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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양파 값도 안되는 기독교 노예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4-05-14 15:10:35
추천수 33
조회수   1,267

제목

[역사이야기] 양파 값도 안되는 기독교 노예

글쓴이

uesgi [가입일자 : ]
내용
 
다양한 컨텐츠를 한 곳에, 아주 쉽게 올릴 수 있어서  와싸다의 리모델링이 너무 반갑습니다.

그 동안 좀 자세한 이야기를 정리하려면 너무 불편해서 피했는데, 이제는 와싸다에도 좀 자세한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테스트용으로 다른 사이트에 정리했던 역사이야기를 가져와봅니다. 

오랜간만에 역사이야기 한토막을 정리하는군요.

이번 이야기는 이 그림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문명5의 술레이만 대제입니다. 설명을 봐야 하기 때문에 그림을 키워봤습니다. 




술레이만 대제에 대해서야 워낙 많은 자료들이 있기때문에 DP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고, 아래 부분의 "바르바리 해적"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바르바리 해적에 대해, 나포할 수 있고 해군 유지비가 1/3에 불과하다고 설명했죠? 해적이니 유지비가 적죠. 문명 5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북아프리카 알제리와 튀니지 등에 본거지를 둔 이슬람계 해적으로 15~17세기에 악명이 높았던 해적입니다. 요즘의 소말리아 해적처럼 상선을 털어먹는 생계형 해적이 아니라 대함대까지 갖춘, 유명한 캐리비언의 해적과 비교해도 모욕을 느낄 정도로 대단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이 워낙 많은 유럽인을 잡아가다 보니 "알제리 노예시장에서는 기독교 노예가 양파값도 안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바르바리 해적의 최절정기는 오스만 제국의 최절정기와 맞아 떨어지는데, 술레이만 대제가 해적의 우두머리 바르바로사Barbarossa를 해군 제독으로 임명하고 유럽을 공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 그림과 같이 술레이만=바르바리 해적이라는 공식이 된 것입니다. 

그럼 바르바로사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겠죠? 여기서는 화악~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본명은 히즈렛딘Khiz-ed-Din이지만 붉은 수염때문에 바르바로사로 더 많이 불립니다. 




유럽인이 그린 그의 초상화입니다. 당시에는 해군 제독이면 삼지창이 기본이더군요...

그는 원래 그리스 출신으로 형과 함께 두 척의 갤리엇Galleot(돛없이 노로 항해)을 몰고 창업(해적질)에 나섭니다. 자영업이 첫 해에 절반은 망하듯이, 찌라시를 돌린 후에 바로 단속에 걸려 폐업하게 됩니다. 재수없이 까불다가 성요한 기사단의 함대에 걸렸고 형은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어느 쪽이던 노예가 되면(특히 해군) 평생을 배 안의 노꾼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집안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않는 한은 이렇게 말입니다. 




유럽은 범죄자와 전쟁포로를, 오스만은 노예를 주로 사용했죠.

다행히 몸값을 내고 풀려난 두 형제는 해적의 본거지인 튀니지에 본점을 차리고 문어발 확장을 합니다. 두 형제 모두 해적질에 타고난 천재였던 것입니다. 튀니지가 원래 스페인령이었는데 왕이 죽은 틈을 타서 아예 튀니지를 집어 삼키고 오스만의 냉혈왕 셀림에게 바치고 태수자리를 받습니다. 강도가 드디어 정계에 진출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정도 비슷해서... 씁쓸합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던 스페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반격을 받은 형은 전사하고 해적 체인점은 히즈렛딘에게 넘어갑니다. 스페인 함대가 본거지 소탕을 했다면 오늘의 이야기도 없었을텐데... 그들은 오스만 제국의 반격이 두려워 머뭇거리는 동안에 태풍이 불어와 치명상을 입혔고 그렇게 위협에서 벗어난 히즈렛딘은 겁없이 스페인 본진털이에 나섭니다. 

스페인에 잡힌 70,000명의 무어인(스페인과 북아프리카계 이슬람)을 데려와 해방시키면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에서도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술레이만 대제가 신성로마제국을 공략하던 중에 빈에서 참패를 당합니다. 술레이만의 빈 공성전에 대해서는 블로그에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습니다. 끝 부분의 링크 참조하세요.

북쪽으로의 진출이 막힌 술레이만은 영토확장을 지중해와 남유럽 방향으로 전환하고 그 선봉으로 바르바로사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술탄의 호출을 받은 그는 아프리카의 온갖 진귀한 동물 그리고 막대한 약탈품을 가지고 술탄을 알현하죠.
그리고는 오스만 함대건조를 직접 지휘까지 합니다. 

1534년, 오스만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해안을 유유히 약탈하던 그는 유명한 미인을 납치해서 술탄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지만, 이탈리아 기사의 도움을 받은 미인은 잠옷차림으로 간신히 빠져나가 많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누구에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탈출과정에서 기사가 미인에게 많이 집적거렸던 모양입니다. 모욕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나중에 은인을 암살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모두 빼앗긴데다가 이탈리아 해안까지 모두 위협을 받자, 스페인이 앞장서서 연합함대를 구성했고 여기에는 교황, 제노바, 시실리, 성요한기사단 심지어 독일까지 참여합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들죠? 프랑스는? 영국은? 

