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nocutnews.co.kr/news/4057632
세상을 제대로 바르게 돌리려면 참으로 많은 것을 손봐야 하는군요.
닭들은 머리가 부족하니 국민들이 깨어나 나서지 않으면 제대로 못하겠고....,
<이하 원문>
◇ 정관용> 오늘 스튜디오에 아주 귀한 손님 모셨습니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박사님을 모셨어요. 세계적인 옥수수 육종학자이시죠. 지금까지 두 번 노벨상 생리학상 후보에 오르셨고요. 1996년엔 북한에서, 이 분이 개발한 옥수수 품종 훔치기 위해서 간첩까지 보내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그런데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세 번이나 거론이 됐습니다. 아프리카 기아문제 해결을 위해서, 또 북한 주민의 인도적 지원을 위해서 옥수수 품종을 개발해 오신 바로 그 공 때문에요. 요즘은 중국에 체류하면서 또 새 품종 개발에 여념이 없으셨고 이렇게 바쁜 와중에 또 '하루하루가 기적이다'라는 책도 펴내셨네요. 마침 한국에 일어 있어 잠시 입국하셨다길래 저희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 김순권> 네, 안녕하세요.
◇ 정관용> 건강하시죠?
◆ 김순권> 네, 감사합니다.
◇ 정관용> 대학을 어디를 나오셨죠?
◆ 김순권> 저는 경북대학교를 졸업을 하고 수원 농촌진흥청에 있으면서 고려대학교 대학원 세 학기를 하고 미국 정부 장학생이 돼서 미국 하와이대학에 가서 석사학위를 시작하다가 또…
◇ 정관용> 그러니까 대학시절부터 바로 이런 품종 연구를 전공하신 거죠?
◆ 김순권>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걸 쭉 했죠. 울산농고 나왔는데. 그래도 뙤약볕에서 나와서 완전히 눈, 비를 맞으면서 또 일을 해야 되니까 그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그런 걸 안 하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이 제가 그 길로 가게 됐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그 여러 품종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옥수수에 탁 꽂히신 건 언제부터예요?
◆ 김순권> 제가 농촌진흥청에 가서 통일벼 만드는 데, 육종하는 데서 그 심부름을 했어요. 그 보조를 하다가 공무원이 됐는데 1969년이죠. 그런데 마침 옥수수과에 자리가 한 개 있어서 별 차이가 없어서 옥수수를 지원했는데.
◇ 정관용> (웃음) 농촌진흥청에 갔는데 배속된 부서가 옥수수과였다?
◆ 김순권> 네. 공무원이 되고 난 뒤에. 이제 가장 제가 옥수수에 미친 건 미국에 가서였어요. 제가 보기엔 미국이 잘 사는 것이 완전히 옥수수때문으로 보였거든요. '하이브리드 콘'때문이데…아, 원래 '하이브라이드'라는 이름이 1930년도에 옥수수에서 생긴 겁니다.
◇ 정관용> 무슨 뜻이에요?
◆ 김순권> A하고 B하고 교배를 했을 때 폭발적인 힘이 생기는 것.
◇ 정관용> 하이브리드 콘이라고 해요, 그걸?
◆ 김순권> 네. 그걸 하이브리드 콘이라고 해요. 미국이 잘 사는 것이 옥수수 때문에 잘 사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우리가 그 당시에 1971년 너무나 못 살아서 그 한이 맺혀서 옥수수를 정말로 잘 안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 정관용> 미국 가보니까 그때 우리나라 옥수수 농사도 있지 않았습니까?
◆ 김순권> 네, 있었죠.
◇ 정관용> 미국이 어느 정도나 앞섰습니까?
◆ 김순권> 3배, 5배 정도 앞서가고.
◇ 정관용> 수확량이 그렇게 많아요?
◆ 김순권> 그렇게 차이가 나고. 미국에서는 100% 하이브리드라는 거, 아까 그 A하고 B하고 교배를 했는데. 우리는 그냥 재래종이라고 두루뭉술 섞어서 그 농가에 그냥 처마 밑에서 하루 놨다가 또 쓰고 그런 걸 했어요. 그 재래종 합성 품종 그런 거라서 수확량이 엄청나게 차이가 있고. 미국에서 그 옥수수를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은 겁니다.
