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일학년 때의 가을입니다. 그 날은 제게 참으로 없는 것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하늘은 더 없이 푸르렀으며, 전날 받은 용돈이 고스란히 지갑속에 있었고, 가을을 기념하여 산 새 옷은 날아갈 듯 기분좋게 새 옷 냄새, 즉 아직 덜 날아간 휘발류 냄새 같은 그런 내음이 오히려 상쾌하였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새로 동네 제화점에서 맞춰준 빨간 구두는 새로 산 빨갛고 큰 가방하고 기막히게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그 하이힐은 너무나 발이 아팠으므로 남들이 안 볼 때 신을 요량으로 가방에는 운동화도 챙겨 있었으므로 정말 못 가진 것이 없는 날이라는 자신에 넘쳐 학교로 갔습니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게오르규의 25시와 창비 신년호까지 챙긴 터라 아주 못 가진 게 없다고 자신하는 날이었죠.
그런데 막상 학교에 가니, 친구들이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고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는 애가 어디 있느냐?”
며 저는 친구들에게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서 쫓겨나고 나니, 갈 곳도 없던 저는 서양미술을 전공하는 친구나 만나러 갈 생각으로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참 신기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비만 내리면 활짝활짝 우산들을 펴드는 것일까? 하지만 저는 그 풍요한 그 날에 우산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그 까짓 우산 따위에 주눅이 들지 않겠노라 작정하며 기분 좋게 콧노래까지 불렀습니다. 물론 버스가 달리며 좀 시끄러울 때는 노래를 부르다가, 버스가 멈추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딱 멈추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죠.
그런데 어디 쯤에서인가, 어느 누가 탔습니다. 저는 늘 그랬듯이 그 사람을 보지도 않고 가방만을 보면서 얼른 가방을 들어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낯 익은 인사말을 하는데도 옆도 쳐다보지 않았는데, 문득 내 옆으로 서 있는 그 사람의 다리가 지나치게 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생각한 게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정말 들어준 것을 후회할 정도로 뭔가 가득 든 가방에 무릎이 눌리는 기분에 조금 새 옷이 걱정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빗 속을 달리는 버스 안의 유행가에 나름 취하여 있는데 버스가 멈추고 드디어 제가 내릴 친구의 학교 앞이었습니다. 저는 얼른 차에서 뛰어 내려 제일 먼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비가 조금 내리고는 있었지만 그 까짓 비 땜에 주춤하는 건 우습다는 듯 왼쪽의 미관쪽을 향하는 길로 들어서는데, 어느 누가 우산을 받춰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은 그 서슬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걸어가는데, 뭐 무슨 시험시간처럼 이어지는 적막이 너무 어색해서 흘깃 그 사람을 보다가 제가 문득
“내가 가방 들어준 사람 맞죠?”
“네.”
“근데 무슨 가방이 그렇게 무거워요? 무슨 돌덩이를 넣고 다니나?”
그런데 그 사람은 제 말에 아주 공손하게
“그렇게 말입니다. 가방 속에 든 책만큼 머릿 속에도 든게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주는 그 말에 조금 미안 했지만, 저는 개콘에 나오는 그 14학번 소녀처럼 가장 자신만만하고 건방지던 시절이었으므로 잘난 체 한 마디 했습니다.
“저는 가방 속에 든 책보다 머릿 속에 든 게 더 많아요.”
이렇게 말하면 좀 욕을 하거나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정말 더 진지하게
“부럽습니다.”
라고 합니다. 저는 조금 멋 쩍어져서는
“사실 가방 속에 책이 두권 밖에 없거든요. 두 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옆 모습을 보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정말 멋있어 보이는 킹카 였거든요. 그리고 좀 연식도 있어 보이고. 그래서 저는 또
“복학생이에요? 왜 이렇게 늙었어요?”
“아니요. 4학년이지만 복학생은 아닙니다.”
암튼 이렇게 마음껏 까불었는데 그 분은 참 진지하고 친절했습니다. 그렇게 걷는데 미관쪽이 보이고, 친구가 보면 어디서 낯 선 남정네와 걸어오느냐는 오해를 살 까 두려워 제가 말하였습니다.
“제가 백미터를 몇 초에 뛰는 지 아세요?”
“글세 여자들은 얼마나 걸리나......,”
“십 칠 초 삼이 걸리거든요.”
“잘 뛰는 건가?”
“잘 모르겠어요. 근데 여기서 저기 미관까지 한 백미터쯤 되겠죠?”
“그런거 같군요.”
“그럼 전 뛰어가겠어요. 제 생애에 있어 한 십 칠 초 정도는 비를 맞아도 될 것 같아요~”
이러면서 뛰어갔는데 뛰다가 뒤가 뜨거운 느낌에 보니, 거기 그 사람이 우산을 받고 쳐다보다가 저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습니다.
뭐 이렇게 이야기는 끝나고,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친구들이 또 난리였습니다.
“그런 킹카를 이름도 과도 모르고 보내주는 게 어디 있느냐?”
아무튼 이렇게 아우성치는 친구들 덕분에 저는 그 날 친구들과 그 학교에 갔고, 어느 학과의 수강편람을 철사줄을 끊고 훔쳐 내어 잔디밭에 앉았습니다.
그 날이 금요일이었고, 금요일 오후 수업만 있는 과를 찾기였죠.
그렇게 과를 찾고 나니, 한 열 개의 과가 넘었는데, 뭐 이름이 거의다 이상한 과들이었습니다. 제어계측 공학과, 공법학과, 등
아무튼 저는 그 날 그 열 개 넘는 과에 0월 0일 금요일 미관입구까지 우산씌워주는 분 귀하 하고 겉봉을 쓴 후 편지를 쓰고,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몇 마디 하고는...
제 가방 속에 들어있던 책은 몇 권?
제가 백미터를 몇 초에 뛴다고 했나요?
등등을 써서 보냈는데, 며칠후부터 편지함이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보낸 모든 과에서 편지가 왔다는 것이죠.
“내가 그 사람이 맞는데. 답은 만나서 해 주겠다.”
“일단 만나면 모든 이야기를 하겠다.”
그 중 어느 사람은 우리과 선배들은 모두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배들보다는 킹카니 저를 만나시면 어떻겠느냐?
등등 이었고, 결국 그 분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니, 비 오던 어느 금요일 가을 날에 보았던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