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3개월밖에 다니지 못한 경기도 여주의 시골 초등학교의 동창회를 다녀왔습니다. 3개월 밖에 다니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동창회를 가게 되었는 가 하겠지만, 마침 연락이 된 때 동창회 모임이 임박해 있었고, 그 동창 중의 한사람이 일가인 아저씨벌인 탓에 그 빽도 좀 작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곳은 실상 서울에서 무척 가까운 곳이 되어버렸지만 1970년대만 해도 무척이나 오지 중의 오지라 버스도 안 들어오는 동네였으며 한 시간을 걸어가야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버스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3킬로는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고, 학교 인근 몇 몇 아이들 말고는 모두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학교에 등교해야 하는 마을이었습니다.
나는 1971년 우리 동네에서 일곱 명의 친구들과 같이 입학을 하였는데, 그 중 남자 친구들은, 한동네에서 낳고 자랐으므로 얼굴도 알고 이름도 익히 알고 있지만 말 한 마디 섞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반상의 구별이 워낙 투철하였던 시대이고, 어른들이 지나치게 엄격한 탓도 있었던 탓에 남자 아이들의 놀이에 낄 명분도 없어서 였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중 한 명은 나보다 한 항렬이 높은 아저씨도 끼어 있었고, 동갑이라 너니 내니 학교를 오가면서 아이들과는 금방 친해졌습니다.
첫 오락시간이 기억납니다. 당시 김순희란 샘이 노래를 시켰는데, 우리 아저씨가 호기 있게 젤 먼저 나를 추천했습니다. 나는 유치원도 못 다녔고, 동요다운 동요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선생님께서 시키는 것이니,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가서는, 아버지가 유성기에서 평소 즐겨들으시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부른 겁니다. 뭐 음정 박자 형편없었겠지만 가사는 특유의 잘 외는 성격 탓에 가사만큼은 정확했을 것입니다. 암튼 그 노래를 무사히 다 마치자 선생님은 나를 향해 어째 싸아 하는 눈길을 보내고는 들어가라고만 했습니다.
그 때 앞에서 자리로 들어가는 나를 보고는 눈치 없는 우리 아저씨가
"와 선희 대단한대!' 하며 자뭇 선망조로 날 쳐다보았습니다^^~
암튼 우리는 방과 후면 학교에서 당시 후진국 국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둥근 바게트빵을 세 개 혹은 여섯개 씩 타서 들고 같이 집으로 향했습니다. 오던 길에 십리 좀 못되는 길은 초등생들에게는 길었으니 가재도 잡고 빵도 먹고 그랫는데, 아무것도 안 넣고 먹는 바케트 빵은 정말 맛이 없어서 배가 고파 베어 물었다가도 금방 질리는 맛없는 빵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빵을 소중하게 책보에 담아 가지고 갔는데, 그 이유는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들이 빵을 기다리며 동구 밖까지 나와 있는 경우가 흔하였기 때문입니다.
동갑 아저씨는 정말 당시에 내게 참 잘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워낙 젠틀한 신사요 선비로 자라났지만 당시에도 동네 아이들을 휘어잡던 아저씨는 내게는 늘 쩔쩔매주었고, 뭔가 친절을 베푸는 멋진 보디가드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잔뜩 의기양양해진 나는, 어느 중간쯤이면 꼭 내가 대장처럼 어깨를 으쓱이며는 꼭 이 말을 했습니다.
"나 여기 있는 애들 다 이겨~"
그리고 거기 있는 친구들을 죄다 둘러보면
우리 아저씨가 내 기세에 금방 기가 죽어서
"난 선희만 빼고 다 이겨."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남친 중에서 그중 인물이 훤출했던 한식이는 또
"난 선희하고 대섭이만 빼고 다 이겨."
뭐 이랬고 내 여친 기영이가
"난 선희하고 대섭이하고 한식이만 빼고 다 이겨."
그러면 태영이라는 꼬마란 별명의 친구가 발끈해서 기영이와 싸웠습니다. 아무튼 둘은 대개 승부가 안 나고 나중에 근순이란 (나중에 묵화를 잘 그린단 소식을 듣던 친구였다.)친구가 고개를 떨구고는
"난 다 못 이겨."
