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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여 년 만의 고백~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5-05-08 17:54:51
추천수 22
조회수   1,705

제목

40 여 년 만의 고백~

글쓴이

조창연 [가입일자 : 2014-08-08]
내용



어제 부모님을 뵈러 평택에 갔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시내의 갈비탕을 맛있게 하는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드시기 편하게 갈비에붙은 고깃살을 가위로 잘라내어 탕에 부어드리며,

"어머니.. 오늘은 저 아침먹은지 얼마 안되어 배안고프니까,

배부르다고 저한테 덜어내지마시고 다드셔요~ " 하니,

"그래 알았다~ " 하시며 정말 맛나게 드시더군요.

그랬습니다.

이렇게 다 드실수 있으면서,

자식입에 밥들어가는 모습이 보기좋아,

그렇게 평생을 가난을 이겨가며, 당신입에 넣어야할 음식을 자식에게 양보하며 지내 오셨던거지요.

이젠 저도 머리가 희끗희끗한데,

백발이 성성한 부모님 눈엔, 그저 아직도 가슴에 품는 자식일 뿐이죠.




"저 일때문에 그만 가봐야해요~" 하며,

용돈이랍시고 돈 조금 넣은 봉투를 부모님 호주머니에 넣어드리니,

뭘 올때마다 돈을 주냐며 이나마도 안받으시려고 손사래를 치십니다.

"많이 못넣었어요~ 이제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어요.. 나중에 저승가시면 먹고싶었던거 못드셨다고 후회마시고,

드시고싶은거 있으면 돈아끼지말고 사드셔요~ " 하니,

어머니께서 웃으시면서, 그래 알았다 하십니다.




"그럼 저 가요~ " 하며 일어서는데,

어머니께서,

"가는 길에 우리 바람좀 쐬게 공설운동장까지 태워줘라.. 올때는 찬찬히 걸어오마~"

"예 그래요~ "

 



부모님을 모시고 차로 5 분 거리에 있는 공설운동장으로 갔습니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뜻하고, 녹음짙은 나뭇닢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그 모습이 참 싱그러웠습니다.


부모님과 정자밑 벤취에 앉아 이런저런 지난시절 얘기를 나누던중,

40 여 년 전 처음 평택에 이사와 살던 산속 외딴집얘기를 하게됐습니다.


 










충북 산골오지 산에서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지고내려와,

불을 지펴 밥도 해먹고, 난방도 하며 농사를 짓던 아버지께서,

지긋지긋한 지게질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자식교육을 위해서라도 도시로 이사하는게 낫겠다는 판단하에,

우리 7 남매를 이끌고 평택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낯선 타지 야산기슭 외딴곳에 터를 잡는다는게, 아버지한텐 적응이 쉽지 않았나봅니다.

아버지의 방황이 시작되자 집안은 선장을 잃은 배처럼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께서 자살하신다며 기차철로까지 걸어가는 상황이 발생하자,

멀리 강원도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까지 몆 번 씩 오셨었고,

급기야는 무당을 불러 굿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와중에도 철이 없던 저는, 작은아버지께서 주신 용돈 500 원을 주머니에 넣고,

7 살 여동생 손을 잡고,

산을 넘어 평택시내까지 걸어 나갔습니다.

십 수 년을 산골에서만 자란 제 눈에 비친 도시의 모습은, 신기하고 경이롭고 황홀하기까지 했습니다.

길거리 리어커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과 뽀얀 국물을 함께 담아주는 한 양재기 20 원 하는 홍합이란것도,

이때 처음 맛을 봤습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나!

그 맛이 정말 환상적이더군요.

포장마차옆에 극장도 있었는데,

관람료가 60 원이었으니 당시 작은 아버지가 주신 500 원이란 돈은 정말 큰 돈이었지요.

동생과 영화도 봤습니다.

어릴적부터 영화보는거와 음악듣는걸 정말 좋아했는데,

문화생활을 접하기 어려웠던 산골생활에서는 그저 동경의 대상일수 밖에 없었죠.