◇ 정관용> 그래서 귀국하셔서 우리 토양에 맞는 옥수수 품종을 많이 개발하셨잖아요. 그런데 선진국에서는 개발도상국에서는 그런 품종 개발 못 한다고 했다면서요?
◆ 김순권> 못하는 것보다 그 종자 생산이 하도 어려우니까.
◇ 정관용> 왜 이렇게 어려워요?
◆ 김순권> 왜냐하면 한 개의 하이브리드를 만드는 데 최소한 두 개의 원종이 필요합니다. 원종이 필요한데 그 원종은 세력이 보통 하이브리드의 한 4분의 1, 5분의 1 그 정도밖에 안 됩니다. 생산량도 적고. 그러니까 그걸 재배하기가 상당히 어렵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근데 이 촌놈이 이 세상에 못 하면 아무도 못 할 것 같았어요, 거기서 이제 도전 정신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3년 3개월 만에 석사박사를 마치고…
◇ 정관용> 미국에서.
◆ 김순권> 네. 박사가 돼서 졸업식이 열흘이 남았는데 그 열흘이 아까워서 도저히 미국에…
◇ 정관용> 못 있겠다?
◆ 김순권> 못 있겠다. 무조건 농촌진흥청으로 귀국을. 그것도 미국의 종자회사가 ‘한 달에 3000불 줄 테니까 가지 마라. 한국 가면 일 더 못할 테니' 그래서 3000불이 아니라 제가 농촌진흥청에 왔을 때 48불을 받았죠. 그래도 내 조국이니까 나라가 못 사니까 그 당시에 저뿐만 아니라…
◇ 정관용> 3000불을 뿌리치고 48불 받으러 오셨군요.
◆ 김순권> 네.
◇ 정관용> 그래서 품종개발을…
◆ 김순권> 하는데 끊임없이 또 반대를 하는 거죠.
◇ 정관용> 누가 반대를 해요?
◆ 김순권> 우리 진흥청이라든가 저보다 더 좋은 학교에 나온 사람들. 국내에서도.
◇ 정관용> 왜 반대해요?
◆ 김순권> 왜냐하면 우리도, 자기들도 해보다가 안 됐는데 실패했는데. 왜 네가 자꾸 이런 걸…안 될 거 뻔한데 왜하느냐. 그래서 제가 그런 반대, 그런 것 때문에 더 정말로 이를 악물고.
◇ 정관용> 해야 되겠다. 그래서 얼마 만에 품종 개발 성공하셨어요?
◆ 김순권> 1974년도에 3년 만에. 지역 강원도에서 강원도 제일 먼저 처음 본 것이 홍천, 그다음에 평창. 영월에 갔더니 미국에서 본 것보다 더 좋은 옥수수가 나온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옥수수를 붙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 정관용> 이름이 뭐라고요?
◆ 김순권> 수원…농촌진흥청에 있었기 때문에 수원 19번째 만든 옥수수가 수원19호입니다. 그다음에 20호, 21호. 그 세 개를 우리가 연구팀이 육종을, 성공을 하기 시작했죠.
◇ 정관용> 19번째라는 얘기는 그 앞에 1번부터 18번까지.
◆ 김순권> 18번까지 그런 게 있었다는 거죠. 있었는데…
◇ 정관용> 과거에.
◆ 김순권> 네. 과거에 있었는데 실제로 연구만 했지, 농가에 이런 재배가 안 된 거죠.
◇ 정관용> 김 박사님이 그 수원19호가 첫 번째로 하신 겁니까?
◆ 김순권> 네.
◇ 정관용> 그리고 20호, 21호가 성공을 했고.
◆ 김순권> 네. 그 세 개를 했는데 그중에서 19호가 제일 안전하게 안전성이 높아서 19호가 한 30년 동안 남쪽에 재배가 되고 그리고 또 제가 98년도 북한에 갈 때 갖고 왔죠.
◇ 정관용> 북한 얘기는 좀 이따 하고요. 그러니까 국내에 와서 이렇게 19, 20, 21호. 그 외에도 또?
◆ 김순권> 29호도 만들고 상당히 여러 개가 있었죠. 그런데 종자 생산방법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 최초로 새로운 방법을 개발을 해서 기술을. 보통 종자 생산보다 한 30%. 종자, 알맹이가 더 나오게. 그걸 개발한 것이 결정적인. 그것이 하나 발견이 돼서 이걸 성공시킨 겁니다.
