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고향 : 평안도 평양부
사망 1971년 3월 11일 (76세)
국적 대한민국
본관 진주
학력 스탠퍼드 로스쿨 J.D.
직업 기업인(하지만 유일한의 여권에는 교육자로 썼다고함)
종교 개신교
유일한 부인 : 박미리(유일한 아내는 중국인으로 원래 이름은 호미리)
부모 아버지 유기연, 어머니 김기복
유일한 친척 유일한 동생 유특한
이분이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 박사 입니다.
이날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에서는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과 부천 현대백화점에서 갑질을 하다가 전국민적 비난을 받게된 백화점 모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진상모녀야 일반 개인이지만, 조현아의 경우에는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장녀로서 아버지의 힘을 등에 업고 그동안 숱하게 ‘갑질’을 해온것으로 유명한데요.
여기서 유일한, 유한양행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것은, 대주주일가의 ‘갑의 횡포’가 없는 기업, 그리고 회사 경영과 기업의 정신이 깨끗하고 투명한 기업의 모범사례로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조현아 조원태 조현민 이 삼남매는 하나같이 좋지 못한 케이스를 남겼습니다. 이렇게 인성과 능력에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남들 위에서 ‘횡포’를 부릴 수 있는 이유는 대주주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대한항공의 경우에는 조용히만 있어도 기업이 잘 굴러가는 거의 독점에 가까운 기업 입니다.
아시아나 항공이 가지지 못한 노선을 대한항공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게 꽤 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이런 상황에서도 대한항공을 타야만 하는 상황이 생길정도로 그냥 유가가 폭등하지만 않는다면 알아서 굴러가는 기업 입니다.(이번 사건이 터진 뉴욕 노선 또한 대한항공만 운용하는 노선)
철자법도 제대로 모르는 조현민은 마케팅을 담당하는 수장이고, 항공기 내에서 가장 수고하는 직원들을 ‘기물’ 취급하는 조현아가 항공서비스 쪽을 담당하고 있으니 능력있고 열정있는 젊은이들이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요즘 시대 통탄할 일 입니다.
오히려 가족들을 회사에서 해고시킨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이런 상황이 일반적인 우리나라에서는, 대주주일가가 회사를 손에 쥐고 ‘을’들을 쥐어짜며 살아가는게 아니라, 기득권을 내려놓고 전문경영인들이 회사를 운영할 수 있고, 대주주 가족들 사이의 파벌로 인해서 회사의 구성원들이 피해를 받지 못하도록, 오히려 가족 친지들을 회사에서 모두 내보내 버린 ‘동화’에서나 나올만한 그런 기업이 유한양행 이었습니다.
유한양행에서 일을 했던 이종대 전 회장은 회사(유한양행)에서 창업주의 가족들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때 아들이 부사장을 지내고, 조카도 회사에 있었지만, 창업자의 ‘유일한 박사’는 모두 ‘해고’를 시켜버렸습니다. 가족이 회사에 있으면 회사 발전에 지장을 받는다는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요구도 거절했던 유일한 박사.
그리고 유일한 박사의 대단한점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정치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서는 기업들이 살아남기가 힘든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자금에 대해서도 소신과 청렴함을 굳건하게 지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말을 듣지 않는 기업’들을 손볼때 가장 흔하게 꺼내는 카드가 바로 ‘세무조사’ 입니다.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전두환 보다 더 무섭고 절대적이었던 권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정치자금을 거부한다는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와 연관되는것을 거부했고, 곧바로 세무조사에 들어갔지만 유한양행은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유한양행의 세무조사를 맡았던 팀장이 방송에 나와 하는 이야기가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유한양행 같은 회사는 국민적 존경을 받아야 하는 그런 회사인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무조사가 끝난 후에 완전히 깨끗한 기업이란걸 알게되고, 오히려 동탑 산업 훈장을 줬다고 합니다.
이 사진이 유일한 훈장 수여 장면.
그리고 유한양행에 일했던 직원들, 그리고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하나같이 회사를 사랑하고 아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대한항공 직원이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 한 내용을 보면, 오히려 이번 땅콩회항 사건에 대해서 놀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비일비재 한것이고, 로열패밀리(대한항공 회장 부부 혹은 그의 자식들)가 비행기를 타게 되면 그 전날부터 그들이 좋아한느 것들부터 좋아하는 가수 까지 교육을 하게 되고, 대주주일가가 타는 그 자체고 공포였고, 말없이 내리는것이 칭찬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크게 긴장을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회장의 사모님(조현아 엄마)이 비행기를 타고나서 한다는 말이, “저리 호박같이 생긴 애가 왜 서비스를 하느냐”였다는 것입니다.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격모독, 외모비하 발언을 거침없이 하는 것이지요.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랐으니 아이들도 그럴 수 밖에요.
