전과 한 차례 개싸움 대리전(6.25)이 끝난 후, 두 차례 연이어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던 아이젠하워는 그 자신이 군부, 공화당 출신의 보수적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퇴임사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군산복합체의 지배를 우려한 바 있다.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 미국의 제국주의적 방향성을 더욱 강력하게 추동하여 핵경쟁 등을 통해 전 세계를 만성적 위기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그를 빌미로 미국 내부와 미국에 의해 지배되는 남미와 동아시아 등 각지의 독재체제를 강고하게 다져나가게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그 반대편인 소비에트연방 중심의 사회주의권도 마찬가지였다. 케네디와 후르시초프는 이러한 흐름을 바꿔보고자 노력해으나 각각 내부의 군부 매파에 의해 강력하게 견제당했으며, 때문에 케네디의 암살을 둘러싼 음모론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것은 미국의 군산복합체 기득권과 그 대리기관인 CIA다.) 정치권력이 이 막강한 군산복합체에 의해 지배되고 효과적인 상징정치체계를 작동시키며 여론을 호도한 탓에, 미국은 강력하게 패권을 추구할 수 있었다. 남미의 독재자들을 지원함으로써 남미를 자국의 자원기지로 전락시켰으며, 아시아의 두 부패한 독재정권을 지원하고(한국과 베트남) 결국 상황을 오판함으로써 베트남전이라는 실패를 저질러 국가적인 견지에서 엄청난 피해를 끼쳤는데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군산복합체는 엄청난 이익을 창출했다. 이렇게 폭력과 산업의 독점아래, 상징조작을 통한  만성적 위기와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행위는 유사이래 지배계층을 위한 가장 보편적인 수법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 세 가지 축, 즉 상징정치기구를 대표하는 시타델의 이모탄, 폭력을 담당하는 무기농장의 총알농부(Bullet Farmer) 산업적 생산을 대표하는 사람을 먹는 자(People Eater;물론, people에는 인민이라는 함의가 있다.)은 이러한 체제유지수단을 서로 거래하며 안정된 삼두정을 유지한다. 시타델은 생필품인 동시에 강력한 정치적 상징인 "아쿠아콜라(물)"와 "엄마젖"을, 무기농장은 무기를, 가스타운은 가스를 서로에게 공급하며 체제를 유지한다. 가끔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따라 사소한 관점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예를 들어 총알농부는 이모탄의 아내들 되찾기 프로젝트에 대해, 집안싸움에 이 난리법석을떤다고 툴툴거리지만, 이모탄에게 있어서 아내를 빼앗긴다는 것은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가능케하는 상징을 강탈당하는 일이기에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처럼, 블릿파머가 지배하는 군부는 정치권력이 좀처럼 제어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극중에서 블릿 파머가 이끄는 부대는 이모탄의 명령을 무시하고 게속 적을 뒤쫓는다. 한편  피플이터는 물건이 상하지 않게 조심라하고 말하면서 생산수단, 혹은 소유물로서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대체적으로 이들의 역할은 상호보완적이며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의지하고 있다.  

 


 

 

 

 


 

 

 


 


 

 

