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신라 김씨 왕들은 순수한 한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신라 제 30대 문무왕 김춘추의 비문일부가 발견되어 학자들의
연구 결과 놀랍게도 한국인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흉노의 후손으로 밝혀졌다.
경주 김씨 족보에는 시조 가시림(계림)의 나무에 걸린 황금궤짝 속에서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하여 알지(閼智)라고 이름하였다. 신라의 건국은 진한의 6부 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거서간(왕)으로 추대하면서 시작되었다.
박혁거세는 나정 우물가에서 말이 낳은 알에서 나왔고, 그의 부인도 알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신라왕의 조상은 모두 신화로 꾸며둔 것이다.
신라의 56명의 왕중에서 김씨왕은 13대 미추왕이 처음이고, 17대 내물왕부터 56대 경순왕
까지는 모두 김씨만 왕이 되었다.일반적으로 김씨도 6부 촌장중의 한 사람이었고 당연히
신라 6부 촌장의 성(姓)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건 잘못 알고 하는 말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사서에신라 6부촌장에 처음부터 김씨 성은 없었다.
경주 이씨를 비롯하여 박씨 최씨. 정씨. 배씨. 설씨뿐이다.
그 이유는 신라가 창건될 당시의 김씨는 북방 흉노족에서 왔기 때문에 초기의 정권 실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796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제 30대 문무왕(661~681년) 김춘추의 비문이 일부
(상단 왼쪽)가 발견되었다. 그 비문에 의문의 글자가 있었다. 투후(X31226;侯)라는 두 글자와
성한왕(星漢王)이라는 세글자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200여년의 세월이 흘러 이번에 경주시 동부동 한 주택에서 시멘트에 처박힌
문무왕릉비의 없어진 상단부가 발견되었다.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그리고 백제 평정사실 등이 적혀있다.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 사실, 그리고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 즉 신라 김씨의 가계와 관련해서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신라 김씨의 조상을 흉노라고 했다. 지금까지 몰랐던 투후란 말은 우리
나라에는 없었지만 중국 황제가 공이 많은 자를 투후라는 지방 제후 벼슬이다.
결국 투후란 제후를 뜻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번에 확인된 비문의 상단부에는 문무왕의 15대 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고
밝히고 "투후(禾宅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했다(傳七葉)"는 구절이 있다.
"투후 제천지윤"이란 <한서(漢書)·열전>에 나오는 김일제(金日 石+單)라는 인물을 말한다.
그럼으로 경주김씨 시조인 김알지가 바로 김일제가 된다고 학자들은 단정하고 있다.
경주(안강)에 있는 42대 흥덕왕능은 일본학자들의 연구결과 흥덕왕의 무덤임을 밝혀냈고,
그 비문에도 성한왕과 7대라는 글자가 있었지만그 의미를 몰랐다고 한다.
김일제(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 한나라 장수 곽거병의 흉노
토벌 때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비문 내용 가운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의
후손(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했다(전칠엽·傳七葉)"라는 구절은 무엇인가?
신라의 경주 김씨가 된 것은 흉노족은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종족임으로 ,
한무제가 김(金)씨 성을 내렸다. <한서·열전·김일제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기서 "제천지윤 전칠엽"은 신라 문무왕 선대의 7대 전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한서 김일제전》의 그에 관한 기록을 여기에서 살펴본다.
무제 원수(元狩) 연간에 흉노의 곤야(昆邪)와 휴도가 한에 항복을 하자고 모의했다.
그러나 나중에 휴도가 후회하자 그를 죽인 곤야왕이 무리를 이끌고 한에 항복하여
열후로 봉해졌다.
김일제는 아버지가 한에 항복하지 않다가 죽은 것을 보고 어머니 알지(閼氏)와 동생
륜(倫)과 함께 14세가 될 때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황문(黃門)에서 말을 기르며 살았다.
나중에 무제가 놀이를 갔다가 김일제가 기른 말을 보고 후궁의 곁에 두라고 명했다.
김일제를 비롯한 수 십 명이 말을 끌고 대전 아래로 지나갔다. 누구도 감히 몰래 훔쳐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김일제만 당당하게 대전을 바라보았다.
김일제는 키가 8척 2촌이었으며, 매우 엄격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기른 말은 유난히 살집이 좋았다. 황제가 그 까닭을 묻자 김일제는 자세히 자신이
말을 기르는 법을 설명했다.
무제는 그를 기이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의관을 주고 목욕을 시켜 마감(馬監)으로 등용했다.
나중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승진하여 무제의 측근이 되었지만, 김일제는 조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무제는 그를 더욱 신임하여 천금의 상을 하사하고 세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는 것을
허락했다. 김일제는 항상 무제를 측근에서 보필했다. 그를 시기하는 귀척들은 이렇게 비난
했다.“폐하께서는 오랑캐를 얻더니 오히려 더 중시하는구나!” 그러나 무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후하게 대했다.
김일제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정중하게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돌아갔다.
김일제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은 성장하면서 행동이 올바르지
못했다. 아들이 대전 아래에서 궁인들을 희롱하는 것을 본 김일제는 행동이 지나치다고
꾸짖다가 죽여 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무제가 심하게 화를 내자 김일제는 아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을 설명했다. 무제는 매우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마음속으로
김일제를 더욱 존경했다.
망하라(莽何羅)가 모반을 꾸몄을 때 김일제는 그의 생각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 때 무제는 영광궁(靈光宮)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황제가 일어나기 전에
망하라가 부하들과 함께 들어왔다. 김일제는 미리 측간 옆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숨어 있었다.
이 순간 칼을 뽑아들고 동상(東廂)으로 다가오던 망하라는 김일제를 보고 안색이 변해 침실로
달려들었다. 김일제는 몸을 날려 망하라를 끌어안고 대전 아래로 던졌다가 재빨리 포박했다.
심문을 하여 죄를 밝힌 다음 그 사실을 무제에게 보고했다. 김일제는 이처럼 충성심과 효성이
지극했다. 무제를 수 십 년 동안 모시면서 김일제는 조금도 곁눈질을 하지 않았다.
무제가 궁녀를 하사했지만 그는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감탄한 무제가 그의 딸을
후궁으로 달라고 당부했지만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의 독실함은 이와 같았다. 무제는 더욱 남다른 사람으로 여겼다.
무제가 병에 결렸을 때 어린 주군을 보좌하고 있던 곽광은 김일제에게 태자의 보좌역을 양보했다.
그러나 김일제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인데다가 흉노가
한을 가볍게 여길까 걱정됩니다.” 결국 곽광을 돕는 역할을 담당했다.
곽광은 딸을 김일제의 아들 상(賞)의 아내로 주었다.
무제가 망하라의 반역을 토벌한 공을 인정하여 김일제를 투후(X31226;侯)로 봉하라는 유조를 남겼다.
(이하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