더 무서운것이, 그 직원의 폭로에 의하면 못생겨서 사과를 했다는 것 입니다. 그것도 무릎 꿇고요. 그리고 직원들은 그런게 일상이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유한양행과는 너무나 다른 회사 분위기 입니다.
-- 이제 지저분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유한양행에 대해서 더 알아보도록 할게요--
‘유일한 그리고 유한양행 역사의 시작’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는, 서울 종로2가에 ‘유한약방’을 차리게 된것이, 유한양행의 시작 이었습니다.
‘유한’은 유일한을 줄여서 쓴것이고. ‘양행’은 세계로 통하는 넓은바다 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유한양행 로고
버늘나무가 유한양행을 대표하는 상징이 된 이유는, 유일한 박사의 성인 ‘유’가 버들 柳 라고 합니다.
유일한 박사는 무장교육도 받았을 정도의 ‘독립운동가’였다고 합니다.(해외 독립군인 맹호군 창설의 주역) 미국의 유한주식회사의 대표이사를 서재필 박사가 맡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1926년,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갈때, 서재필 박사가 유일한 박사의 귀국기념으로 자신의 장녀인 조각가 스테파니 보이드에게 말해서 만든 선물이 위의 버드나무 로고 라고 합니다.
그리고 버드나무가 된 이유는 서재필이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마음놓고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되라"는 뜻에서 정해준것이라고 합니다.
위의 유한양행 로고는 1926년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바뀐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대인배였던 유일한 박사. 놀라운 유한양행 주식 배분
1939년, 대한민국 기업 역사 최초로 전사원 주주제를 실시하게 됩니다. 유일한 박사는 자신이 가지고있던 유한양행 주식 52%를 당시 유한양행 직원들에게 ‘공짜’로 나눠줬습니다. 애초에 ‘인격’자체가 다른 사람 이었습니다.
지금의 유한양행 대표이사 역시 회사에 평사원으로 들어와서 한계단씩 올라온 사람 이라고 합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창업주 일가의 이야기를 듣고싶어서 회사에 문의를 했더니, 연락처도 모르고 어디서 뭐하고 살고 계시는지도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회사의 고객이었던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유일한 박사의 가치관과 인격을 또 한번 알 수 있었던 일화는, 유한양행의 제품을 유일한 박사가 필요로 할때는, 자신의 돈으로 사서 먹었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보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깨끗한 기업입니다.
여권에 기업가가 아닌 교육자로 직업을 표기했던 유일한 박사.
‘진정한 사회환원’을 했던 유일한 박사 그리고 그의 자녀
1971년 3월 11일 유일한 박사가 별세했던 날입니다. 그리고 한달 정도가 지나 그의 유언장이 공개 되면서 큰 충격을 주었는데요. 당시 돈으로 36억2000만원이라는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이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에 적혀있었던 것 입니다.
그때 36억이란 돈은 지금으로 치면 얼마나 되는걸까요.
1970년에 라면 가격이 20원이었습니다. 지금 라면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700원으로 잡는다면 35배의 차이 입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300억에 가까운 돈이군요.(제가 제대로 계산한건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유서에는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유일한 손녀)의 학자금으로 남긴 1만불을 제외한 모든 돈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박사가 살 고 있던 그 집은 지금 해당 건물 소유주인 성공회대학교에서 신학연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유일한 유서
첫째 유일선의 외동딸, 손녀인 유일링(당시 7살)에게는 대학졸업할대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남긴다.
둘째 유일한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 그리고 그 주변의 땅 5천 평을 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학교, 유한공고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하여서 그 어린 학생들의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유일한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모두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내 호미리는 딸 유재라가 그 노후를 돌봐주어라.
다섯째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켜줬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그리고 20년이 지난 91년에는, 유일한 박사의 딸인 유재라 역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200억이나 되는 전재산을 또 한번 사회에 환원하게 됩니다. 그냥 집안이 천사집안 인듯 합니다. 일반인들과는 피가 다른것 같아요.
솔직히 저라고 하더라도 절대 저렇게는 못할것 같습니다. 한번 태어나 인생 하고싶은거 다 하면서 살고싶지 모든걸 내놓는다는 건 절대로 쉬운일이 아닙니다.
유일한 박사는 어떻게 미국으로 가게 되었을까.