맨 위의 맨이터를 아래의 전형적인 풍자화들과 비교해보라. 특히 맨 아래 게오르게 그로스의 다다풍 드로잉과는 그림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 처럼 흡사한 이미지다.아쉽게도 피플이터의 더 좋은 사진을 구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안정적이면서 강고한 체제와 계몽되지 못한 피지배계층 사이에서, 변혁을 열망하는 주체들에게는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그리고 그 주체들은 누구일까? 먼저 명목상의 주인공인 맥스를 보자. 맥스는 전형적으로 주변부에 속한 인물이다. 그는 사람사냥을 통해 납치되어 가축화(혹은 사물화)되는데, 흡사 제국주의 초창기의 노예 무역을 보는 것 같다(물론 이런 시각은 일종의 인종적 편견(?)이 약간 개입되어 있다. 노예무역의 가해자/피해자는 백인/흑인이라는 인종적 구도로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대 태동 이전에도 노예는 존재했으며, 백인들에게 싸구려 장난감들을 받고 적극적으로 흑인들을 사냥해 팔아넘긴 장본인들은 바로 그 흑인 지배계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도 이러한 노예무역이 제국주의적 세계화 메커니즘의 주요원인이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가 워보이의 살아있는 피주머니로서 눅스에게 피를 빼았기는 상황은 착취와 수탈의(그야말로 고혈을 빨리는) 너무 거칠고 직접적인 상징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상한 세계에서는 이렇게 거친 상징도 묘한 호소력을 가진다. 눅스가 맥스를 앞범퍼에 달고 전쟁에 뛰어들 때, 맥스가 처했던 입장은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 수행에서 한국이 처했던 입장, 유럽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식민지가 처했던 입장, 그리고 러시아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농민들이 당했던 입장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남/여라는 대립항에서 맥스는 우위에 있지만 그가 가진 우위는 달랑 그것 뿐이다. 중심/주변의 대립항은 남/여 대립항보다 더 중요하다. 식민지 남성, 혹은 피지배층 남성은 단지 식민지/피지배층 여성에게만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뿐이다. 중심/지배층은 주변/피지배층애게 착취하면서 희생을 요구할 때는 동등하거나 더 가혹한 것을 요구하지만, 정작 위기에 닥쳤을 때는 전혀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 쓰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다.

 

 


 

 

 

 또 하나는 극을 더욱 직접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퓨리오사다. 퓨리오사는 맥스와 마찬가지로 주변부 출신이지만 겉으로는 기득권에 완벽하게 동화된 듯 보인다. 그는 시타델에서 이모탄 일족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사령관이며, 왼팔이 잘려있다.(팔이 잘린다는 신화소는 개인의 정체성의 큰 변화와 관련이 있다. 특히 왼팔의 절단은 고유한체제에 이질적인 정체성을 강압적으로 포기당하고 지배체제의 가치관을 강제당하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 창조신화에서 올림푸스 일족의 반란서사를 보면 극중의 퓨리오사처럼 제우스가 기간테스족에 대항했을 때, 티폰에 의해 팔의 근육을 절단당하고 둥굴에 갇혀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장 끌로드 갈의 작품인 죽음의 행군 한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이 팔을 잃는 고난을 통해 왕이 되고, 의수를 달고 왕좌에 오르고 난 다음에 자식의 멀쩡한 왼팔을 자르고 의수를 달도록 한다. 반대의 방향이긴 하지만, 서극의 "칼"이나 김용 "신조협려"에도 팔 절단의 모티프는 개인의 정체성 극적인 변화나 인식과 관련이 있다. 아마 이러한 신화소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스터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와 피터 팬의 후크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원과 피지배의 역사를 날짜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극에서 그는 모세와 같은 전형적인 반역자-선지자다. 

 


왼팔에 의수를 장착한 퓨리오사

 


장끌로드 갈의 죽음의 행군중 한 에피소드인 아른의 복수. 극중 주인공인 아른의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왼 팔이 잘리고 후계자가 된다.

 


 

스타워즈에서 아버지에 의해 팔을 잃고 괴로워하는 루크 스카이워커, 동시에 그는 아버지로 부터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잃어버린 팔은 오른팔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지만 아버지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세번째로 퓨리오사가 탈출시키려는 이모탄의 아내들이 있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은 편이지만 궁극적으로 가부장제하에서는 소유물취급을 받는 신세다. 반대로 중간에 변절하여 합류하는 눅스는 남성이고 이모탄의 친위조직에 속한 중간계급이지만 그 서열 안에서의 지위는 낮아보인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사후세계에 관한 공허한 약속 뿐이다. 