뭐 이런 행위를 하며 우리는 집으로 향하였고 참 즐거운 하교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즐거운 것은 생전 나랑 같이 놀지도 않던 애들이 집으로 나를 찾아와 준 것이었습니다.
"선희야 노올자~"
이런 부름 소리는 정말 달콤합니다. 나는 당시 부모님이 서울에 계시고 할머니와 있었으므로 눈치를 보며 친구들을 따라 나서면 그 아이들은 능숙하게 도롱룡도 잡고 위장에 좋다는 도롱룡의 알을 발견하여 건지는 법도 가르쳐주고 고사리 꺽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가 논에서 도롱룡 알을 건지는데, 논에 들어가려던 나를 말리며 한식이가 흰고무신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 말고 나에게 흰 고무신을 주며
"니가 갖고 있어."
뭐 그러면서 대신 도롱뇽의 알을 건져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맨 처음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 한식이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 주는구나.’ 하지만 기분 좋은 것도 잠시, 남자애들은 점점 더 깊숙한 논으로 가버렸고 우리들은 달래를 캐러 다녔는데, 난 어느 논가에 한식이 고무신을 놓고 나중에 찾으러 갔지만 이상하게도 그 논이 그 논 같아 결국 못 찾고 말았습니다. 당시 고무신은 참 귀했고, 새 고무신을 잃어버렸으니, 집에서 퍽 혼이 났을 텐데. 그 티도 안 냈던 게 마음에 걸려 나중에 나는 하얀고무신이란 황혼로맨스의 글을 쓴 적이 있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이 어린 친구들과 작별도 못하고 서울로 전학을 왔습니다. 부모님이 서울로 나를 데려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고향생각이 나는지 친구들과 놀던 개울가를 떠올리며 냄새나는 개천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친구들을 생각했지만 여의치 못하였던 아버지의 사업 덕분에 우리는 이년 여 기간을 집에 내려가지 못하였고, 장남의 본분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괴로워하는 모습만큼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 갔습니다. 그리고 후에 방학때마다 고향에 내려갔지만, 당숙 외에 우리 동기들은 나를 봐도 소 닭 보듯 무심히 지나쳤고, 실제로 마주친 일도 별로 없습니다.
암튼, 우리 아저씨 덕분에 내가 그 삼개월 밖에 안 다닌 그 초등학교 동창회에 초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내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친구들은 금방 소문을 내서 한식이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난 고무신이야기부터 했는데, 그 바부탱이 같은 친구는 고무신은 아예 기억도 없더군요. 그러면서 겨우 한다는 소리가
"정 그러면 한 켤레 사주던지."
그리고 반가운 소식 하나는 안 오려던 참에 나를 기억하고 있던 내 짝궁 여학생이 참여한다고 해서 정말 기분이 들떴으며, 또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 남편에게도 허락을 받아 무려 1박 이일의 동창회를 가게 된 것입니다.
나와 동갑인 아저씨의 차를 타고 고향에 가는 길에 거기서 오래 이장을 하시고 군의원하시던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셨다는(날 태워준 당숙의 부친. 독학이라는 학력으로 군의원 당선되심. ) 말을 듣고
일부러 제일 좋은 복숭아도 한 상자 사고, 커다란 수박도 한통 사고
잠시 들려 인사를 드렸습니다. 원래 편찮으시면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그게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게 나는 그 분께 절하는 게 처음입니다.
윗대 조상님 중 어느 대에선가 그 댁은 서출이라고 해서 그 댁의 그 누구도 아저씨나 할아버지 호칭을 한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어른들이 그러니 우리는 의례 그러려니 했고, 그저 누구 아버지 하고 동갑아저씨한테도 이름이나 불렀는데,
사실 우리 조모님 혼자 고향에 계실 때 음으로 양으로 가장 많이 찾아뵙고 도움을 드린 분이 할아버지신데다가,
꼭 대접을 하여드려야 하는 것 같아서 였습니다.