◇ 정관용>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 농촌에서 생산하고 있는 옥수수는 거의 다 우리 김 박사님이 개발하신 거예요?
◆ 김순권> 아니죠. 현재는 아닙니다. 지금 수원19호가 한 5년 전부터 다른 품종으로 교체가 되었고.
◇ 정관용> 계속 바꿔야 돼요?
◆ 김순권> 네, 그렇죠. 이것도 옥수수도 제가 만든 것이 한 30년 걸렸는데. 보통 30년 되면 재배가 안 됩니다. 한 10년, 20년 사이에 새로운 품종이 나와서 다시 개량이 되어야 기후가 변하더라도 안전하게 생산량이 나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똑같은 품종으로는 20년, 30년 이상은 못 간다?
◆ 김순권> 네. 갈 수도 있는데 상당히 드문 경우고. 언제라고 새로운 품종이 나와야 됩니다.
◇ 정관용> 그러다가 그렇게 왕성히 국내에서 활동하시다가 갑자기 아프리카를 가셨어요. 가셔서 무려 17년이나 계셨어요.
◆ 김순권> 제가 박사학위를 하도 별나게 하니까 박사학위하면서 석박사를 하면서 제가 23번 옥수수 농사를 하와이에서 지었어요. 하와이는 열대지방이니까 거의 매달 옥수수를 심을 수가 있죠. 그래서 제가 하도 논문도 크게 나오고 이런 걸 하니까 우리 연구하는 박사학위 커뮤니티 한 분이 두 번째 교수님이 아프리카 국제기구에 가면서 그 양반은 벼 연구 전문가인데. 가면서 옥수수하고 벼가 한 과에, 부에 있어요. 그래서 저를 데리고 가려고 무척 애를 쓰고 했어요. 아니 나는.
◇ 정관용> 한국 가야 된다.
◆ 김순권> 네. '아무리 돈 많이 준다고 해도 내가 절대 안 간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못 사는데' 하면서 한국을 왔는데 이 양반이 거기 가서 거의 1년에 한 두세 달마다 팩스를 보내고 '너 언제 올 거냐. 여기 너무 필요하다' 그 당시 73년, 그 당시 아프리카 식량이 정말로 굶어죽는 그런 대륙이었죠. 그래서 제가 '한국이 성공하면 간다'내가 그런 조건을 걸었죠. 그래서…
◇ 정관용> 한국에서 어느 정도 됐으니.
◆ 김순권> 78년도에 성공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도 받고 아주 세계 언론이 개발도상국에서는 안 되는 줄 알았는데 됐다.
◇ 정관용> 그렇게 해서 성공했으니 이제는 더 가난한 아프리카 가봐야 겠다, 이거였습니까?
◆ 김순권> 제가 약속을 했으니까.
◇ 정관용> 혹시 우리 정부에서 안 놔주지 않았어요?
◆ 김순권> 그렇죠. 정부에서는 2년 동안 조건부로.
◇ 정관용> 2년만 갔다 와라?
◆ 김순권> 2년만 갔다 와라 해서 갔는데. 6개월 만에 그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인정을 받아서 우리 연구소 소장이 한국에 와서 한국 정부에 '발 아프리카를 위해서 김순권을 놔 달라'그래서 제가 아프리카에 17년 있을 줄은 생각 못 했죠. 하다 보니까 너무나. 제가 통일이 되었으면 안 갔을지도 몰라요. 북한에 옥수수를 많이 재배하니까. 그래서 아프리카에 가서 전 대륙의 옥수수를 맡아서 일을 하니까 남자로써 얼마나 신이 나요? 저는 아프리카에 갔더니 우리 민족이 받은 빚을 옥수수로 갚는다.
◇ 정관용> 그러다 보니 아프리카 어느 한 나라뿐 아니라.
◆ 김순권> 전 대륙이죠.
◇ 정관용> 전 대륙을 상대하다 보니 17년이나 계시게 됐다. 그렇군요. 그리고 17년 만에 다시 돌아오시게 된 계기는 또 뭡니까?
