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이것 저것 싸가지고 가봐야 쓸모가 없겠지요.
책 한권을 가지고 간다면
저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현재 1년 반 동안 정독하며 읽고 있는데
정말 좋은 책입니다.
별로 두껍지도 않은 책이지만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정독하며 읽고 있지요.
원래 라틴어로 쓰여졌지만, 저는 에드윈 컬리가 영역한 텍스트로 읽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워낙 엉망이라 책의 가치만 떨어뜨려 놓았고요.
제대로 의미를 짚어 이해한다면 정말로 대단한 책입니다.
기하학 방식으로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칸트나 헤겔처럼 난삽하지도 않아요.
대신 부연설명이 없어서 처음이 어렵습니다. 1부와 2부가 꽤나 이해하기 어렵지요.
이 부분만 공들여 이해하고 넘어가면 3부 부터는 오히려 재미있습니다.
데카르트가 근대를 열었다고 흔히들 얘기하는데
당대 최고의 지성 데카르트를 요목조목 반박하며
근대가 시작되자마자 근대를 허물고 탈근대를 지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를 한 500년은 앞서간 저작이라 할 수 있겠지요.
니체가 자신의 책을 이해하는데 200년은 걸릴 것이라 했는데,
실상 백년이 채 걸리지 않았지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정말로 오랫동안 제대로 이해 받지 못했고, 이제와서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듯
싶습니다. 마트롱, 알튀세르, 들뢰즈, 발리바르, 네그리 같은 사상가들이 왜 그리 스피노자를
높이 평가하는지 이제서야 조금 감이 옵니다.
그는 인격 신을 거부했지만
그의 청빈함, 수난, 사랑 그의 인생 전체가 예수보다 신을 가장 많이 닮은 듯 합니다.
학문적 신념을 위해 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영원한 저주를 받으며 짧게 생을 살다갔지만
그의 삶과 저술에서 풍겨나오는 진리에 대한 확신은 단호합니다.
정치학, 심리학, 정신분석, 자연학에 이르기까지 그가 근현대 철학사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지요.
에티카라는 제목 그러니까 윤리학이라는 건데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부제가 붙기에 적당한 학문이죠.
윤리학은 실천이 문제이고, 따라서 윤리학은 정치학입니다.
인간들이 왜 자신의 코나투스(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에 반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가?
왜 대중이 예속을 열망하는가에 대한 해답도 명쾌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진지하게 한번 씨름해 볼 책을 찾고 계셨다면 저는 에티카를 권하겠습니다.
아무나 도전할 수 없는 책이지만 일단 넘어서면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줄 겁니다.
저는 이제껏 원 없이 즐겼고 피니쉬 라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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