어쩌다 산골학교 운동장에,

말뚝을 박고 광목으로 울타리를 친후, 영사기를 돌려 영화를 보여주던 떠돌이장사치가 들어와도,

한 번 보는데 20 원의 돈이 없어,

어머니를 졸라 떼를 쓰면, 빗자루로 두둘겨맞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학교운동장에서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틀어논 확성기의 구성진 트로트가락이 울려퍼지면,

어린마음에 영화가 너무너무 보고싶더군요.

동네 꼬마들과 같이 우루루 몰려갔습니다.

울타리 광목천 밑을 들어올려 개구멍을 만든후,

몰래 기어들어가다 걸린 아이가 싸대기를 맞고 울며 쫒겨나고,

몆 몆 아이는 걸리지않아 영화를 보게 됐는데, 다행히 그 몆 몆에 저도 끼어 영화를 봤습니다.

흑백화면에 빗물처럼 줄이 흐르고 별도 튀지만, 대화면을 가득채우던 문희의 얼굴을 보는 그 순간,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천자락에 저리 이쁜 사람이 나타나 말을 하며 움직일수가 있는지..

이 영향 때문인지, 이후 영화와 음악은 제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날 여동생과 같이 보게된 영화는, 비도 내리지않았고, 별도 튀지않았고, 총천연색 컬러 영화더군요.

흥분된 마음으로 영화에 몰입하던 저에게, 이때만큼은 그 어떤것도 생각나지 않을정도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어린 여동생의 손을 잡고, 극장문을 나서서 어둑한 저녁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걷는 내내 걱정으로 가슴 졸여야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삼촌이 주신 용돈을 어디다 썼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여동생한테 부모님이 물어보면,

우린 오늘 아무것도 안먹었고, 영화도 안봤고, 시내구경만 하다 왔다고 말하기를 몆 번이나 다짐 시켰습니다.




집안이 어수선해서인지,

다행히 그 날 그 일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보지는 않아 잘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잠을 이루지 못하겠더군요.

언제고 그 돈 어디다 썼느냐 물어볼텐데, 오뎅 사먹고 홍합 사먹고 영화 본걸 아시게 되면,

집안이 이렇게 어려운데, 니가 정신이 있냐 없냐 분명 불호령이 떨어질텐데,

도저히 감당을 못하겠더군요.




잠을 설친 저는 동도 트기전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 부모님께 -




- 저는 취직하려고 집을 나갑니다

삼촌이 주신 500 원은 차비로 쓰겠습니다. -






베개위에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집을 나선 저는,

해도 뜨지않은 새벽길을 목적지도 없이, 한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냥 몆 시간을 걸었더니 배도 고프고 지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수는 없더군요.

다시 두 어 시간을 걸으니 너무 배가 고파 하늘빛이 노래졌습니다.

길가 어느 남의집 쓰레기통을 뒤졌더니, 날짜지난 빵이 보여 허겁지겁 물도 없이 빵을 씹어 먹었습니다.

잠시 앉아있다가 다시 한시간을 더 걸으니 너무 힘들고 지치자,

머리속에서 슬슬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이러다간 굶어 죽겠구나.. 집에 가서 모든걸 말하고 잘못했다고 빌면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생각이 이쯤되자,

더이상 앞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집가까이 갔을때 거의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해뜨기전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왔을때 해가 졌으니 말이죠.




집에 도착하니, 마루에 앉아계시던 어머니께서 제가 오는걸 보고, 맨발로 달려와 저를 끌어안고 우시더군요.

집안이 온통 발칵 뒤집혔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기차를 타러 기차역으로 갔나싶어, 몆 시간을 기차역에 가서 서성였고,

온 식구들이 시내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고...

...........................................................................................




그 일에 대해선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넘어 갔습니다.


 


 


 












40 여 년이 흐른 오늘,

어머니께 제가 말을 꺼냈습니다.