 

 마지막으로 탈주 중간에 마주치는 부발리니족의 여전사들이다. 이들은 주변부에 속하고, 여성이며, 늙기까지해서 성과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시타델 사회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존재들이다. 어쩌면 가장 정통적인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뿐 아니라 이미 거론된 모든 인물들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있는 까닭은 가부장적/자본제적 사회체제는 구성원 모두를 층층이 세밀하게 구별하고 지배/피지배관계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강고해 보이는 삼두체제가 완벽하고 완고한 억압적 체제를 구축 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역으로 이 이미 구체제가 더이상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한계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갖 종기로 덮힌 이모탄과 부종으로 발이 부어 정상적인 보행이 힘들어 보이는 피플이터의 신체는 이러한 한계의 알레고리다.(이 영화의 모든 알레고리가 그렇듯 이 은유도 매우 직접적이고 거칠고 상투적이다.) 그들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이상할게 없어보인다. 때문에 퓨리오사가 교활한 계획으로 쿠데타를 감행했을 때 시타델 사회는 그야말로 광풍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모탄이 배신을 알아채고 삼각동맹의 병력들을 한데모아 추격전을 벌이자 퓨리오사는 사막의 모래폭풍 속으로 뛰어드는데, 그 폭풍 안은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어지는 대 혼란이다. 혁명이 진행되고 구체제는 기능이 정지된다.

 

It

모래폭풍을 통과하는 퓨리오사와 추격자들

 

 그 광풍이 가라앉고나면 지배권력은 그 힘을 상실하고 사회는 일시적인 무정부상태에 놓인다. 아마도 모래속에서 깨어난 맥스가 눅스를 걸머메고 퓨리오사일행과 조우하는 장면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은유였을 것이다. 실제 우리가 혁명적인 상황하에서 겪는 정치적 현실은  혁명주체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서사의 은유와는 많이 다르다. 선과 악이 분명하게 갈려서 최후의 결전을 치루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입장과 배경을 가진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의 이합집산을 통해, 명확한 윤리적 정당성보다는 당장의 이익과 전망을 두고 다툰다. 퓨리오사 일행의 자원이 필요한 맥스는 필요에 따라 눅스와 연합하기도 하며, 퓨리오사를 제압한 다음에는 눅스를 제거하려 한다. 이들의 투쟁에는 사상과 주의가 없다. 오로지 생존이 목적이며 배신은 일상적이다. (나중에 만나는 퓨리오사의 일족 블라족도 그다지 이상적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알몸의 여인을 미끼로 덫을 만들고 외부인들을 약탈해 왔을 것이다.이 장면에서 이 작품이 가지는 날카로운 시각을 볼 수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가부장적/자본제적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의 주체를 대책없이 미화시키는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는다. 물론 그러한 냉정한 시선은 페미니즘을 포함한 주변부 정치사상의 실용적인 쓰임새와는 별개다. 페미니즘을 포함하는 주변부의 정치적 사상과 시야는 한시적으로나마 충분히 한계에 이른 주류정치사상을 대체하여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또 하나, 이모탄의 부인들이 최초로 등장하는 씬이 있다. 어디선가 그녀들의 환상적인 모습이 희망을 상징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읽었는데, 오히려 나에게는 그것이 희망의 허구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라. 전사들이 흙투성이로 치고밖는 난장판 한 복판에 난데없이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들이 단체로 서있는 모습을. 나는 이 장면이 나오자마자 웃음을 터뜨를 수 밖에 없었다.)

 


 

이모탄의 아내들, 혹은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들?

 

 

 

 

 그러나 이후 퓨리오사와의 연대는 비교적 장기간에 걸친 신뢰가 쌓이면서 공고화된다. 처음에는 그저 내쉬균형을 유지하는데 불과한 대치상태였지만, 위기를 돌파하면서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지속하면서 신뢰가 싹트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의 협력국면은 로버트 엑설로드 식의 팃포텟(원수는 원수로, 은헤는 은혜로 값는) 전략으로 전환된다. 종국에는 이들의 협력이 아주 익숙한 혁명과 성공의 서사인 배려, 헌신 자기희생의 요소들을 갖추게 되는데, 이 영화의 장점은 이러한 협력적 요인들의 작동 메커니즘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데 있다. 거칠게 다시 요약하자면, 이러한 감동적 헌신과 희생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혁명주체의 품성과 덕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 Evolutionary Stable Strategy)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장면은 인간사회의 유래에 대한 설명으로서도 그럭저럭 설득력있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홉스가 말한 합의된 권력의 위임과도 다르고(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가정은 같지만),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과도 다르다. 물론 성인에 의한 문화적 세례와 세계의 교화라는 유가(儒家)의 기원설화와도 전혀 상관이 없다. 