유일한 박사의 원래 본명은 ‘유일형’이었습니다. 박사님의 아버지인 유기연씨는 1800년대 부터 기독교 신자였고, 그 역시 장사꾼 기질이 있어 미싱기계 평양 대리점과 견직물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일한 박사의 아버지 역시 독립군을 금전적으로 후원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딸은 교육받지 않는게 상식같았던 시대였으나, 딸들을 모두 교육시키고, 아들인 유일한을 많은것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일찍이 미국으로 보내게 됩니다.(당시 9살)
이유는 모르겠으나, 네브라스카 고등학교를 다닐때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집안이 부유했으나, 중학생일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서 신문배달을 했을 정도로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아무래도 아버지 역시 강직하고 청렴하셨던 분이니 영향을 받았겠지요)
유일한 박사는 공부도 잘했지만, 미식축구도 잘해서 학교에서 인정을 받았고, 미식축구로 인해서 장학금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웅변대회에서도 백인들을 제치고 우승할 정도였다고 하니,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왼쪽이 유일한 박사
그리고 후에 서재필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당시 이승만과는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보다는 정치가에 대한 야망이 컸기 때문에, 동포들이 걷어준 자금을 자신을 위해 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이 악연은 후에도 이어져서, 유한양행은 이승만에게 세무조사를 통해서 여러번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유일한 박사의 중국인 아내 호미리
유일한 박사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아르바이트를 한적이 있는데, 그의 아내 호미리를 만나게 된것도 그때라고 합니다. 그의 아내 역시 상당한 수재였는데요. 코넬리의대에서 동양 여성 최초로 소아과 의사 자격증을 딴 사람이었다고 하네요. (후에 한국에서도 좋은일을 하는데 동참합니다.)
유일한의 아내 호미리 여사.
유일한 박사가 젊었을때는,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에서 일하다, 뉴욕에 있는 제네럴 일렉트릭(GE)의 회계사로 들어가 일하게 되는데, 유일한 박사만 유일하게 동양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년만에 능력을 인정받아서 지사의 책임자로 가게 되는등 빠르게 출세르 ㄹ했으나, 고국 동포들을 등지고 자신만 잘살 수 없다며 바로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디트로이트로 이사를 간 후에, 또 중국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게 됩니다. 당시 중국인들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숙주나물이 필수였는데, 잘 썩고 쉽게 말라버리는 특성상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걸 유일한 박사가 몇달간 연구끝에 통조림 방식을 이용해서 장기보관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대량생산을 하기 위해 백인 친구와 공장까지 세우게 됩니다.
유일한 어록
그 회사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고, 중국에 거래선을 넓히기 위해서 중국에 갔다가, 20년만에 한국에 들르게 되는데 여기서 유일한 박사는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조국의 동포들을 본 기억이 잊혀지질 않아서, 잘나가던 비즈니스에서 손을 떼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미국에서 ‘유한주식회사’를 세우고, 그때 사장자리에 서재필이 올라가게 됩니다. 서재필을 사장자리에 앉히고 한국으로 들어온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을 만들게 됩니다.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후 처음에 판것은 약이 아닌 염료
처음에 유한양행 회사를 차리고 나서, 수입염료를 팔게 됩니다. 당시 한국땅을 밟고나서 돌아다녀보니 대부분 농업을 통해서 먹고사는 서민들이 쉽게 더러워지는 흰색옷을 입고 일을 하는걸 보게 되고, 염료제품을 수입해서 팔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약을 팔게 되는데, 그 시작부터가 다른 제약회사들과는 달랐습니다.
만병통치약 광고하던 시절부터 깨끗하게 장사했던 유한양행
당시에는 다른 회사들은 어떤 질환에 어떤 약효가 있는 약이라고 광고하지 않고 먹으면 좋아지는 그런 만병통치약 같이 광고를 했었는데, 유한양행 만큼은 각 제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광고를 했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기업은 기업주를 닮나 봅니다.
당시에는 규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약성 제품들도 버젓이 팔리고 있던 시절이었고, 경쟁회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마약성분이 들어있는 진통제와 이상한 제품들을 한참 팔때도 유한양행은 요지부동 절대로 그런것을 팔지 않았고, 유한양행의 한 간부가 만주와 한국에서도 마약성분을 담은 약이 잘팔린다며 유한양행도 팔아야 한다고 하자, 바로 해고시켰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 이후에도 다른 회사들이 수요에 비해서 보관료가 많이 들었던, 꺼려하던 약품들 하지만 병원과 환자들에게 꼭 필요했던 약들 위주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박사의 부인 호미리 여사 역시,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심각해지자, 직접 소아과 병원을 차려서,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해주었습니다.
유일한 그리고 그의 아내
시작부터 끝까지, ‘깨끗함’ 그 자체였던 유한양행. 다른 기업들은 악행과 비리에 대해서 말하자면 끝이없지만 유일한 박사와 유한양행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 입니다.
존경받아야 마땅한 회사라 생각되어 길게 글을 써봤습니다. "유일한" 그가 우리나라 기업 역사에 있어서 유일한 케이스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