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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요청] 박통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 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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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3 12:1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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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요청] 박통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 좀.....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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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가입일자 : ]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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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Takaki Masao 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는데 이게 맞는건지요?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창씨개명이나 일본군 장교 복무 자체가 문제되진 않는다. 국민의 80% 정도가 창씨개명을 했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은 일본군 장교라서 친일파냐?
* 임시정부 마지막 요인 조경한 선생 회고를 보면 박정희는 만주에서 조선인 병사를 독립군으로 빼돌려서 유명하다고 함.
* 오카모토 미노루 주장은 북한에서 박정희 비하목적으로 시작한 걸 남한 좌익세력이 답습한 것임
실제로는 오카모토 히로시의 오기로 광주학생 운동 당시 무자비한 진압으로 공분을 샀던 인물인데 박정희 대구사범학교 3학년때 대구사범학교로 전근하게 되자 그 자의 이름을 박정희의 제2의 창씨개명인 것처럼 날조한 것으로 히로시와 미노루는 한자가 비슷해서 히로시를 미노루로 잘못 옮긴 것을 후에 날조한 것임. 박정희 군속계만 봐도 1945년까지 다카키 마사오로 기록되어 있음
* 박정희가 남로당 조직에 대해 발설한 것을 배반 운운하지만 박정희는 빨갱이가 아니다.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인정받던 당시 친형 박상희가 죽자 그의 동료들이 박정희를 꼬드겨 가입만 시킨 것이지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내용은 전혀 없다.
* 5.16 군사혁명 당시 국민의 40%가 찬성, 20%는 찬성하되 시기 상조, 40%만 반대. 미국은 국민의 지지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으므로 내정간섭 하지 않겠다고 기자회견.
* 당시는 요정정치 문화로 민주화 인사라는 작자들도 사생아까지 둔 상황이며 요정에서 접대하는 여대생을 건드리거나 사생아를 둔 적이 없음
* 혈서는 날조 가능성이 커서 인정하기 힘들다. 독립군 토벌도 사실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 당시 박정희의 친일 행각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결론냄. 박정희 혈서 입대 재인증이란 제목의 만주신문 사본도 위조 가능성이 크다. 일단 문제의 페이지만 보관하고 있고, 당시 쓰지 않던 현대 일본어로 작성된 점. 민족문제연구원에서 처음엔 만주일보 자료라 주장하다 1935년 폐간된 것이 알려지자 만주신문으로 정정한 점. 혈서제출시기가 합격자 발표 이후인 점. 박정희는 하사관 자격이 있어서 혈서 없이도 나이제한에 걸리지 않는 점. 당시 채용은 치안부 군형과에서 담당하나 있지도 않은 징모과라고 되어 있는 점 때문임오히려 국군 장교로 여수순천 반란사건 적극 진압했고 국내 남로당원 색출과정에서 연두된 것 뿐으로 해체된 빨갱이 세력들이 박정희 배신을 운운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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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 개명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c182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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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다는 창씨개명은 6개월 동안 창씨계출(創氏屆出) 신고를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3개월 동안의 계출호수는 7.6%에 불과했다. 이에 총독부는 법의 수정, 유명인의 이용, 권력기구를 동원한 강제 등을 통해 마감인 8월까지 창씨율을 79.3%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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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창씨 개명의 문제는 언제 했는지, 자발적으로 한것인지가 중요합니다.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9034 이 글에 보면, 박정희가 창씨 개명을 한 시점은 최소한 입교하기 이전인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1940년초에 자발적으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오카모토 미노루는 학계에서는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로서 취급되는 것으로 앎니다. 일부 개연성은 있으나 확증이 없어, 현재는 2번의 창씨개명은 아닌것으로 본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참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10625
3. 혈서 이야기는 위에 두번째 링크글에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단 신문 기사로서 지면에 실린 것 입니다.
전후 관계사 날조의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최소한 그러한 기사가 실릴만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짐작할만합니다.
흔히 날조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그 기사를 싫게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일본군쪽의 홍보장교 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즉, 그 장교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것이지, 없었다는 근거또한 없습니다. 따라서 사료가 있는 혈서를 썼다가 더 신빙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4. 독립군 토벌
위에 링크를 걸은 위키백과 박정희 부분에 관련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만주군에서 박정희가 참전한 전선은 중국의 팔로군과 대치 상황인 부대였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다만, 그 팔로군에 다수의 독립군이 참여 했었다는 점과, 평소 조용하던 박정희가 토벌 명령이 내려지면 적극적이 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토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을 고려 하면 문제가 있지 않나 봅니다.
5. 5.16은 자체로는 많은 사람이 찬성한 것은 사실인듯도 합니다.
다만, 5.16이 그의 말처럼 정당했다면, 스스로 물러나고 정당하게 선거를 치뤘어야 함에도, 그는 실질적으로 쿠데타 군정을 했습니다. 또한가지는 옹호가 많았다고 하지만, 정치 상황이 볶잡했을뿐, 과연 쿠데타를 할 만큼 문제 상황이었는냐는 점 입니다.