 


대립하던 맥스와 퓨리오사는  몇 번의 협력적 주고받기를 통해 차츰 신뢰를 구축해나간다.

 

 

 

 

 

 

 이제 혁명주체인 퓨리오사 일행에게 시야를 집중해보자. 그들은 시타델의 폭압에 항거하여  그 사회를 뒤집고 뛰쳐나왔지만, 그들이 실제로 어떤 여정을 통과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보이기도 한다. 이모탄의 정부들은 정조대를 벗어던졌으며, 맥스는 엄마젖을 무심하게 피를 닦아내는 실용적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간단하게 독점과 시혜의 상징적 의미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점차로 이상과 다른 상황들이 누적된다. 비폭력주의를 설파하며 탈출한 여자들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던 스플렌디드는 체제유지에 자신의 존재가 가지는 필요불가결성을 이용하여 이모탄과 치킨게임을 벌이면서 성공적으로 상황을 이끌어가는듯 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되고, 나머지 부인들도 각자의 입장과 감정, 시야의 대립을 통해 갈등을 노출한다. 

 


 

상대에게 필수적인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이모탄과 치킨게임을 벌이는 스플렌디드

 

 

 

 현실세게에서 벌어졌던 혁명이 모두 그랬듯, 이렇게 그들은 상투적이고 익숙한 서사가 가리키는대로 미래를 상상하지만 실제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악전고투를 뜷고 결국 부발리니족과 조우하여 녹색의 땅(젖과 꿀이 르흐는 가나안)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 상상하지만, 그것이 한낯 신기루였음을 이내 깨닫게 된다. 그 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 그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가능성이나 대안을 찾는가? 아니다. 그들은 소금사막을 건너 더 멀리 있는 녹색의 땅으로 목표를 멀리 떨쳐낸다. 혁명 완수를 지연시키고 유예하면서 영속적인 투쟁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맞다. 이것은 시타델, 즉 적의 체제유지를 위한 서사를 그대로 복제한 것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양차대전 이후에 수립된 소비에트연방 중심의 사회주의권의 지배서사는 정확히 이런 것이었다. 

 


소금사막에서 퓨리오사 일행을 가로막고 새로운 계획을 제안하는 맥스

 

개인적인 여정 속에서 수많은 상황들과 마주쳤을 맥스의 현실주의는 이 공허한 약속의 선전선동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맥스의 기억속에는 얼마나 많은 실패가 각인되어 있겠는가? 그는 아마도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을 것이고, 믿음이 배신당하는 상황 또한 셀 수 없이 많았을 것이며, 심지어는 스스로 신념과 약속을 배반한 상황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더 먼 약속의 땅을 가로질러 갈 계획을 세울 때, 맥스는 40년동안 방황해봤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를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희망을 품는 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고 투쟁속에서 눈을 뜨고 그 허구를 알게되어 전향한 한 때 혁명가였던 그는, 혁명의 완결을 믿고 싶어하는 무리를 뒤로 한 채 혼자만의 길을 계획한다. 그러나 결국 맥스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는 결국 퓨리오사 일행을 설득하여 독창적인 체제전복계획을 수립하게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슨 거창한 혁명에 대한 신념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동료가 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스와 퓨리오사일행은 유예와 약속을 통한 혁명의 영속화라는, 지배서사를 통한 권력의 수립을 포기하고 지금 이 현실에서 기능할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 중심부로 돌진, 내파하는 전략을 세운다. 이 길은 도피와 유예의 순결하고 확실해보이는 길이 아닌, 더욱 직접적인 투쟁과 때에 따라서는 술수와 타협도 감내해야 하는 대장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회주의 집단은 현실 속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사민주의 그룹이 유일하다. 60만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했던, 그래서 오랜동안 광야를 떠돌아야했던 모세는 틀렸다. 진정한 구원은 또 다른 지배권력을 수립해서 구약역사를 내내 배타성과 순혈주의로 덧칠한 가나안의 이스라엘왕조-또 다른 이집트, 혹은 영구한 사막의 행군-가 아니라, 이집트의 혁명에 있었던 것이다.(정신분석학의 현실원칙에 지배당하지 않고, 이렇게 지금, 여기를 강조하며, 게급, 인종, 성별의 모든 억압과 차별을 같은 수준에서 동일한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강조하는 것은 유럽의 네오마르크시즘과 미국의 신좌파의 상상력과 거의 일치한다.)