프랑스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과 앙숙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반기고 내통하는 중이었습니다. 영국은 아직 변방국이었고 스페인과 앙숙이었기 때문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페인은 유럽의 성전을 레판토해전까지 거의 혼자서 짊어졌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프랑스와 영국에게 패권을 내주게 됩니다. 

해적의 특징이 뭘까요? 길게 오래 산다는 것이죠. 바르바로사는 연합함대를 보기도 전에 재빨리 "이만 해산!"을 외치고 이스탄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대대적인 함대건조 작업을 한 후에 2차, 3차 원정에 나섭니다. 

이번에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베네치아가 앞장서서 230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했고 당시 유럽최고의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ea를 지휘관으로 바르바로사 섬멸작전에 나섭니다. 
바르바로사는 겨우 122척의 함선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길게 오래 살기로 합니다. 그리고 추격하는 연합함대를 피해 프레베자Prevesa의 아르타Arta 만에 틀어박힙니다. 




좁은 입구는 오스만 육군으로 막고 대형을 갖췄기 때문에 연합함대는 밖에서 대기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르바로사는 시간을 끌다가 태풍이 와서 연합함대를 흩어놓으면 반격할 생각으로 하늘만 쳐다봤죠.

이번에는 오스만 함장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왜 우리는 도망만 다니냐는 것이었죠. 결국 함장들의 분위기에 눌린 바르바로사는 아르타만을 나서서 일전을 벌이기로 합니다. 대형함선이 훨씬 많은 유럽함대에게 승산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전사에서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전투가 벌어집니다. 바로 프레베자 해전입니다. 

양쪽이 대형을 맞추던 도중에 그만 중간에 베네치아의 대형전함 갤리온Galleon 베니스호가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베니스호는 아래 그림처럼 바람을 받는 돛으로 움직이는 대형전함이었는데 그날 바람이 없으니 움직이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오스만 해군은 달려들었고 베니스호는 격전을 벌이며 안드레아 도리아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오스만 함대의 총공격을 받아가며 버티던 베니스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전력이 우월한 연합함대가 전장을 일부러 피해 북쪽으로 기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니스호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지휘관 안드레아 도리아였습니다.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 하지만... 2가지 이유때문이었죠.
먼저 그는 베네치아와 경쟁도시였던 제노바출신입니다. 이 기회에 베네치아에게 최대한 피해를 줘서 제노바를 도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함대가 아까웠던 것입니다. 자신 소유의 전함 그리고 군주국 스페인의 전함이 꽤 많았기 때문에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안드레아 도리아의 초상화입니다. 역시 삼지창입니다. 할아버지가 꽤 몸짱이죠? 포세이돈을 흉내낸 당시의 화풍덕분입니다. 

길게 꼬리를 늘어트리고 북쪽으로 달아다는 연합함대를 그대로 두고 볼 바르바로사가 아니죠. 바르바로사는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공격을 퍼부어서 49척의 함선을 불태우거나 노획했습니다. 오스만 함대는 한 척도 잃지 않았습니다. 베니스호를 공격하느라 당한 피해를 제외한다면요.

베니스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베니스호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그것도 겨우 13명 전사/40명 부상의 피해만으로요.
오스만 해군의 작은 전함으로는 대포를 두른 갤리온을 공략할 수 없었고 그만큼 대형전함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대단했습니다. 

프레베자 해전으로 지중해를 완전히 내준 유럽은 레판토 해전 이후 해상권을 장악할 때까지 30년 동안 막대한 통행료를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는 술레이만의 특사로 프랑스까지 방문했고 오스만의 행정관료로 잘먹고 잘지내다가 1546년 73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군지휘관이나 정부관료의 목숨이 파리목숨이던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보면, 천수를 누린 그의 인생은 대단합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베니스호의 위력을 깨닫고 오스만 함대를 대형전함체제로 혁신시켰다면 레판토 해전은 물론이고 세계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어쨌든 그는 지금 터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아! 바르바로사가 죽어도, 레판토 해전에서 패했어도 바르바리 해적은 건재했습니다. 
인질을 잡아다가




노예구제수도회에게 몸값을 받고 풀어주면서 가업(?)을 이어가다가 




1805년에 미국해군에게 치명상을 입었고 1835년에는 유럽의 요구로 해적 본거지가 폐쇄되었습니다. 

PS. 혹시나 싶어서 추가설명을 하면, 당시에는 해적이 해군인 나라가 많았습니다. 영국도 해적질로 국력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스페인 상선 사략질로 바친 액수가 영국왕정의 일년 세수보다 많았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술레이만의 빈 공성전 패배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72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추천스크랩소스보기 목록
임인식 2014-05-14 15:57:28
답글

해적이 해군인 나라가 많았습니다......

그래서...해피아?...ㅋㅋ...

잘 읽었습니다.

임상훈 2014-05-14 17:59:56
답글

잘 읽었습니다...

이영근 2014-05-14 21:43:54
답글

잘 읽었습니다 3

이수영 2014-05-14 22:04:34
답글

저도 잘 읽었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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