◆ 김순권> 북한이 1994년도 CNN뉴스라든지 이런 걸 보고 완전히 우리 동포들이 굶어죽는 그런 상태였고. 유고슬라비아라든가 프랑스, 헝가리 등... 북한하고 상당히 가까운 나라들 과학자들이 북한에 다녀오고서…;기 가 보니까 옥수수가 주식이다'. UN에서도 ' 한국 사람으로서 네가 들어가야 저 북한동포를 살릴 수 있다' 방향의 무언의 압력도 많이 오고. 저희 집사람도 북한에서 태어났어요.
◇ 정관용> 아, 그래요?
◆ 김순권> 한 살 때.
◇ 정관용> 그래서 몇 년도에 귀국하신 거예요?
◆ 김순권> 95년도에 했어요.
◇ 정관용> 95년도에. 그런데 96년에 울산 부부간첩사건 때, 그 간첩이 바로 박사님 옥수수 훔치려고 왔다고.
◆ 김순권> 네, 왔죠.
◇ 정관용> 또 나이지리아 계실 때는 북한이 납치하려고 했다고.
◆ 김순권> 네. 제가 79년도에 갔는데 80년 3월 달에 흑인들을 시켜서 북한이 저를 납치하려다가 실패하고.
◇ 정관용> 아이고. 그런 일도 있었고.
◆ 김순권> 그런데 귀국을 했는데 빨리 안 오고 여기에서 제가 또 왔다는 언론보도도 있고 하니까 그 북한에서 부부간첩이 와서, 그것도 이제 그때 안기부인가요? 발표를 하는데 보니까 일주일 후에 김순권 만나서 옥수수를…
◇ 정관용> 가지고 가려고 왔다?
◆ 김순권> 네, 가지러 왔다 해서 부인은 약을…캡슐을 먹고 죽고 남자만 그때 산 거죠.
◇ 정관용> 그게 96년이에요?
◆ 김순권> 네.
◇ 정관용> 그리고 정작 북한하고 일을 하시게 된 건 1998년으로 제가 알고 있는데.
◆ 김순권> 네. 그 98년 1월 달입니다.
◇ 정관용> 그 몇 년이 왜 걸렸습니까?
◆ 김순권> 왜냐하면 이 정부에서…우리 그때 정부에서.
◇ 정관용> 우리 정부가?
◆ 김순권> 네. 우리 정부가 이제 북한에서 결정을 해도 보내줄 수 없고.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
◇ 정관용> 되고 나서 이제 가시게 된 거군요.
◆ 김순권> 네. 97년도 선거에 이기고 나서 제가 북한을 가게 된 겁니다.
◇ 정관용> 그 98년 이후로는 북한을 수시로 드나드셨다고요.
◆ 김순권> 제가 뭐 한 1개월 반, 2개월마다 거의 왔다 갔다 했죠.
◇ 정관용> 그래서 북한에 맞는 품종들을 또 만드신 거예요?
◆ 김순권> 네. 왜냐하면 처음에는 우리 남쪽 강원도에 맞는 옥수수 수원19호가, 그 옥수수가 통일이…남북이 갈라져 있는 거 압니까? 모르잖아요.
◇ 정관용> 아니, 그러니까 강원도도 조금 올라가면 북한이잖아요.
◆ 김순권> 네. 그래서 북한에 갔더니 이 수원19호. 자기들 이름은 강냉이, 강19호인데 너무 너무 잘 된 겁니다. 그래서 뭐 처음부터, 첫해부터 우리가 북한이 아주 깜짝 놀라는 그와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 정관용> 그래서 아프리카의 기아 해결에 도움을 주시고 또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도움을 주시고 이래서 노벨평화상 후보까지 오르시고 그러셨는데. 지금은 중국에서 연구를 하세요?
◆ 김순권> 중국이 제가 북한을 왔다 갔다 하니까 중국이 예를 들면 한 몇 십 년 전만 해도 옥수수대국이 아니었어요. 제가 우리 한국 옥수수해서 아프리카로 가기 전에 태국에서, UN에서 옥수수 이걸 하이브리드 콘이 아시아에서도 될 수 있다, 이걸 가르치는 국제회의에 중국하고 소련, 베트남이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이분들이 저한테 와서 막 자꾸 이야기를 하자고 하고. 그래서 이제 우리는 국교도 없어서 굉장히 나는 겁을 집어먹고 이렇게 됐는데. 나중에 이제 제가 아프리카에 갔는데 84년도에 중국 대표단들이 와서. 우리 UN연구소에 정식으로 저를 보내 달라, 중국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제 85년도에 중국에 가서…
◇ 정관용> 이미 그러니까 아프리카 계실 때부터 중국을 왔다 갔다 하셨고?