 

 

 지금까지의 탈출로를 거슬러올라가는 이 혁명의 길은 그야말로 성공의 연속이다. 귀환의 여정에서 그들은 내부적으로 통용되는 정치적 상징체계를 만들어낸다. 스플렌디드가 임신한 아이가 여자라고 가정함으로써, 남<->여, 총알<->씨앗이라는 대립항으로 완벽하게 가부장제를 제압하는 대항서사를 구축한다. 이너서클을 하나로 모으는 정치적 구심점이 생긴 것이다. 또한 구성원들은 충분히 학습된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를 위해 헌신하고, 여기서 피주머니(Blood bag)의 상징도 전복된다. 애초에 워보이들에 의해 맥스에게 붙여진 피주머니라는 별명은 경멸적이고 차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맥스가 죽어가는 퓨리오사에게 피를 공급하며 피주머니를 자처하는 순간, 그 별명은 숭고하게 변용된다. 피지배자와 패배자를 상징했던 그 별명은 연대와 자기희생의 상징이 된다. 이 변용은 신약의 십자가 상징에 비견할만한 감동이 있다. 한낯 중범죄자를 처벌하기위한 고문도구에 불과했던 물건이 사랑과 구원의 상징이 되었던 신비의 연금술. 혹은 상징조작.

 

 "마침내"(그렇다, 마침내다. 엘리아데가 지적했듯, 인간은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모든 서사는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는 끝이 있다.) 퓨리오사 일행은 이모탄을 살해하고 시타델로 돌아가 정치권력을 획득한다.(이 귀환은 러시아 혁명당시 레닌의 귀환을 상기시킨다.) 살해당한 이모탄의 시체를 앞에 두고, 맥스의 부축으로 일어서서 같이 손을 치켜든 퓨리오사의 모습은, 굳이 전후사정을 전부 알지 못하더라도, 막연하게 느껴지는 서사가 있다. 주변에서 출발해 불구와 성적 인 차별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이끌어내서 끝내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한 영웅의 서사 말이다. 이 모습은 과거 이모탄에게 열광하던 사회구성원들의 열광을 똑같이 이끌어낸다. 그렇게 이들의 혁명은 성공한 것일까?  

 

 글쎄, 한 편으로는 그런 것 같다. 이들이 도르레를 타고 저 정치권력의 중심부로 올라갈 때, 이들은 가능한 믾은 구성원들을 그 도르레에 태운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얼굴이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사람이다. 아마도 퓨리오사 중심이 세로운 체제가 그 이전보다는 확실히 덜 차별적이고 더 낮은 곳에 있던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게 되리라는 암시 같다. 또한 차도르로 얼굴을 가린 채, 모유를 착취당하던 암소같은 여자들이 자기 스스로의 손으로 수문을 개방하여 아쿠아콜라를 방류하는 모습은 그 사회의 생산수단들이 더이상 특정 지배계층의 독점적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주체 자신의 손으로 자유롭게 사용되며, 독점적 지배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 사용가치를 위해서 전유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모든 성공적인 개혁과 혁명이 그렇듯 이러한 성공의 이면에는 한계들이 잠복해있다. 그들은 여전히 어린 워보이들이 조작하는 도르레를 타고 하늘로 상승한다. 아마도 땅과의 이런 괴리는 언젠가 다시 곪아 터질 것이다. 또 하나, 이들이 체제전복에 성공하고 권력을 획득한 주요 수단이 여전히 정치적 상징 조작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눅스의 영웅적인 죽음을 보면 그가 여전히 기억과 역사에 집착하며, 그것은 눅스의 희생이 다른 워보이들의 욕망과 방향만 바뀐 동일한 심리적 추동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 충분히 계몽되지 못한 사회구성원, 특히 그중에서도 혈기 방장한 젊은 이들의 야심은 이러한 상징조작에 더욱 취약하다. 이 높은 이상과 야심을 가진 가련한 청춘들을 어찌 할 것인가. 정말이지 이러한 상징조작은 이렇게 순진한 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이 상징조작을 벗어나 정치를 도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아마도 마르크스가 말했던, 전세계 노동자들의 일치된 단결만큼이나 허무맹랑한 기대일 것이다. 결국 모든 정치는( 그리고 그 정치에 관여하는 모든 사회구성원은) 크든 작든 아이들의 십자군을 조직한 어른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범죄는 인류역사가 지속되는 이상 결코 끝나지 않을 것 처럼 보인다. 