6. 요정 정치 문화와 별개로, 안가에서 일반인 대학생이나, 연예인을 불러다 희롱한 점은 이미 상식의 선에서 벗어난 행위 아닌지요? 이건 상식의 문제인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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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까지.. 나머진 자료 찾아서 첨부해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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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50.***.222 |
2014-09-03 16: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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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이어서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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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정천의 경우
지정천은 위키백과를 보면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원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 했다가, 통감부 압력으로 폐교후, 50명의 선발 인원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데, 이때 일본에서 유학을 하게 됩니다. (군사로서 겠죠?) 1914년 졸업후, 중위 진급한 다음 1919년에 만주로 망명합니다.
1919년 망명 이전에 문제라면 문제일 수도 있으나, 있던 지위를 버리고 망명한 사람을 보통 친일파라고 하나요?
참조 : http://ko.wikipedia.org/wiki/%EC%A7%80%EC%B2%AD%EC%B2%9C
반명 박정희는 일본의 패망시점까지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장교로서 복무하다, 팔로군의 인도하에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과 "빨갱이"라는 단어를 연관시킨 교묘한 말돌리기 인듯합니다.
일단 박정희가 남로당에서 무었을 했느냐는 점은 확실히 불명확한 점이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가서 "군사총책"이라는 지휘를 맡았던 것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명단을 팔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왜 남로당에 가입했느냐는 점에서 "빨갱이는 아니다"라는 말 자체는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2992
3. 조경한의 증언에 관한 건은 검색이 잘 안되는 군요.
일단 현재까지 찾아본 바로는 비슷한 이야기는 돌고 있는데,
문제는 근거가 그 증언이라고 하는 것 하나 뿐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관련되서 서술된 내용들은 사실관계도 안맞는 것이 대부분인것으로 보입니다.
문제의 기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2&aid=0000043430&viewType=pc
참고글 : http://dvdprime.donga.com/bbs/view.asp?bbslist_id=923765&master_id=172
위의 세계일보기사의 증언이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되야 하겠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의 행각을 봐서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내용이라고 보입니다.
즉, 저 박정희와 조경한의 두명이 만남에 대한 서술 자체도 신뢰도가 의심되지만,
그 이전에 조경한이 알고 있던 "다카키 마사오"에 대한 평이 얼마나 신뢰가 가능한 것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4. 공산당의 문제...
제가 아는한 현재 우리나라 법에서 "공산당"을 금지하는 법은 없는 것으로 앎니다.
다만, 공산당이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와 함께, 정치적인 효용을 고려하면 아무도 공산당을 자처하지 않을 뿐이 아닌지요?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놓고 불법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로 상당히 위헌적인 발언이라고 봅니다.
남조선로동당 흔히 줄여서 남로당이 문제가 된 이유는, 실질적으로 그 활동이 폭동과 반란사건을 지휘했기때문이지, 공산당이라는 노선의 문제라고 보긴 힘들다고 봅니다.
※ 주의 ! 공산주의가 좋다고 해석하진 마시길.. 전 수정자본주의와 북유럽식 사민주의쪽에 더 끌리는 사람입니다. 그저 법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5. 개인적인 의견
친일 행적과 친일주의자를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친일 행적의 유무를 따지는 것에서는 박정희는 자유로울 수 없는 측면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만회할 만한 행위가 있는지를 보면 사실상 근거를 가진 사료로서 자료는 없다고 보입니다.
즉, 친일 행적이 있고, 그것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그가 얼마나 친일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객관적으로 증명하긴 힘들다고 봅니다. 의도가 선한, 즉, 친일을 해서 조선내의 조선인에 대한 입지 확보라는 의도를 가진 행위 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친일일 경우 친일파로서 분류되는 것이 억울 할지언정, 사실관계로서는 맞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물론 박정희가 기미가요를 즐겨부르고, 전범자이자 극우파인 일본인 인사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깍듯이 대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그가 생각하는 일본이 하나의 롤모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안할 수 없다고 봅니다. 군국주의 일본을 롤 모델로 본다고 해서, 무조건 친일파라고 볼 수 없겠지만, 그가 일본에 대해 가진 호감은 증명하는 단초는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박정희의 경우 남로당 경력은 사실 비아냥을 목절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히려 그가 행한 통치 행위에서 그의 문제점의 본질이 있다고 봅니다.
특히 독재와, 상대 정치세력에 대한 타압, 반민주적 영구집권 시도, 다 파혜치기도 힘든 부정부패,
후진적 군사 문화, 친일파에 대한 비호와 기용 등.
비판의 화살은 그가 행한 통치행위와 판단에 향해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를 하나의 인과율의 범위내에서 이해 한다면, 그가 후에 행한 철권 통치와 부정부패는 그 이전, 그가 가진 배경과, 그가 가진 사고관에 기반을 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젊은시절 친일 행각이나, 남로당에 대한 배신행위를 주목해, 그의 심성을 재고자 하는 것이고,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친일 행각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박정희가 일부에서 주장하듯, 옳곧은 사람이라면, 이후 수많은 문제 행각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달라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했던 행위들이 악한것에서 선한것으로 바뀌지는 않으며, 그 원인을 다르게 다시 진단해 봐야 하는 것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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