◆ 김순권> 네. 중국 여러 번 나가서…
◇ 정관용> 그러다가 지금은 중국에 계속 체류하고 계시잖아요.
◆ 김순권> 지금은 완전히 우리가 중국에 체류 1년에 4개월 동안 제가 중국에 있습니다. 있으면서...
◇ 정관용> 중국이 김 박사님 모시기 위해서 아주 대접을 잘 한다고요?
◆ 김순권> 지금은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제가 완전히 7년 동안 농촌에서 완전 재래식 변소에서 중국음식 먹으면서 지금 옥수수만 미쳐서 이 일을 하니까 중국 정부에서도 깜짝 놀란 겁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중국에 옥수수가 많이 재배되는 것, 제가 옛날에 3년 전에 와서 그걸 해 준 것 그런 것도 인정을 하고.
◇ 정관용> 그럼 우리나라를 위해서 품종 개발하셨던 건 초창기 몇 년밖에 없고 그다음에는 계속 아프리카, 북한, 중국. 다른 나라 일만 해 주세요? 왜 우리나라는…
◆ 김순권> 아닙니다. 우리도 계속 하죠. 우리도 이제 북한 걸 하면서. 계속 우리 한반도니까 같은 영역이잖아요. 남쪽에도 계속 이제, 북한에 하면서도 남쪽에 계속 했죠. 그래서 좋은 품종이 나왔는데도 우리나라에는 제가 만든 품종이 먹혀들어가기가 옛날 같이 쉽지가 않습니다.
◇ 정관용> 왜요?
◆ 김순권> 제가 농촌진흥청이 있을 때는 진흥청에서 무조건 밀고 나갔는데 제가 경북대학에 있고 지금은 이제 한동대학에 있는데.
◇ 정관용> 석좌교수로 계시잖아요.
◆ 김순권> 네. 제가 있으니까 이 품종을 정부에서 의지를 가지고 밀고 나가야 되는데 그리고 또 수입하는 사람들…이 일을 어떻게 옥수수가 많이 증산될까 싶어서 겁을 내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는 것 같아요.
◇ 정관용> 잠깐만요, 김 박사님이 개발하신 품종이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는데.
◆ 김순권> 확실하죠, 뭐.
◇ 정관용> 그런데 옥수수 수입업자들이 못하게 한다는 말이에요?
◆ 김순권> 수입 암암리에 그런 것도 있고 제가 옛날에 이제 수원19호 만들 때도 반대하던 분들, 그런 대학교수들 지금 이제 자기들 제자들이 또 중심이 돼서.
◇ 정관용> 대학교수들은 제자들이 수입업체에 있어서 반대하는 거예요?
◆ 김순권> 아니, 수입업체가 아니고 이 사람들이 전부 다 연구…그거죠. 과제를 주고 연구비를 줘야 되는데 연구비를 심사할 때 언제라도 상식에 벗어나는 그런 결론을 내려서 연구를 지금 못하도록 하는 거죠.
◇ 정관용> 그래요?
◆ 김순권> 네, 그래서 대학의 대학교수가 그냥…
◇ 정관용> 정작 그러면 김 박사님은 국내에서는 자꾸 홀대 당하시는 겁니까?
◆ 김순권> 뭐, 홀대 당해도 제가 정말 국가를 위해서 아프리카의 모든 걸 뿌리치고 UN기구의 그 좋은 대접이라든가 모든 조건을 뿌리치고 왔는데. 국내에 와서 연구하기가 너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 정관용> 아, 그래요? 95년 그때 오셔서?
◆ 김순권>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상식을 벗어나는, 그러면서 세계 제2의 옥수수 수입국인 대한민국이.
◇ 정관용> 우리나라가 제2위 수입국입니까?
◆ 김순권> 일본 다음으로. 지금 가축사료자급률이 0.8%입니다. 1%도 안 됩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가 적어도 한 10%, 20%는 할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 정관용> 그런데 잠깐만요. 연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누가 왜 막는 겁니까?