 

 결국 퓨리오사의 정치도 성공에 안주하는 한, 이모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현실역사에서 목격한 무수한 혁명의 종말이었다. 그래서 말하자면, 진정한 혁명의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분노의 도로일 것이다. 혹은 영원한 바위굴리기거나.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신기루는 저 멀찌기 물러서 있다. 맥스의 별명은 길 위의 전사(Road Warrior)였다.  여정을 멈추지 않는 맥스는 혁명이 배반당하는 순간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다. 러시아의 전설적 민중영웅 스텐카라친 처럼. 혹은 미래의 미륵처럼, 혹은 종말 후 모습을 드러낼 구세주나 서부극의 총잡이처럼, 혹은 쿠바를 떠난 체 게바라, 또, 또 다른 수 많은 영웅들처럼. 아, 또 상징에 갇힌다. 이 구제할 길 없는 인간의 근본적 한계에.

 

 

 

 

 

 

 


 

 

 

* 사실 이 영화의 알레고리는 너무 선이 굵고 명료해서 이런 종류의 영화읽기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텍스트는 아니었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제임스 카메룬처럼 이제는 좀 낡은 감이 없지 않은 신좌파 정서가 강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관점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현재 상황에서 시사점이 여전히 있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정리해보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분량조절에 실패했네요. 이렇게 길게 써놓고 저 혼자만 보는게 갑자기 억울해져서 올려봅니다. 너그러히 봐주세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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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 2015-06-06 06:35:29
답글

장문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읽는 사람도 어려운데, 쓰시느라 얼마나 시간과 공력이 들어갔을지?
짐작은 됩니다
보기 힘든 글이라 생각되어 여러번 읽어야 될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 했네요~~

용정훈 2015-06-06 11:28:47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정리 목적으로 시작했던 글이고보니 매끄럽지 못할 텐데도 다 읽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최창식 2015-06-06 08:09:01
답글

명 짧은 놈은 읽다가 죽겠네요. 영화에 대한 소감이 중점이 아니라,

현학적인 글쓰기로 본인의 필력을 과시하려는 욕구만 두드러집니다.

법정스님께서 쓰신 글을 보면 초등학생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문체에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건 뭐 읽다가 머리가 아플 지경이군요.

명확하고 간결한 글, 읽기가 편한 글이 좋은 글이고, 글쓰기의 기초죠.

암튼 영화 하나를 두고 이렇게 장황한 글을 쓰는 것도 재주긴 합니다.

한정수 2015-06-06 08:54:32
답글

잘읽었습니다. 긴 글이지만 잘 읽히네요.
감사합니다. 추천 ㅎㅎㅎ

용정훈 2015-06-06 11:31:32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고나서 이 긴 걸 썼다는 잉여적 자각때문에 좀 억울했는데, 덕분에 좀 덜 억울해졌어요.ㅋㅋㅋ

58.239.***.43 2015-06-06 09:06:58
답글

마치 키노의 재림같아 읽기가 힘 들었습니다. 내용속의 함의를 알지 못하면
이해가 안 될테니 쉬이 지치는 건 당연하겠지요. 잘 쓴 글임은 인정하고(솔직
히 부러움)그러나 이보다 더 잘 쓴 글은 쉬우면서 지은이의 생각을 잘 전달하는
그런 글이겠죠. ^^ 잘 읽었습니다.