근데 그분들 뵈니 우리 엄마가 생각나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아무튼 너무나 반가운 얼굴을 뵙고 친구들과 만났는데 하나도 서먹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기억해주는 몇 친구도 있었고,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금방 고향 이야기에 빠져들어 거의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거기 소유리란 마을의 한 아방궁같은 산자락 전부가 음식점인데다가, 집이 세 채나 되는데 모두 텅텅 비어 있는 방들이라
우리 아저씨는 제일 좋은 방에 이불이며를 다 깔아주고,, 거실에서 잠자는 남동창들.. 코고는 소리 들린다고 문도 닫아주고.. 보초도 서주는 등.. 정말 간만에.. 어린 시절.. 고향의 소쩍새 우는 밤이 깊어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일학년 때 내 짝궁인 윤현자란 친구는 나를 기억하고 안 오려던 동창회에 단지 내가 참석했다는 이유로 인천에서 차를 달려 제일 먼저 도착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할머니께서는 일끼지 아침을 차려놓고 거기에 와서 아침을 들라고 해서 시골의 맛갈스러운 음식에 백중에 하셨다는 증편까지 얻어먹고.. 오이지며 말린 표고버섯이며 감자등을 그야말로 사과박스 이상 크기로 한아름 당숙의 차에 실어 놓으셨다.. 나 완전.. 수 났음..ㅋㅋ
그리고 친구들이 모여있는 그 친구가 한다는 음식점에 갔는데 계곡이 흐르는 옆에 데크로 설치한 큰 테이블 여럿을 붙여놓고, 그 곳 음식이라는 염소고기 전골 오리고기 전골 등을 먹는데, 정말 즐거운 것은 나타난 친구들이 정말 하나같이 개성 넘치는 모습이었던 겁니다.
기막힌 멋쟁이 여친은 채희라는 개명도 하고 나타났고, 시골서 농사짓는 친구에 다양한 직업군의 친구들이 얼굴이 어찌 하나같이 친근한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즐거웠는데.. 어디나 나름 출세한 친구 몇이 있기 마련.
친구들의 편의를 봐줄 정도로 잘 된 친구도 있었고,
내가 고무신을 잃어버렸던 한식이는 동탄에서 세탁소를 한다는데, 새로 뽑은 신형차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대개 무슨 일이던지 사업하는 친구들이 더 여유가 있는 거, 학력과 관계없이 땀 흘린 친구들이 잘 사는 거는 정말 흐뭇했죠.
근데 한 친구가 뒤 늦게 나타나, 한식이란 그 친구가 선희가 내 첫사랑인데, 전화를 받고는 무척 설레었다 하는 뒷 이야기를 들은 일도 재미있었으며
경조사 챙기는 사이가 되자며.. 가을 수확하면 땅콩 보내준다고 차에 와서 손을 부여잡던 착한 남동창, 우리 동우회에서 맛 본 지평막걸리 사러간다고 나서던 울 동창 하나, 멀리 횡성에서 농사짓는 여동창은 철마다 뭔가 보내겠다고 주소까지 꼼꼼히 적어 갔고,
여주 친구들은 가래논 쌀 보낸다고.. 그 쌀에 대하여 설명이 구구하였습니다.
사실 저의 가계에는 소현세자가 자리합니다. 인조 임금의 시대, 가장 불운한 세자로 불리는 그는 결국 독살이라 의심할만 한 죽음을 맞고 그의 아들들 조차도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죠. 그런데 소현세자의 따님 중 경순 군주가 시집와 이룩한 곳이 우리 집안입니다. 하지만 경순군주의 남편 황창부위 또한 신혼 시절, 자객에 의한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습니다. 무엇이 두려워 아들과 손자 손녀 사위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야 했는지.
다시 마을을 지나는 길에 할머니 한 분 앉아계시는데, 거기는 이미 고향 분들은 거의 떠나고 타지역의 사람들 관사같은 현대식 집들로 가득) 그분의 낯이 익어 차에서 내려 인사하는데 또 어찌 그리 눈물 나게 반갑고 돌아가신 친정 엄마 생각에 또 눈물이 났습니다.
일근이엄마, 경애 엄마 그런 분들. 만나 얼싸안고 인사하며 꼬깃한 지전 몇 닢 겨우 손에 쥐어드리니 괜히 더 애잔하게 울 엄마 이야기 해주시며 안아주셨습니다.
조모님 돌아가신 후, 연고가 사라진 고향에는 어머니 산소에나 겨우 갈 뿐이었는데 이번 기회로 다시 그리웠던 고향을 찾은 것만 같습니다.---제가 여성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각고의 노력도 포함되었음을 가상하게 봐주소서~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