◆ 김순권> 옛날에 반대하는, 내가 하이브리드 할 때 안 된다는 사람들. 그리고 또 지방대학에서 하니까 왜…
◇ 정관용> 더 좋은 대학교수들?
◆ 김순권> 교수들이 이런 것을…
◇ 정관용> 그런 품종을 보급하는 일을 정부가 해야 되잖아요.
◆ 김순권> 정부가 해야 되죠.
◇ 정관용> 그런데 그걸 왜 안 하냐고요.
◆ 김순권> 그러니까 왜냐하면 정부는 수량이 낮든, 뭐든 정부 이름으로 된 것. 그런 걸 하고 싶지.
◇ 정관용> 정부 이름으로 개발된 품종?
◆ 김순권> 그런 품종, 이런 것을 하고 싶지. 어디 뭐 경북대학교 1호, 2호 이런 거 나가면…
◇ 정관용> 그러면 예를 들어서 경북대학교 1호를 전국에 보급을 하면 정부 입장에서 돈이 더 듭니까?
◆ 김순권> 아니, 돈이 되는 게 아니라 정부의 그 연구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좀…
◇ 정관용> 자존심 때문에?
◆ 김순권> 그렇죠. 자존심 이런 것 때문에 그런 겁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것에 저는 옥수수 연구에서는 이게…
◇ 정관용> 혹시 그게 결과적으로는 옥수수 수입업자들의 저지 때문에 정부도 학계도 다 그쪽 편드느라고 그러는 것 아니에요?
◆ 김순권> 그럴 가능성도 상당히…실은 국제 곡물 마피아들도 있습니다. 어느 그 선진국 대사님께서 언제 한번 저를 초청을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와서 옥수수 연구를 대강 하라고, 저한테. 그런 자문을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더 아주 오기가 나서 더 해야 되는데 나중에 보니까 연구비를 잘 안 주고 연구를 중단시키는 것도 참 이런 것. 그리고…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제 중국에서는 또 극진히 대접해서 모셔가고.
◆ 김순권> 중국에서는 뭐…
◇ 정관용>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못하고 계시고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 웬 책을 내셨어요?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 김순권> 제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우리나라에 저 같은 외국에서 학위까지 받고 국제기구에 아프리카하고 미국하고 한 20년 있었죠. 이런 사람도 이렇게 홀대를 하는데. 힘없는 국민들은 얼마나 괄시를 당하고 정말로 관피아들이 백성을 못 견디게. 이번에 그 세월호 사건도 비슷한 거죠. 그리고 저는 이번 기회에 완전히 교피아들.
◇ 정관용> 교피아?
◆ 김순권> 네. 농촌진흥청 같은 데 있다가 나와서 진흥청뿐만 아니라 대학에 있으면서 연구비 완전히 독식을 하고 완전히 형님, 동생하면서 연구비를, 국민 세금을 갈라 써서 연구업적이 나오든, 안 나오든. 완전히 뭐 생산적이지 않은 논문이나 쓰고 이런 걸 하는 이런 것이 빨리 고쳐져야 대한민국의 농업이 똑바로 설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가 어떤 교수들은 완전히 자기가 평가위원이 돼서 좋게 평가해 주면 연구비를 1억, 2억 받고 이렇게 하는. 그런 자랑하는 교수들도 있고 너무나 절실하게,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꿈은?
◆ 김순권> 저는 빨리 남북관계가 좋아져서 그 북한의 식량 옥수수가 자라면 식량자급이 충분히 됩니다. 북한도 핵이라든가 이런 걸 포기하고 빨리 옥수수 농사라든가 이런 걸 잘 해서. 인민을 먹여 살려야 되죠.
◇ 정관용> 지금은 북한에 가서 도움은 못 주십니까?
◆ 김순권> 북한은 앞으로 이제 남북관계만 좋아지면 언제라도 좋아질 수 있죠.
◇ 정관용> 이 책의 부제가 '수수 한 알에서 뽑아 올린 세계 평화의 꿈'니다. 지금 마지막 말씀 쭉 들어보니까 '수수 한 알은 그냥 식량 한 알이 아니구나. 세계 평화의 길이구나'는 생각. 오늘 아주 큰 배움을 받았습니다. 박사님 고맙습니다.
◆ 김순권> 네, 고맙습니다.
◇ 정관용> 네,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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