용정훈 2015-06-06 11:32:55

    아무래도 처음에는 개인적인 정리목적으로 시작했던 글이라..^^;; 그런데 저런 투의 글이 아니었다면 더 길어졌을 것 같긴 해요.ㅋㅋㅋ 모자란 필력인데 정성스럽게 읽어주시고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상훈 2015-06-06 10:37:45
답글

오랫만입니다. 필력은 여전하십니다.

용정훈 2015-06-06 11:33:36

    네, 그래도 꾸준히 눈팅은 하고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진성기 2015-06-06 16:48:50
답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영화에 대한 내용은 패스하고요..
글을 통해 짐작해보면 혁명에 대해 좀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신듯 합니다.
마치 어느 고을에 세워졌다는 지난 도둑은 가고 새 도둑이 왔구나 하는 비를 보는 듯한
혁명이 정착하여 성공에 안주하면 지난 정치와 같은 전철을 밝게 될 것이라는 견해는 더더욱 공감 하기 힘듭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은 제 생각은 생산수단의 발달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자각시키고 그 것이 모여서 혁명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산 수단 혹은 과학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듯이 혁명으로 이루어 진것은 다시 퇴색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새로운 사회 과학 특히 생산 수단의 변화가 생겨남으로서 혁명의 이유가 변하게 될 뿐이라 생각합니다.
대혁명이 성공하고 안주 했다고 다시 예전 봉건으로 돌아가지 않았듯이..
물론 일시적인 소용돌이는 있었지만 ..
실패로 끝난 혁명들 까지도 모든 것은 축적되어 시간이 흐른 후에 서서히 이루어지기도 하니까요.

그 혁명의 이상에 젊음이 희생되어지고 그 젊음이 청춘이 가련하다는 견해에도 역시 전 다르게 생각하고 있고요.
하긴 혁명이란게 헛되다면 가련할 수밖에 없지만
혁명이 아니고는 정치는 아니 기득 세력은 변화하거나 기득권을 내려 놓으려 하지 않기에
전 아마도 혁명 예찬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튼 이 영화를 볼까 말까 주저하고 있었는 데
이 글 때문에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용정훈 2015-06-06 18:09:38

    긴글을 주셨으니 저도 성심껏 답변드립니다. 첫번째로, 제가 인류사에 일어나는 모든 혁명에 실제적인 효과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해십니다. 오히려 저는 진성기님 처럼 인류의 진보가 확고하게 실제적인 것이고 되돌릴 수 없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회의주의자 친구와 논쟁할 때, 객관적인 수치지표(예를 들어 유아사망률, 살인사건 발생률, 평균수명)등을 들이밀면서, 인간사에는 실제로 발전이 없다고 주장하는 친구의 입을 막아버리는 악취미가 있었는걸요.ㅋㅋ(그래서 그 친구도 결국 진보를 믿게 되었습니다) 저 맥락속에서 다루는 혁명은 그러한 것들과는 다릅니다. 진성기님의 혁명에 대한 견해는 마르크시즘의 혁명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이지만, 마르크시즘에서도 사회적 긴장이 누적되었으나 근본적인 수준의 토대적 변혁 없이 지배게층의 교체만이 일어나는 종류의 사이비 혁명과 진정한 역사적 발전에 의한 펼연적인 혁명을 구분합니다. (마르크시즘 역사관의 정의에 따른)오리엔트적 사회의 왕조교체는 전자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겠죠. 마르크시즘의 단선적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실제로 많은 혁명과 개혁의 이름을 달고 나온 변혁의 시도들이 사실 사이비였음이 드러난 적이 적지않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인민혁명과 공화국의 성립은 진정한 혁명이었나요? 러시아나 쿠바의 혁명들은 그 개혁의 방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었나요? 셋 다 어느정도 의의나 효과가 없었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혁명이후 개혁 초기의 관료제와 지배체제에 아무런 의심없이 안주한 결과 더 큰 파국을 맞았습니다. 그 사건들이 의미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혁명의 정신을 고단하게 지속하지 못하면 결국 이름만 남은 가짜 변혁만 남게되리라는 이야기죠. 이러한 인식은 지금 새누리와 새정연 같은 한정된 선택지를 강요당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에도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단함을 견디기 위해 정치채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인지적 한계에 기댄 상징조작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이 상징조작은 혁명정신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사이비 혁명에 복무할 수도 있다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됩니다. 양차대전 이후의 동구권과 북한에서 벌어진 그 영속화된 혁명을 상기해보세요.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남한의 반공정권이 국민들의 인식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생각해보세요. 5.16은 그들에 의하면 또 하나의 위대한 혁명이었습니다. 과연 역사가 한참 진행되는 현장에서 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사건이 역사간 다음에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자인하거나 타의에 의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하물며 언제나 소문과 권력의 암시에만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보통사람인 경우에야. 저는 이것이 특이점신봉자들이 주장하는 특이점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다음에야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만국의 노동자들이 진짜로 대의를 위해 단결하는 상황처럼 부질없다고 이야기 한 것이고요.
이런 상황에서 한편에서는 일베같은 청년들이 한 편에서는 운동권에서 자기를 희생했던 고귀한 덕성을 가진 청년들이 동일한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해 정말 운에 따라서 편이 갈리는 이 상황에서, 그 청년들의 희생을 미화하는 것이 과연 어른이 해야 할 것인지, 이제는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 상황이라 반문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입니다. 혁명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해서 그 혁명의 물결에 순전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역사의 간지나 노회한 정치가의 상징조작에 의해서 희생되는 희생을 찬양해야 합니까? 그건 진짜 제국주의자들이나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던 탐욕스러운 정치가나 종교인들이 저질러던 일을 그대로 답습하는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개인의 의도를 중시하는 윤리관을 지지 합니다. 그러한 윤리관 안에서 개인의 의지야 어찌되었든 간에 결과가 좋으면 의의는 있다는식의 사고에 대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요약정리 하겠습니다. 혁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혁명의 진위를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의 진보와 관련없는 사이비 혁명, 진보를 바라고 시작되어으나 변질된 혁명에 대해서 여전히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혁에 상징조작을 좌우, 보혁을 막론하고 이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 당장 역사의 변혁에 어떤 효과를 주지는 못하더라도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적과 싸우다보니 적과 닮아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이 반성 없이 정말 의미있고 근본적인 혁명이 가능할까요?

