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이란?
선악과 신과 귀신 그리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시켜놓고
선과 신과 진실만을 선별하여
참된 인간세상을 완성시키려했던 구인문의 흐름 속에도
이를 경계하며 또 다른 인간세상을 바라보는 인문이 있었다.
전자는 이분법적 극단주의 이념으로 힘과 승패에만 매달리며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되었지만
후자는 극단의 양쪽을 붙들고 화합과 조합으로 연결하려는 열정에
온 몸을 떨며 그 명맥만을 겨우 이어왔다.
전자는 구인문의 대세요, 현실속의 승리자였지만
후자는 극소수 현인들만의 아우성이요, 이상일 뿐이었다.
바로 중용이다.
중용은 누구나 원하고 바라는 삶의 가치였기에
가정과 정치 그 어디에도 타당한 철학의 영역이지만
‘실체적 운용’에 돌입되면 일부지식인이나 대중들에게는
양다리 걸치는 이중철학으로 곡해되는 측면도 있다.
특히 설득력이 부족한 중용주의자는
선을 명확히 그어대며 양자택일을 다그치는 자들 앞에서
용맹 없는 겁쟁이로 오해받기가 일쑤였다.
중용철학을 섣불리 외치는 자는
박쥐로 비판받으며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고 무수히 쓰러져 갔다.
현실정치에 잠시 머물렀던 공자도 그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이와 같이 자신과 가정의 행복을 함께 만족시키고
권력욕과 국민사랑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며
직위욕을 가지고 있으면서 물질탐욕을 버려야 하는 중용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양면철학이었다.
중용철학의 내공을 아무리 깊이 쌓은 자라도
대중에게는 설득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내공이 부족한 지도자가 중용을 현실제도에 서둘러 적용하면
더 큰 문제와 부작용이 발생한다.
죽이 필요하면 죽이 되고
밥이 필요하면 밥이 되는 솥이 중용이라지만
그 솥을 잘 다루는 능력이 없으면
죽도 밥도 아닌 엉망진창이 된다.
좋기는 한없이 좋지만 잘 못 다루면 본질이 변질되어
오히려 위험천만한 사태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중용을 쉽게 말하는 것은
원시인에게 매뉴얼이 없는 고급 승용차를 선물해주며
잘 사용하라 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원하나 그 행함이 어렵다는 것이다.
선악과 신과 귀신 그리고 진실과 거짓을
명쾌하게 구분하여 선을 긋는 흑백주의자들과
그러한 ‘경계 짓기’보다는 양쪽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타당과 비타당만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중용주의자의
삶의 가치관은 너무도 달랐다.
전자는 다수요, 후자는 소수이니
설득하기가 매우 힘든 중용은 다수를 극복해나가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중용의 사회는 가장 인간적인 사회이기에 반드시 도래되어야 하고
이미 문학, 예술, 경제,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실현되고 있다.
단지 정치 종교분야만이 중용을 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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