"어머니.. 그 때 xx리 살적에 말이죠 사실 지금에 와서 고백이지만,

그때 지가 왜 집을 나갔나하면요...

삼촌이 주신 용돈 500 원을, ㅇㅇ이 하고 시내에 나가, 오뎅사먹고 홍합사먹고 영화보느라 다 썼어요.

어머니께서 아시면 혼날까봐 그래서 그랬던거예요..

죄송했어요.. 지금이라도 말씀드려야할것 같아서요~ "




어머니께서 말없이 들으시더니,




"그 때는 왜 그리 없이 살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돈을 안주니 니가 그랬겠지.. 엄마도 미안했다.

그래도 니가 그런후로 니아부지가 놀래 정신차려 이만큼이나 살게된거 아니겠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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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정 2015-05-08 18:05:59
답글

제 눈이 순간 벌겋게 되며 천장모서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고...코끝이 찌릿하고 콧물까지 훌쩍이게 만드시네요...
더불어 내 어린시절도 떠오르게 해주는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전성일 2015-05-08 18:29:53
답글

쓰신 글 잘 보았습니다.

남석진 2015-05-08 18:43:57
답글

눈물이 펑펑흘러내립니다.
이젠 작은카네이션 얇은봉투 내밀 어머님이 이십여일전
먼길을 떠나셨습니다.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김회석 2015-05-08 19:01:11
답글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나는군요.

전재영 2015-05-08 19:02:47
답글

저도 나이가 오십인데, 옛 기억들이 떠오르는 촉촉한 글 감사합니다.
시골에서는 가끔씩 찾아오는 천막극장과 써커스가 참 인기 좋았지요.
별이 쏟아지는 논 한가운데 앉아 영화보는 그 기분을 요즘 아이들이 알까요 ^^
혼날까봐 가출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군요 ㅎㅎㅎ
모처럼 귀한 글 감사 드립니다.

유병보 2015-05-08 19:08:46
답글

고생많이 하신분들 이곳에 너무도 많으시네요..
설령 고생을 하지않고 곱게 세월을 이겨오신
분들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릴 글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그렇게 사셨는데....
정작 내가 부모가 되고 뒤를 돌아보니...
발벗고 따라가도 우리네 부모님들의 자식 사랑은 따를 수가 없네요...

제물이 없으니 정이 더 나네요...
남음이 많으니 더 정이 없어지는것 같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 생각하니 많이 서글픕니다...
가슴 찡~~한 글 잘 읽었습니다...

선우철준 2015-05-08 19:20:41
답글

잘 보았슴니다~

이상희 2015-05-08 19:45:25
답글

갈비탕이 산해진미보다 더 귀할 수 있다는 걸
두 눈에 맺힌 눈물이 말해주는군요..

이 글이 또 한 사람의 저녁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이종호 2015-05-08 20:56:16
답글

가슴을 후벼파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끼니를 거르길 밥먹듯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ㅡ.,ㅡ^

박병주 2015-05-08 23:12:54
답글

ㅠ.ㅠ

김준남 2015-05-10 00:36:16
답글

잘 읽었습니다. 눈가가 촉촉해 집니다..

변선희 2015-05-10 12:50:41
답글

어머니 아무리 불러도 참 좋은 이름입니다. 어떤 곳에 있어도, 무슨 짓을 해도 늘 믿어주시는 어머니. 그런 믿음의 어머니가 계시는 아이는.. 비뚤어질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정말 큰 가르침인 것 같아요.

김종근 2015-05-10 22:32:50
답글

저의 어린시절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네요...
지금은 항만과 공단으로 변해버린 평택바닷가 고향모습이 그립습니다...

김종문 2015-05-11 15:05:04
답글

해피 엔딩이네요 ㅎㅎ 아버님이 정신 차리셨다는 ......

장의식 2015-05-25 16:15:09
답글

왜 돌아가시고나서야 제가 그렇게 철이 없었다는걸 알게 될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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