백경훈 2015-06-06 17:24:27
답글

아 이렇게 긴글을 다 읽어서 억울합니다.
내 시간 돌리도~~
ㅡ.ㅜ;;

용정훈 2015-06-06 18:09:59

    환불은 안되지 말입니다.ㅋㅋ

황준승 2015-06-07 14:30:17
답글

한편에서는 일베같은 청년들이 한 편에서는 운동권에서 자기를 희생했던 고귀한 덕성을 가진 청년들이 동일한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해 정말 운에 따라서 편이 갈리는 이 상황.....

ㄴ 저는 댓글 중 이 문장이 와 닿습니다.
모두 다는 아니겠지만,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순진한 신입 시절 친구따라 어느 단체에 가입을 했느냐에 따라 사상이나 행동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한편으로는, 운동권 사회에 편입 되어서 어쨋거나 특정 계층의 이익을 쟁취하는 방법을 터득한 다음에,
사회에 진출해서는 그 요령을 이용해서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에 활용하기도 하죠

용정훈 2015-06-08 20:13:17

    그렇죠. 저는 문학이나 영화의 서사가 이렇게 역사가 놓친 미묘한 지점들을 파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호 2015-06-08 09:12:28
답글

안돌아가는 대구빡에 생소한 단어들이 난무하는 가시밭길 같은 장문의 글을 읽느라
무댱 고생했지만 정신없이 잘 읽었습니다.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성기님의 댓글처럼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네요..

암튼 닥모가지와 그의 충견들의 털을 끄슬릴 용자들이 없는 작금의 암울한 현실이 답답합니다

용정훈 2015-06-08 20:15:28

    더 안돌아가는 머리로 이 글을 직접 쓴 저는 어떻겠습니까? 글의 내용에 모두 공감하리라 기대하지도 앟고 그걸 강요할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이모탄이 아닙니다...ㅠ.ㅠ

이종호님이 닥을 그렇게 잘잡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ㅋㅋㅋ

이종호 2015-06-10 14:50:43

    걈솸돠..닥은 그저 모강지쵝옴돠...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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